|
“1년 8개월 동안 제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학생의 죽음 때문에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렇게 다니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고, 장애인, 가족들이 보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 학보에 기사가 실린 게 지난 1월 4일이다. 그리고 3월, 언론은 이상묵 교수를 ‘한국의 스티븐 호킹’ ‘슈퍼맨’으로 불렀다. 연구실에 스무 명의 기자가 몰린 날도 있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두 팀으로 나눠 인터뷰를 했다. “제가 세 가지 카테고리를 말씀드릴 테니 고르세요. 어떤 장을 말씀드릴까요(웃음)?”
거의 모든 언론사가 이상묵 교수를 취재했다.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일종의 책임감이기도 했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과 장애인 복지 정책 개선과도 무관하지 않다. 언론은 2차 보도를 통해 한국과 미국의 재활 치료 시스템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상묵 교수가 쓰고 있는 보조공학기구도 화제가 됐다.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어제는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언론 보도는 모두 제 입장에서만 이뤄졌죠. 그런데 어제는 YTN에서 오셨어요. 보건복지부와 한국재활협회가 생활 보조인을 위해 마련한 정부 예산 7백50억원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같이하자고 하더군요. 오케이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쓰일 수 있다면, 좋다. 방향만 올바르다면 찬성한다.”
‘EBS 지식 프라임’에서는 4분 동안 과학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이상묵 교수를 찾았다. ‘와, 내가 이젠 지구과학의 전도사까지 됐구나’ 생각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채플 강의 요청이 왔다. MBC는 장애인 학생들이 견학하는 날 ‘좋은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좋다고 했다. 같은 날 벌어진 네 가지 사건이다.
“신문, 방송 보도 이후 제 메시지가 전달이 돼서 각계각층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 어제, 참 기분 좋은 날이었어요. 저 물 한 모금만 주시겠어요?”
|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뇌를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연구도 계속할 수 있고, 강단에도 다시 섰으니까요(웃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상묵 교수의 휠체어는 머리를 기울이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입김으로 작동하는 마우스는 끝 부분을 빨면 왼쪽 클릭, 불면 오른쪽 클릭, 두 번 빨면 더블 클릭이다. 마이크에 영어로 문장을 말하면 컴퓨터에 전달된다. 목소리로 컴퓨터를 조작한다. 30분에 한 번씩은 휠체어를 뒤로 젖힌다. 욕창을 막기 위해서다. 엉덩이에 집중된 압력을 등으로 옮겨준다. 혈액을 순환시키고 산소를 공급한다.
“30분에 1분 정도는 누워야 합니다. 저는 마취제 없이도 수술할 수 있습니다. 몸에 감각이 없으니까요. 어느 순간 주사가 무섭지 않았어요. ‘마음대로 찌르세요, 안 되면 또 하셔도 됩니다’ 그러죠. 가장 무서운 곳이 치과예요. 목 위에 손을 대니까(웃음). 그거 아픈 것은 못 참겠는데,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습니다.”
장애인 모임에 나가도, 팔 다리를 다 못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발은 휠체어가 대신할 수 있지만 팔을 대신할 수 있는 도구는 거의 없다. 상황은 열악하다. 이상묵 교수가 쓰고 있는 보조기구들이 화제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컴퓨터로 글도 쓰고, 책장은 못 넘기지만 PDF 파일은 넘길 수 있습니다. 전화도 받을 수 있고, TV, 책도 볼 수 있죠. 인터넷 뱅킹, 쇼핑, 못 하는 게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과제 독촉하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죠(웃음).”
이상묵 교수가 ‘럭키하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의 재활 치료 시스템 덕을 봤기 때문이다. 미국의 재활은 물리치료와 작업치료 두 가지다. 물리치료는 몸의 기능을 재활하는 데 집중하고, 작업치료는 환자가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퇴원 후의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과정이다. 차는 어떻게 타고, 컴퓨터는 어떻게 쓰며, 계단은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환자의 심리 상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한국의 작업치료는 미비합니다. 환자에 대한 이해도 없고, 보조공학기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죠. 저는 7~8가지 보조기기 중 제 생활에 가장 적합한 모델을 골라서 쓰고 있습니다.”
이상묵 교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장애인 수는 생각보다 많지만 직업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재활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사회생활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국가의 지원도, 체계도 미비하다. 마음은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가정 간호사가 있습니다. 방광에 줄을 꽂아서 오줌을 받고 있거든요. ‘저 같은 장애인 많죠?’ 그랬더니 동네에 열 분 정도가 계신대요. 직업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전국에서도 제가 유일할 겁니다. 그분들도 머리는 안 다쳤어요. 적극성도 있죠. 컴퓨터만 사용할 수 있으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겁니다. 교육을 통한 사회 복귀는 얼마든지 가능해요.”
인식도, 정보도 없다. 이상묵 교수가 쓰고 있는 음성 인식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비스타를 팔 때 끼워 파는 제품이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짐을 지고 있어요. 이런 장치를 쓸 수 있다면,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훨씬 클 겁니다. 삶의 보람은 말할 것도 없죠.”
|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들은 아직 “가족들은 예전 모습으로 돌리기 위해 실오라기라도 잡으려고 해요. 나는 괜찮아도 자꾸 예전 모습이 떠오르나 봐요. 제가 다쳤을 때는 놀라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죠. 가족들은 이제부터 아픔이 시작돼요.”
언론은 이상묵 교수의 긍정적인 태도를 집중 보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됐다. 하지만 가족은 다르다. 이해는 하지만 ‘치료’를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도 좋다’는 태도가 대중에게는 귀감일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상처다.
“저는 한약 한 재 먹어본 적이 없어요. 가족들은 기치료도 해보자고 하고, 기도도 해줘요. 기도는 좋은데, 기도한다고 잘린 팔이 자라나는가. 지금도 가족들은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어요. 당연하죠. 저도 가족들의 아픔을 이제야 느껴요.”
사고 3일 후에 했던 수술 외에는 몸에 칼을 댄 적이 없다. 현대의학으로는 예전 모습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환자는, 치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장애인은 다르죠. 고정된 겁니다. 그 상태로 안정된 거죠. 그게 환자와 장애인의 차이입니다. 암에 걸린 사람들은 영지도 먹고, 기도도 할 수 있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아빠를 빨리 낫게 해주세요’ 아내와 아이들은 새벽마다 기도한다. 이상묵 교수의 마음은 이미 정리됐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기적의 확률은 억만 분의 일. ‘로또나 마찬가지’다. 바라는 바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가 목마를 때 물을 주는 겁니다. 뭐가 우선인지를 생각하는 거죠.” 부모님이 용한 한의사를 모시고 온 적도 있다. ‘너 때문에 모시고 왔으니까 제발 하자. 안 하면 인연 끝이다’ 부모의 마음은 절박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잡고 싶었다. ‘어차피 움직일 수 없으니 그냥 진료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이상묵 교수는 정색했다. “환자 동의 없이 하는 의료 행위는 의사법 위반인 거 아시죠?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의사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도 많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낫고 싶지 않다. 이대로도 좋다’고 말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고, 느끼고, 받아들인 것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제가 미국에서 다친 게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3개월 동안 혼자 누워 있으면서 정리를 했으니까요.”
|
“어떨 때는, 사랑이 환자의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도 들어요. 옳다고 믿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어요. 놓아줘야 한다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집사람에게 이런 얘기 하면 ‘잘났어, 당신 과학자야’ 그러겠죠(웃음).”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 계기가 있었다. 강렬했다. 다시, 2006년 7월 2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사고가 났죠. 사막 한가운데에서. 왜 내가 운전하던 차가 뒤집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40분 만에 헬기가 왔어요. 헬기를 타고 병원 옥상에 내렸죠. 기억이 없어요. 40분 동안 숨이 끊겨 있었어요.”
3일 뒤, 수술 후에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온 것은 그때다. 몸은 마비됐지만 머리는 살아서, 그동안은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의식이 없었던 3일 동안 여행을 한 기분이었어요. 저는 종교도 없고,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 3일 동안, 어떤 면에서는 참회하고, 즐거운 경험을 했어요. 저승사자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황천을 건넌 것도 아니었어요. 죽음이 몇 단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초입에 갔다 돌아온 느낌,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마르코 폴로 기행문’처럼 가족들에게 얘기를 했어요(웃음).”
기도에는 튜브가 꽂혀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묵 교수가 하는 말은 입 모양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느낀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가족들에게 얘기하려고 애썼지만 곧이들리지 않았다.
“가족이 미국에 왔는데,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전화하면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려요. ‘살아 있긴 한데, IQ가 아들 진석이(6)하고 똑같다’며, 제가 퇴행한 줄 알았던 거죠. 자꾸 이상한 말을 하려고 하니까 머리를 다친 줄 알았대요.”
이상묵 교수의 체험을 ‘사후 체험’이라는 말로 몰아갈 필요는 없다. 신비주의의 함정은 경계할 일이다. 의식이 없었던 때의 체험은 꿈같기도, 영화 같기도 했다. 컬러가 생생했다. 가끔은 외부의 소리, 현실 세계의 소리도 들렸다.
“제가 다친 줄 알고, 가족들하고 주변 사람들이 등장했어요. 여행을 했죠. 제가 누워 있던 메디컬센터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일련의 에피소드들, 그것은 나중에 영화하고 책이 될 것 같아요. ‘스타워즈’처럼 3부작으로. 그걸 다 보게 하려면 잘 써야겠죠(웃음)?”
3부작으로 이어지던 꿈에서,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죽음을 경험했다. 세 번 죽었다. 현실처럼 생생해서, 꿈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꿈이라는 말밖에 없으니까 꿈이라고 하는 거죠. 마치 차원이 다른 삶 같았어요’ 나머지 이야기는 아꼈다. ‘책에 써야 한다’며 웃었다.
“사고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어요. 두 번째 삶이죠. 자신감이 있어요. 잘못될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고. 하늘에서 나를 받지 않고 돌려보낼 때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 일종의 보증수표죠(웃음).”
사고는 불행했지만,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모든 것이 좋았다. 할 일도 많다. 연구도, 장애인을 위한 일도, 강의도 해야 한다. 마흔넷, 44년 동안 해볼 것은 다 해봤다. ‘골프도 쳐봤지만 타이거우즈는 못 되고’, 몸이 성했을 때 하고자 했던 것을 다 이룬 것은 아니다. ‘수영을 하다 안 되면 배드민턴을 치듯’ 삶을 바꿨고, 지난 2006년의 사고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제공/ 이상묵 교수 / ■사진 / 이주석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아이디어 레벨업 > 아이디어발상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를 바꾼 16가지 임상실험제니카페<cafe.naver.com/writergeni> (0) | 2008.04.28 |
---|---|
[IQ업! 두뇌 스트레칭]4월 19일제니카페<cafe.naver.com/writergeni> (0) | 2008.04.28 |
[내 인생의 드라마] 윤신혜 작가의 내 인생의 드라마 <사토라레>제니카페<cafe.naver.com/writergeni> (0) | 2008.04.28 |
[책꽂이]제니카페<cafe.naver.com/writergeni> (0) | 2008.04.28 |
(알짜교육정보) 아이비스터티 무료체험 이벤트제니카페<cafe.naver.com/writergeni> (0) | 2008.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