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으로 콩을 집고, 부서지지 않게 묵을 들어올리고, 심지어 눈곱만한 날치알까지 집어낼 수 있는 솜씨. 이거 우리나라 사람 말고 누가 가능할까요.
그런데 이 젓가락질은 어렸을 때 잘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손은 제2의 두뇌’라는 말처럼 어릴 때 젓가락질을 많이 해야 두뇌도 발달하고 감성도 좋아진다고 하는데요. 아이들이 젓가락질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에디슨 젓가락을 발명해서 대박을 터뜨린 (주)아이엔피 박병운 대표.
박 대표는 젓가락질을 잘 못해 포크를 쓰는 조카를 보고 안타까워 하다가 에디슨 젓가락을 발명했는데요. 처음엔 가위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부모들의 폭발적인 반응에베스트셀러 상품이 됐고, 해외로 수출까지 하게 됐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젓가락이라는 아날로그 제품의 승리. 이런 역발상의 성공을 거둔 에디슨 젓가락 박병운 대표를 1월 2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어릴 때 배우는 젓가락질…일찍 고치지 못하면 어렵죠
▶ 어릴 때 젓가락질을 못해서 부모님께 혼난 분들도 많을 텐데요. 박병운 사장님은 어릴 때 젓가락질을 잘 하셨나요?
저도 어렸을 때는 젓가락질을 못해서 혼도 많이 나고, 저희 어릴 때는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해서 어른들 앞에서 젓가락질을 못하면 야단을 많이 맞았죠. 그리고 특히 쇠젓가락이기 때문에 잘 집어지지 않고 힘들고 했었는데요. 그 때는 포크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집어 보려고 연습도 하고 부모님도 가르쳐 주셔서 어렵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 제 앞에 다양한 젓가락이 있는데요. ‘에디슨 젓가락’은 어떤 젓가락입니까?
저희가 2002년도에 이 상품을 내놨는데요.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포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가 조사하기로는 3세에서 6세 사이의 아이들 중 70~80%가 자연스럽게 포크를 사용하고 있었고, 부모들도 젓가락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낮았습니다.
찍기 쉽고 먹기 쉬우니까 부모님들도 어린이용 포크를 자연스럽게 주는 문화였는데, 저희가 그것을 보면서 어린이들이 젓가락질을 쉽게 바로 배울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까 고안을 했어요. 아이들은 양쪽 젓가락이 분리되어 있으면 집어지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양쪽 젓가락이 연결된 구조가 있고, 엄지, 검지, 중지 세 개의 손가락을 고리에 끼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쉽게 배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 발명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저희 조카가 그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요. 그 당시 저희 형님과 식사를 하다가 우연찮게 보니까 아이가 젓가락질을 하는데 잘 못하는 거예요. 젓가락질은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이 모아지도록 하는 삼지법인데, 모아지면서 약지를 받쳐야 하는데, 이것을 말로 설명해도 안 되고, 아이들에게 위치를 익히게 하는 것이 하루 아침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쇠젓가락에다가 철사를 엮어서 두 젓가락이 안 움직이도록 하고 세 개의 고리도 만든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자세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우연치 않게 생활 속에서 정말 발명이 시작된 거죠.
▶ 부모님들은 편하기 위해서 포크를 쓰게 하는데, 포크질은 젓가락질에 비해 손가락 움직임이 절반도 안 된다면서요?
네. 젓가락을 사용하면 30여개의 관절과 50여개의 근육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손운동이 되는데요. 특히 손을 많이 움직이게 되면 뇌에서 관장하고 있는 영역이 손의 30% 가까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크로 사용할 때의 움직임보다 거의 두 배 더 많은 결과가 계속 보도되었거든요. 그만큼 아이들에게 삼시 세 끼 밥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시켜줄 수 있는 것은 젓가락질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시기가 3~6세 사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 부모님들 경우에는 아이가 때가 되면 젓가락질을 자연히 배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놔두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
저희가 사업 시작하기 전에는 3~6세 아이들이 포크를 많이 썼었죠. 그런데 젓가락질은 부모님의 교육이 별도로 필요하거든요. 사실 어려운 것이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손가락 움직임이 거의 그대로 가거든요. 그래서 어른들 중에도 젓가락질 잘 못하는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그래서 특히 3~6세 때 별도의 교육을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밥 먹을 때 아이들에게 별도로 콩 집기 놀이라든가, 유치원에서는 지금 7세반 정도면 젓가락 교육을 하고 있고, 초등학교 1학년 도덕과목에서 젓가락 사용법을 배우고 있어요. 저희는 보다 빨리 배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고, 그 젓가락을 통해서 아이들이 친숙해 지는 것이죠.
이것으로 아이들이 젓가락질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 젓가락을 통해서 아이들이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이들이 젓가락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친숙해지고 배우면서, 어머니들이 저희 젓가락을 통해서 별도의 교육을 시켜 주어야 합니다.
▶ 우리나라와 같은 젓가락 문화권이 그리 많지 않나요?
아시아에서 젓가락을 사용하는 나라가 15개국 정도 돼요. 나머지는 포크를 쓰거나 손을 사용하죠.
▶ 우리나라가 젓가락을 쓴 것은 오래되었죠?
사실은 중국이 처음인데요. 3천 년 전에 중국에서 젓가락을 썼었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벼농사가 전해진 이후라고 해서 1800년 전이고,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약 4백년 정도 늦어져서 1400년 전에 전래되었죠. 그리고 유럽에서 포크를 쓴 것도 사실 얼마 안 됩니다. 14세기경부터였죠. 그 전에는 서양 사람들도 손으로 먹었어요.
▶ 그러면 조카에게서 아이디어를 얻고 상품화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요?
제가 이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것은 2001년도인데, 많이 고민하고 제품개발 할 때까지 1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만 가지고 사업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더라고요. 아이들 제품이다 보니까 연구, 조사도 해야 하고 말이죠. 그렇게 뛰어다니고 알아보고 실험하고 제품화 하는데 1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 처음에는 매출 저조했지만,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베스트셀러 상품으로 급부상
▶ 아이들 제품이다 보니 안전성이나 무해성이 중요할 텐데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조사도 많이 하셨던 거죠?
저희가 당시에 어린이들에게 젓가락을 손가락으로 잡게끔 하려고 하니까, 저희 젓가락은 엄지, 검지, 중지 세 개의 고리가 달려있기 때문에 이 고리에 맞게끔 아이들의 손가락 위치를 잡아주어야 하니까, 이 세 손가락의 간격에 대한 데이터도 없고, 3~7세 아이들에게 맞는 보편적인 손가락 굵기나 넓이나 길이가 없으니까 어린이집에 직접 찾아가서 아이들에게 실험을 하면서 손가락 모형을 떠서 굵기도 연구하고 재고해서 적당한 사이즈로 맞춰서 아이들이 바로 집을 수 있게끔 만들었죠.
▶ 그렇게 자주 찾아가시면 어린이집 원장님이 좋게만 보셨겠어요?
원장님께 사전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점심시간에 어차피 점심을 먹으니까 그 시간에 저희가 실험을 하고 도움도 받고 했던 것이죠.
▶ 그런 과정에서 황당한 일은 없으셨나요?
처음에는 저희가 길거리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이리 와봐라.”해서 젓가락을 잡아보게끔 하니까 부모님들이 지나가다가 보고, 아이들을 유괴하려는 것으로 오인한 경우도 있었죠.(웃음)
▶ 아이들에게 실험을 해보니까 어떤 반응이었나요?
사실 아이들이 쓰면서 상당히 재미있어 했어요. 집에서 엄마, 아빠가 젓가락을 쓰고 있는데, 자기는 포크를 쓰고 있고, 젓가락으로 해보려고 해도 못 집으니까 힘들고 짜증도 났었는데, 이걸로 하니까 잘 집어지고 재미있는 거예요. 아이들도 ‘젓가락질이 재미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 저희가 실험하는 동안에도 그 젓가락을 자기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죠. 실험용으로 만든 것인데도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오니까 좀 확신이 들더라고요. 아이들이 좋아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 이 에디슨 젓가락이 언뜻 보면 모양이 ‘가위’ 같은데요. 가위로 오인한 분들도 계셨다면서요?
저희 젓가락이 두 개가 붙어있고, 세 개의 고리가 달려 있어서 사실 제품이 포장되어서 놓여져 있으면 젓가락이 아닌 것처럼 보이죠. 이런 젓가락은 지금까지 없었거든요. 저희가 세계 최초로 발명하게 된 거죠. 저희가 매장에 제품을 출시해서 진열을 했는데, 초기에는 매출이 잘 안 나왔어요. 그 원인을 분석해보니까 이 상품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확인이 안 되고 알려지지 않으니까, 저희가 이것을 어떻게 알려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 것이죠.
▶ 그럼 어떻게 알리셨나요?
저희가 출발 당시에는 진열만 잘 해놓으면 어디든지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제품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소비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에 저희는 초기 자본금도 적고, 그렇다고 조그만 기업에서 대대적으로 광고할 형편도 안 되고, 그래서 보여지면서 알릴 수 있는 공간이 어딘가 했더니 당시에는 인터넷 쇼핑몰이 상당히 활성화되고 붐을 이루었어요.
그래서 제가 인터넷 쇼핑몰 유아용품 쪽에 저희 제품을 올렸습니다. 제품 내용을 상세하고 꼼꼼하게 설명도 읽고 구매하는 패턴이니까 ‘아, 저런 상품이었구나.’하고 자연스럽게 알려지고, 또 써 본 분들이 사용후기도 올리고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었죠. 그래서 인터넷에서 유아용품 베스트셀러 제품이 되었었죠.
▶ 처음에 얼마 정도를 가지고 출발하셨나요?
사실 저도 초기에 자본금이 많지 않았어요. 그 때 제가 장사를 해서 모은 돈이 1천5백만원 정도 있었고요. 각 지역마다 있는 소상공인 지원센터에서 상담을 통해 저희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창업자금으로 5천만원을 받았죠. 그 창업자금이 모태가 되어서 상품 개발하고 만들어내게 되었죠.
▶ 어떻게 보면 1억도 안 들이고 시작을 하신 거네요?
개발 전에 이미 몇 천만원 소진이 되었죠. 조금씩 오백만원, 천만원 들어가면서 많이 까먹었고, 마지막으로 개발에 들어가면서 목돈이 들어갔던 거죠.
▶ 까먹은 돈은 얼마정도 되었나요?
까먹은 돈도 한 1억원 정도 될 겁니다.
▶ 그럼 온라인에서 성공을 거둔 원인은 뭐였나요?
요즘은 ‘프로슈머’라고 해서, 소비자들이 그 상품을 구매하고 사용해서 그 후기를 올리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죠.
▶ 그만큼 제품이 좋았기 때문에 구매하신 분들이 만족한 것이겠죠?
부모님들은 신기해하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거죠. 3살짜리 아이가 포크만 쓰다가 젓가락질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죠. 아이들이 편식을 많이 하게 되는데, 젓가락질이 재미있으니까 이것도 집고, 저것도 집고 하니까 음식을 맛있게 먹게 되었다는 후기도 올라오고 했죠.
◇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학 졸업 후 오퍼상, 속옷 도매상을 하며 사업 시작
▶ 박 대표님, 고향은 어디세요?
저는 서울 마포입니다.
▶ 부모님들은 어떤 분이셨나요?
저희 부모님은 아들 5형제를 키우셨어요. 제가 5형제 중에 막내인데, 사실 어머님, 아버님도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어렵게 저희를 키우셨어요. 저희 아버님이 야채장사를 하시고, 어머님도 맞벌이를 하시면서 아들 다섯을 어렵게 키우셨죠. 지금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아버님만 살아계셔서 큰 형님이 모시고 계세요.
▶ 전공은 독문학을 하셨던데요. 학교 다닐 때는 어떠셨나요?
저는 성격 자체가 상당히 내성적이었어요. 거의 반에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고 의기소침해 있었고, 형편 자체가 그렇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 다녔기 때문에 제 스스로 많이 위축되어 있었고,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했죠. 공부도 잘하는 편은 아니고 적당히 쫓아가면서 했는데, 대학교 가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좀 바뀌었죠.
▶ 원래 희망하던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계속 공부를 해서 대학교수나 학문을 계속 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형편도 여의치 않고 대학 졸업한 뒤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제 자신이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죠.
▶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다른 친구들보다 많았던 건가요?
가난이라는 것이 잠재되어 있었죠. 어릴 때부터 좋은 형편이 아니고 학비도 제때 못 내서 꼴찌로 냈던 기억들이 있지만, 그것이 당시에는 제가 위축되고 소극적이었지만, 현재 살아가면서는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어려운 과정들이 밑바탕 되면서 생활습관면에서는 조그만 것이라도 아끼게 되고, 사업을 하면서도 조그만 것 하나도 꼼꼼히 챙기게 되는 점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서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셨나요?
저희 형님들도 중고등학교 다니면서도 다 신문배달도 하시고 스스로 알아서 다 크는 집안이라, 스스로 환경을 극복하고 헤쳐 나가고 했었죠. 그래서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과 좌절이 있어도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는 오뚝이 정신이 가난 속에서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그럼 졸업 후에 바로 사업을 시작하신 건가요?
군대를 대학 졸업하고 좀 늦게 갔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에 무엇을 할까 고민을 했는데, 처음에 오퍼상을 해볼까 해서 아이디어도 찾고 아이템도 찾고 여러 가지로 알아봤죠.
▶ 속옷 도매상도 하셨다고요?
오퍼상을 하다가 제가 IMF때 망했죠. 오퍼상을 한 3년 가까이 하다가 거의 쫄닥 망하고 속옷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때 형님들이 하고 계셔서 같이 배우면서 거들고 도와주고 했었죠.
▶ 직접 손님을 상대로 속옷을 판매하신 건가요?
그렇죠. ‘떴다방’, ‘특판’이라고 해서 지역을 옮겨 가면서 파는 행사들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새벽에 물건을 해가지고 와서 여기저기 빈 매장을 다니면서 판매를 했죠. 그 때 IMF 때는 그런 빈 매장들이 많았어요. 빠지지도 못하고 내놔도 안 나가는 점포들이 많으니까 임시로 며칠만 쓰고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해서 그런 매장들을 골라서 임시로 행사를 한 거죠.
▶ 그 때는 형편이 어땠나요?
그 때도 차비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장사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하면서 살았죠. 옛날에 차비가 없을 때는 버스 토큰 파는 곳에 가보면 가게 바닥 밑을 들여다봤어요. 거기 보면 떨어지다가 굴러서 바닥 밑에 들어가 있는 토큰들이 있어요. 그런 것을 어떻게 주워서 다닌 경험도 있었죠.
▶ 그렇게 어려웠기 때문에 젓가락 사업의 성공이 정말 남달랐겠어요. 특히 부인의 고생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사실 장사할 때는 와이프도 많이 힘들었죠. 제가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니까 얼굴 보기가 힘들었었고, 사업을 하면서는 걱정을 많이 하게 되었죠. 장사를 다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으로 사업도 모르는 사람이 뛰어들어서 계속 까먹으니까 옆에서 걱정을 상당히 많이 했죠. 어쨌든 과정 속에서 그래도 잘 돼서 이제는 좀 많이 편해졌죠.
▶ 아직도 손으로 식사를 하는 인구가 세계의 40%라고 하던데요. 이 젓가락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도 생각하시는 거죠?
네. 지금 저희가 세계 13개국에 수출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가장 큰 시장이 아시아문화권에서는 일본, 중국, 대만 시장이 가장 커요. 그래서 일본은 지금 4년째 꾸준히 수출을 해서 상당히 많은 양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 포크 문화권인 유럽이나 미주쪽은 시장 개척을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도 지금 젓가락을 많이 가져가고 있어요.
왜냐하면 일본의 스시문화가 정착되면서 스시전문점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차이니즈 레스토랑도 많이 보급되었고요. 북미나 유럽에서도 이런 동양의 음식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동양의 음식문화를 접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젓가락이거든요. 그런 식당에 가면 “포크로 드릴까요, 젓가락으로 드릴까요?” 하는데, 거의 대부분 젓가락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추세라고 합니다. 점차 젓가락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고, 동양 음식점은 고급 문화, 고급 음식점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혀 있어요.
그래서 저희도 어떻게 젓가락을 확신시킬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서양 사람들을 위한 젓가락이라고 해서 ‘이지 찹스틱(easy-chopstick)’ 이라고 해서 쉽게 배울 수 있게 나오는 것이 있는데 핀셋류가 많아요. 젓가락과 젓가락을 고무줄로 묶어서 집게식으로 집어먹는 젓가락은 꽤 있어요. 젓가락질을 배우는 것이 어렵고 하루 아침에 안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젓가락은 음식을 집어 먹는 것은 잘 하는 것 같이 흉내를 내는 것이지만, 정통적인 동양 사람들의 삼지법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저희 젓가락을 통해 배우게끔 하는 것이죠. 그 사람들은 젓가락질을 정말 배우고 싶어해요.
◇ 왼손잡이용, 의료용 젓가락 등 다양한 상품 개발
▶ 일본 황실에서 ‘동구이궁 발명상’을 수상하셨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동구이궁상’은 일본 황실에서 주는 발명상인데요. ‘동구이궁’은 메이지 시대 후기에 태어난 아홉 번째 왕자의 이름인데, 이 왕자가 일찍 죽었어요. 죽으면서 남긴 말이 “발명은 상하 귀천이 없다, 그래서 모든 발명은 다 귀하고, 작은 발명은 더욱 소중하다.”라고 해서 죽으면서 자기의 재산으로 기념 발명상을 만들었는데, 저희 아이디어가 굉장히 독특하다고 해서 2005년도에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 의료용 젓가락도 만드셨죠?
네. 뇌졸중을 앓고 계시는 분들은 손의 마비가 따라옵니다. 손을 움직이는 데 젓가락만큼 좋은 것이 없는데, 일반적인 젓가락은 손의 마비 때문에 쓸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재활치료용으로 의사선생님들이 저희 젓가락으로 손의 근육운동을 시켜주는 거죠.
▶ 요즘 왼손잡이 분들도 많은데요. 왼손잡이 젓가락이 있는 것도 반갑네요.
저희가 출시할 때는 왼손잡이 용품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리고 서양에서만 왼손잡이에 대한 배려가 상당히 많고, 왼손잡이 인구도 약 30% 정도 돼요.
▶ 천재 중에 왼손잡이가 많던데요.
네. 아인슈타인도 왼손잡이고, 서양 문화에서는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이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밥 먹을 때도 글씨를 쓸 때도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는 편견들이 있었죠. 그런데 요즘 부모님들은 그런 편견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도 왼손잡이들이 많이 늘어나서 약 20% 정도 된다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희가 오른손잡이용을 만드니까 부모님들이 왼손잡이용도 만들어달라고 많이 하셔서 저희가 개발하게 되었죠. 그래서 지금 왼손잡이 부모님들이 상당히 좋아하십니다.
▶ 매출비율로 따지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지금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오른손잡이인 경우에도 부모님들이 왼손잡이용을 사가지고 가셔서 양 손을 함께 쓰게 하려는 분들도 계세요. 왼손을 쓰면 우뇌가 발달한다고 하잖아요.
▶ ‘콜롬버스와 같은 창의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을 모토로 하고 계신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저도 우연찮게 생활 속에서 발명을 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예쁨을 받는 상품이 되었는데요. 발명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많은데, 돈 많은 대기업에서 혼자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전 세계 수많은 아이디어 상품을 누가 다 혼자 발명하겠습니까? 못하는 거죠. 또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발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저희가 볼 때는 찾지 않고 구하지 않으니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생각을 접으니까 안 보이는 것이지, 저도 발명에 대한 관심이 없다가 무엇을 개발할 것인가 고민을 하게 되니까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 같더라고요.
▶ 성장하고 있는 기업 중에는 대기업에서도 그 시장에 뛰어들어서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요.
영역이 좀 다른 것 같아요. 대기업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의 아이템과 중소기업에서 할 수 있는 아이템은 나뉘어져 있다고 저희는 보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저희 같은 작은 기업에서 끊임없이 R&D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 맞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분석이나 아이템을 잘 연구해야 하거든요.
저희가 무모하게 거기에 돈을 쏟아 부을 수도 없는 것이고, 또 실패했을 경우에 하루아침에 망할 수 있는 것이 중소기업이거든요. 그래서 사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 저희 중소기업인데, 그 영역내에서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제품은 계속 개선시키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사실은 그 점이 항상 고민이예요.
▶ 어린이용 이유식 숟가락이나, 퍼즐 스티커등 어린이들을 위한 제품들을 만드시니까, 일종의 사명감도 갖고 계시겠어요.
제가 발명하면서 느끼고 배운 것이 많은데,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날로그는 무엇인가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숟가락, 젓가락은 몇백년, 몇천년이 지나도 쓰고 있는 것이죠. 칫솔도 그렇고요. 그래서 저희가 아이들의 생활습관과 밀접하게 관련되면서도 꼭 필요한 교육적인 상품들 중에 생활습관을 쉽게 제대로 바꿀 수 있는 아날로그적인 아이디어 상품들을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 지금까지의 성공의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지금까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큰 그릇은 늦게 크게 커진다는 것인데요. 그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대박을 쫓고 한 번에 크게 될 것이라고 저도 여러번 시도하다가 실패를 했었는데, ‘대박’이라는 것은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고 조그만 ‘소박’, ‘중박’들이 쌓여서 커지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대박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작지만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을 자기 스스로 계속 연구하고 개발하고 준비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인정받고,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런 자기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새해에 밝았는데도 불투명한 미래로 자신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박 대표님은 어떤 이야기로 힘을 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앞이 안 보이고, 아이디어 상품을 약 1년 가까이 준비를 하면서 거의 새벽에 불현듯 잠이 깨고 잠 못 자고, ‘이 아이디어가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될까?’하면서 끊임없이 회의도 들고 잠을 못 이룬 기억이 숱하게 있었는데요. 사실 어떤 일을 하시든지 그렇게 고민하신 분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가장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자신감인 것 같아요. 할 수 있다, 한 번 해보자 하는 것인데, 그래도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고 무대포로 의욕적으로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조그마한 돌다리도 자꾸 두들겨 보고 확인해보더라도 잘 점검하면서 만들어보자고 자기 자신에게 힘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 해외수출 전략은 어떤 건가요?
저희가 올해 2월달에 독일 ‘뉘렌베르그 완구 박람회’에 저희가 참가합니다. 그 곳은 포크 문화권이기 때문에 단순히 젓가락만으로 참가해서는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젓가락을 이용한 교육용 교구, 젓가락을 통해서 장난감 완구처럼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저희가 현재 ‘에디슨 젓가락’과 교육할 수 있는 완구, 교구를 준비했어요. 그래서 계속 해외시장에 다양한 아이템을 통해서 젓가락 문화에 친숙해지도록 개발해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 독일어과 출신이라서, 독일로의 진출을 더 잘 하실 것 같아요.
(웃음)거의 다 잊어버렸는데요. 어떻게든 또 열심히 한 번 해봐야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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