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이건희(66) 삼성 회장 일가의 비리 의혹을 수사한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불법적 경영권 승계 과정에 이 회장이 깊숙이 개입하고, 4조5천억원의 차명자산을 보유하면서 세금 1128억원을 포탈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특검팀은 이 회장을 비롯한 전·현직 임원들의 조직적 범죄를 적발하고도 모두 불구속 기소하고, 수사가 미진함을 인정한 비자금 부분도 검찰에 넘기지 않고 수사를 끝내 ‘면죄부 수사’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조 특검은 17일 서울 한남동 사무실에서 99일 동안 벌인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 회장과 이학수(62) 전략기획실 실장(부회장), 김인주(50) 전략기획실 차장(사장) 등 10명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했다.(표) 그는 불법 비자금 조성과 불법 로비 의혹, 삼성전자 성과급의 횡령자금 의혹 등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모두 내사 종결이나 무혐의 처분했다.

이 회장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발행과 99년 삼성에스디에스(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발행 과정에서 계획을 보고받고 구체적으로 인수자까지 지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또 삼성생명 주식 등을 대량 차명으로 보유하면서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고(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 주식 보유 보고 의무를 위반한 혐의(증권거래법 위반) 등 세 가지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다.

특검팀은 “오늘 공소제기하는 범죄사실은 배임행위로 인한 이득액이나 포탈한 세액이 모두 천문학적인 거액으로, 법정형이 무거운 중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주요 피의자들을 구속기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조 특검은 “핵심 임원들을 구속하면 기업 경영에 엄청난 공백과 차질을 빚어, 경쟁이 극심한 글로벌 경제 상황에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파장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며 ‘국익론’을 꺼냈다. 또 “지배구조를 유지·관리하는 과정에 장기간 내재돼 있던 불법행위를 현시점에서 엄격한 법의 잣대로 재단해 처단하는 것으로, 개인적 탐욕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배임·포탈 범죄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특검,이회장 불구속기소 발표







이에 대해 참여연대·민변·경제개혁연대는 공동성명을 내어 “이 회장에 훨씬 못미치는 조세포탈액으로도 재벌 총수들이 구속된 전례로 볼 때, 특검은 대단히 온정인 태도를 보였다”며 “‘재벌 봐주기’를 넘어선 ‘삼성 봐주기’의 증거”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 등은 “재고발, 항고 등 가능한 모든 법적 후속 조처를 하겠다”고 말했다.

특검이 “차명계좌에 입금된 자금의 원천에 대해 계좌추적으로 이를 명확히 밝히지 못한 점은 있다”며 수사 미진을 인정하면서도 이 부분을 검찰에 사건을 넘기지 않기로 한 것에도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는 “로비 의혹이나 비자금 조성 등을 검찰에 넘기지 않고 자기들이 종결하고 무혐의 처리했다”며 “사실상 일사부재리가 적용되므로 문자 그대로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는 “특검 수사는 삼성이 거듭나고 나라가 거듭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본질적인 수사는 못하고 조그마한 비리를 갖고 기소를 한 것으로 됐다”며 “비리는 계속되고 황제경영 재벌체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 99일 특검수사 결국 ‘삼성 재벌에 면죄부’

▶ [에버랜드CB] 이회장 지시로 구조본 참모들 ‘불법승계’ 실행

▶ [에스디에스BW] 재용씨 헐값에 받아 1539억 부당이득

▶ [미술품 구입] ‘차명계좌 돈 사용’ 확인불구 “문제 안돼”

▶ 피의자 독대 등 ‘이상한 특검’…결국 ‘용두사미’

▶ ‘특검 SDS 기소’에 낯뜨거워진 검찰

▶ 조준웅 특검 “이회장이 에버랜드 사채 묵시적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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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일 순방길에 나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지 두 달이 됐다. 베일에 가려있던 그의 실체도 많이 드러났다. 21세기에는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 국가 운명이 좌우된다. 이 대통령은 그동안 국민들에게 어떤 리더십을 보여줬을까?

대통령은 당선 직후 전경련을 방문해 대기업 총수들에게 “애로사항이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고 말했다. 기업인 102명과 언제든 통화할 수 있는 핫라인, 이른바 ‘MB폰’도 개통했다. 부처 산하 위원회는 없애면서도 대통령 직속 위원회는 계속 만들고 있다. 부총리제는 아예 없애버렸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이명박 리더십의 열쇳말은 ‘중앙집권’이다. 모든 것을 대통령이 총괄하고, 결정한다.

대통령이 왜 이런 리더십을 보여주는지는 그가 걸어온 길이 잘 말해준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로 의존성’이다. 1941년생인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이 된 것은 77년이다. 만 36살이 채 안됐을 때다. 그리고 91년 현대건설 회장을 끝으로 현대를 떠났다. 현대에서의 26년이 ‘경제대통령’이라는 큰 정치자산을 만들어줬듯이, 이명박의 틀도 결정됐다. 그가 사장을 지낸 7개 현대 계열사는 대부분 건설 관련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객수가 아주 적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아파트를 많이 짓지만, 당시는 관급 토목공사나 대기업 확장공사가 대부분이었다. 사업 결정권을 소수 최고위층이 쥐고 있다. 이명박의 역할은 이들과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다. 그의 중앙집권적 리더십은 그 산물이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청와대 여직원들에게 청바지 금지령이 내리고, 관가에는 조기출근 열풍이 분다. 많은 미국 기업들은 1990년대 자율복장제를 도입했다. 성공한 기업들의 일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짧게 일하면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세상은 바뀌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생각은 정주영 회장을 따라다니던 1970∼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 멈춰 있다. 모든 것을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당연히 권한위임이 적다. 이런 리더 밑에는 2인자가 없다. 총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정주영식 경영’의 판박이다.

이 대통령에게는 일관된 국정철학과 원칙이 보이지 않는다. 친시장이라는 정부가 생필품값 특별관리에 들어가자 많은 기업인이 당혹해한다. 대통령의 지시로 인천공항에는 기업인 전용 귀빈실이 생겼다. 공직자 귀빈실이라는 기존 특권은 깨졌지만, 기업인 귀빈실이라는 새 특권이 만들어졌다. 청와대 핫라인에도 대통령 지시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오만과 독선이 묻어난다. 대통령은 이념 대신 실용을 표방했다. 실용주의는 결과 지상주의다. 과정보다 실적을 중시하는 게 기업이다.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결과가 나쁘면 변명이 안 된다. 반대로 과정은 엉망이어도, 결과만 좋으면 ‘굿’이다. 실용주의 만능에서 일관된 국정철학과 원칙은 설자리가 없다. 대통령과 기업체 사장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정치는 돈의 힘만으로 안된다. 오히려 명분과 가치가 중요할 때가 많다. 능률과 함께 형평도 중요하다.

경제학자들은 히틀러를 ‘인플레의 의붓자식’이라 부른다. 1차대전 패배 뒤 살인적 인플레로 고통받던 독일 중산층은 선거를 통해 히틀러를 권좌에 앉혔다. 그 종말은 파시즘이었다. 한국 중산층은 이명박을 선택했다. 노무현만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이명박이 ‘노무현 혐오증의 의붓자식’으로 역사에 기록된다면 비극이다.

곽정수/대기업 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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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

1983년 미국 CIA국장이 비공개 미국 의회에서 발언한 내용은 놀랍다.

"조만간 소련이 몰락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여러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소련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바탕으로 전략적인 외교를 펼쳤다.

한편으로는 군축협상을 개최하고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갖는 등 대(對)소련 유화정책을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방비 지출을 증가시키면서 소련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최근 북한은 여러 경로를 통해 남한정부를 압박하려 하고 있다.

새 정부 초기,불필요한 말로 북한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 이후의 한국 정부 대응은 무난했다.

그러나 새 정부의 향후 5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는 너무 많다.

앞으로의 대북전략과 관련해 한국 정부는 다음 사항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첫째,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단기,중기,장기 계획을 마련하고 이 계획이 체계적으로 맞물리도록 전략을 짜야 한다.

단기 정책은 평화유지이며,중기와 장기 정책은 각각 북한 체제 이행과 통일한국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나가는 조건을 충족하면 대북 지원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키겠다는 '비핵개방3000' 정책은 단기와 장기적 관점이 결여된 전략이다.

물론 적당한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단기적으로 좋은 정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남북관계의 경색,혹은 북한의 도발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 우리의 대응을 미리 구상해 둬야 이에 의거해 일관성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둘째,북한의 체제변화에 관해서 우리는 현명한 조력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

체제이행국들의 경험을 보면 자본스톡이 성장에 미치는 효과는 30% 이내이며 더 중요한 것은 체제이행 의지,제도의 변화,경제정책 등이다.

즉 인프라를 깔아주고 공장을 건설하는 등의 대북지원이 성장에 미치는 효과는 기대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제를 이행시키고 제도를 바꾸며 경제정책을 펴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비핵개방3000' 정책은 중기 로드맵의 일부만 담은 부분적인 대북정책이다.

조력자로서 북한의 체제이행을 도울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이고 상세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셋째,대북정책에는 이중장부가 필요하다.

즉 비공개의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참여정부의 실수는 우리가 정말 믿고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대북정책이라고 언급하고 정책화시킨 것이다.

북한이 개혁과 개방이란 용어를 싫어한다고 하여 비공개의 대북전략마저 마련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에 가까운 것이다.

넷째,북한 요인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북한과 관련된 사건들이 한국의 주식시장 등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면,북한이 문제를 일으켜 주가가 크게 하락한 것은 핵실험의 경우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것도 2~3%의 하락에 그쳤고 얼마 있지 않아 주식시장은 다시 반등했다.

즉 국민들과 외국인들의 학습효과로 말미암아 북한이 한국경제에 타격을 입힐 확률은 크게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주의를 다룰 때에는 실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정부의 대북 정책은 학습없는 확신,실력없는 믿음에 연유했다.

햇볕정책을 만병통치약처럼 과대 광고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대북전략,즉 단기 중기와 장기가 정합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은 제대로 된 연구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1983년 CIA의 진단처럼 북한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이뤄져야 효과적인 정책도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가장 기초적인 통계라 할 수 있는 북한의 1인당 GDP에 대해서도 신뢰성있는 추정치를 내놓지 못하는 정부로부터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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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이학렬 기자][(종합)]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걷은 세금 중 남은 금액(세계잉여금) 4조9000억원을 경기부양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재정부는 17일 세계잉여금 15조3428억원 중 5조4133억원은 지방교부세·교부금 정산으로 즉시 집행하고 나머지는 올해 중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머지 금액 중 2조9788억원은 공적자금 상환에, 2조852억원은 국가채무 상환에 사용될 예정이다.

 이같은 내용이 담긴 '2007년도 일반회계 세입세출결산상 세계잉여금 처리안'은 이날 차관회의를 통과했으며 오는 22일 국무회의에 상정된다. 재정부는 남은 4조8555억원을 추경 편성을 통한 내수 진작에 사용하기로 하고 국가재정법 개정까지 추진할 방침이다.

 추경을 통한 즉각적인 재정지출은 경기를 부양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보도블록 교체 등에 재정지출을 사용한다면 낭비가 되겠지만 사회간접자본, 교육, 연구개발(R&D) 등에 재정을 지출하면 경기에 도움이 된다.

이영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5조원으로 예상되는 (추경) 규모가 적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용내역에 따라 (경기 부양) 효과는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추경을 통한 재정지출이 필요할 만큼 현재 상황이 절박한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다. 물가상승률이 4%에 육박하고 경기선행지수, 재고, 생산 등 경제지표들이 악화되고 있으나 수출은 여전히 호조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홍기택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국가재정법 취지는 추경을 중대한 일로 한정해 놓은 것"이라며 "경기 대응책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여유가 있다면 (세계잉여금을) 추경보다는 감세 재원으로 활용해 민간 부문의 활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광두 서강대 교수(경제학)는 "정부가 7% 성장을 공약으로 다급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급할수록 길게 보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추경 편성이 정부 생각대로 될지도 의문이다.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도 "국회로서는 추경보다는 감세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추경 편성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18일 열리는 당정청 협의회에서 조율돼야 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이명박 대통령의 판단에 달려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추경 편성 및 국가재정법 개정 문제는 미국 순방에서 돌아오는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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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렬기자 toot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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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다 돼 가는데, 스스로의 철학, 방향 제시는 보이지 않고 ‘참여정부’의 흔적을 지우는 데만 열심이다. 과연 앞선 정부가 해온 많은 일을 무산시키고, 거꾸로 가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철학이란 말인가. 좋은 답안은 스스로의 생각을 적어야지 지우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 과거 지우기 골몰하는 李정권 -

지우개 정부의 조짐은 도처에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위원회를 대거 없애버렸다. 사실 위원회는 큰 예산 들이지 않고 각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중요한 개혁과제를 수행하는 수단인데, 이를 해산해버린 것은 자충수다. 또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에서 유행하던 ‘로드맵’이란 말을 쓰기 싫어하고 “현장에 가봤어?”식의 현장주의, 실적주의 경향을 보인다. 전봇대 뽑기가 그 상징이다. 그러나 정부가 일을 하려면 철학이나 계획서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큰 그림 없이 현장주의에 매몰되다 보면 부지런하게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결국은 낭패보기 십상이다.

살기 어렵다는 국민의 아우성 속에서도 참여정부가 참고 견디며 거품 일으키는 인위적 경기부양을 하지 않고 경제의 기초체력 보강에 주력해왔는데, 이명박 정부는 한두 달을 못 참고, 벌써 인위적 경기부양을 하겠다고 나선다. 과거 정부는 재벌의 폐단을 완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출자총액제한제, 금산분리 정책을 고수해왔는데, 이것도 허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첫 조각부터 1% 특권층의 정부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재벌왕국 건설에 나서고 있다.

교육의 3불정책은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엄청난 부작용을 우려하여 역대 정부가 간신히 지켜왔는데, 이명박 정부는 자율이란 미명하에 대교협에 대학을 맡기고, 0교시 수업, 심야수업, 우열반 편성도 허용하겠다고 한다. 정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각자 자율에 맡겼을 때 이기적 행동으로 무질서, 부조리가 발생하니 그것을 막기 위해서 정부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앞으로 공교육이 후퇴하고 사교육비가 폭등하게 생겼다.

최근에는 혁신도시를 무너뜨리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데, 불과 몇 달 전 첫 삽을 뜬 국책사업을 이렇게 허물어도 되는 것인가. 참여정부는 극단적인 수도권 편중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 고사 직전의 지방을 살려보려고 발버둥쳤는데,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균형발전과 거꾸로 간다. 불과 한두 해 전에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현 정부가 부정한다면 국민이 어찌 정부 말을 믿겠는가. 정부의 공신력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

- ‘거꾸로’ 정책 실패땐 국민고통 -

원래 보수파는 웬만하면 기존의 것을 안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분명 보수정부인데,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희한한 보수다. 참여정부가 한 일도 제제다사들이 모여 오랜 토의, 숙고 끝에 추진한 것들이다. 이를 바꾸려면 역시 오랜 토의, 숙고가 필요한 것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단상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면전에서 “지난 10년 … 실패의 아픔” 운운하며 예의 없는 표현을 쓰더니 미국에 가서 “지난 몇 년간 한·미 관계가… 이념과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됐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를 지우고, 거꾸로 가려는 정부. 이것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성공 확률은 아주 낮다. ‘거꾸로’ 시도가 실패할 때 그것은 이명박 정부의 비극에 그치지 않고 국민도 함께 불행해질 것이다.

〈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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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문제를 놓고 통합민주당 지도부 사이에 파열음이 일고 있다. 오는 25일부터 내달 24일까지 잡힌 4월 임시국회에서 이를 처리해야 한다는 손학규 당 대표의 주장에 김효석 원내대표와 최인기 정책위의장 등 당 수뇌부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

급기야 김 원내대표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손 대표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고 직접 언급,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날 오후 전당대회 준비 태스크포스(TF) 팀 1차 회의를 열고 당 체제 재정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갈 길 바쁜 민주당이 난기류 속으로 빠져드는 모양새.

같은 날 손 대표는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끝끝내 함구했다.

이에 따라 오는 22, 23양일간으로 예정된 민주당 워크숍에서는 4월 임시국회 회기 내 FTA 국회 비준문제를 놓고 당 관계자들 간 난상토론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지난 16일 열린 통합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모습 ⓒ 통합민주당 
김효석 “손학규 대표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이 같은 불협화음은 지난 16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석상에서 감지됐다. 이 자리에서 손 대표는 “피해 산업에 대한 보상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면서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는 쪽으로 하자”고 제안한 뒤 “당내 토론 없이 대외적으로 처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최 정책위의장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4월 임시국회 FTA 처리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최 정책위의장이 최근 공개로 진행된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임시국회에서 (FTA를) 처리하지 말자”는 언급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 원내대표를 비롯 박상천 공동대표, 최 정책위의장, 김상희 최고위원 등이 입을 모아 손 대표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분위기가 험악해 졌으며 특히 김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정체성 문제까지 거론하며 손 대표를 압박했다는 후문이다.

김 최고위원과 같은 맥락에서 당내 대표적 개혁성향 인사로 분류되는 천정배 의원 역시 이튿날인 17일 기자들과 만나 “적어도 한나라당은 몰라도 민주당이 그래서는 안 된다. 4월 국회에서 (FTA를) 비준해 주자는 것은 당의 정체성과 거리가 멀다”고 쓴 소리를 내뱉었다.

이러한 분위기 탓인지 김 원내대표는 17일 기자간담회를 연 자리에서 “나도 경제학을 하는 사람으로 개방론자”라고 전제한 뒤 “FTA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처리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지에 대해 손학규 대표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뒤이어 김 원내대표는 “손 대표는 이번 (4월 임시) 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고 내 입장은 지금 처리하는 게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라면서 “쇠고기 시장까지 개방하면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라고 4월 임시국회 회기 내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김 원내대표는 “오는 23, 24일 예정된 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 워크샵에서 의견을 모은 뒤 최고위원회의와 의원총회를 통해 이번 임시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 처리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손학규 함구 “이 자리는 TF회의자리”

같은 날 오후 ‘전당대회 준비 TF회의’에 참석한 손 대표는 이와 관련한 당내 상황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굳게 입을 닫은 뒤 “질문은 받지 않겠다. 이 자리는 TF회의자리”라고만 말했다.

한편 한나라당은 4월 임시국회 회기 동안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17일 재확인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날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미 FTA 비준동의안에 관해 손 대표는 찬성을, 김 원내대표는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어 민주당도 견해가 서로 나눠져 있는 것 같다”며 “이번 임시국회 회기 내에 반드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절충을 잘 해서 통과시키도록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재훈 기자

김재훈 (jhkim@dailyseoprise.com) 기자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13> 희소성 법칙

청정에너지 시스템 도입·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나서야

경제학에는 희소성의 법칙이 있다. 경제가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바로 이 희소성의 법칙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이를 충족시켜줄 재화와 용역은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이 희소성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 경제 문제들은 항상 나타날 것이고 인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21세기 에너지 부문의 환경변화는 엄청나다. 기후변화에 따른 온실가스 저감이 그렇고 화석연료 고갈에 따른 유가인상이 그렇다.

이 문제는 시장경제하에서는 궁극적으로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당장 국민들이 당하는 에너지 공급량 부족, 이산화탄소(CO2)배출량 증가, 그리고 경제성장률 둔화 등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고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최근 지속가능개발이란 개념이 생겨나 경제성장, 환경보존, 에너지 안보란 세 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대안으로 환영 받고 있다. 지속가능개발이란 미래 세대들이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개발을 뜻한다.

특히 에너지 생산과 사용에 있어서 탄소 원단위 저감 문제가 지속 가능성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이산화탄소가 인위적으로 방출되는 온실가스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이중 80%는 화석연료의 연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에너지 부문에서 가장 주된 관심사는 바로 이산화탄소의 배출량 억제다. 이를 해결하는 대책으로 화석연료의 저에너지가격 체제와 보조금제도의 철폐, 규제개혁의 가속화와 공정한 에너지 가격시스템의 정착 등이 거론되고 청정에너지 시스템 도입과 비탄소 에너지원의 사용 확대도 권장된다. 그리고 이산화탄소 포획에 대한 연구개발 강화와 에너지시스템의 탈탄소화 추진까지 주목 받고 있다.

이런 추진 과제들은 명확한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으면 실행되기 어렵다. 명확한 인센티브 제도는 사람들의 행동양식, 투자전략, 정책과 제도 등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기후변화 방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희소성의 법칙이 있기에 물가ㆍ실업ㆍ소득불평등이 일어나고 경제체제의 좋고 나쁨도 나타나며 환경공해도 발생하는 것이다. 희소성은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경제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진오 에너지경제연구원 명예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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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신달자 ㅣ 민음사


섬세하고 화려한 문체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 우리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시인 신달자.

모두가 그녀의 편일 듯 승승장구 밖엔 모를 것 같은 그녀가 꼭꼭 감춰뒀던 어둡고 처절했던 그녀의 고통들을 고백한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를 써냈다.

제자인 '희수'에게 이야기 건네듯 써 내려간 에세이에는 짤막한 글의 길이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이 적나라하고 빼곡하게 쓰여있다.

명망 있는 경제학 교수였던 남편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고 하루 아침에 그녀는 세 아이의 가장, 간병인으로 혼신을 다해야 했다.

기사회생한 남편은 자유롭지 못한 몸이 되었음을 좌절하고 그로 인한 신경질과 우울증은 고스란히 신달자에게 전해졌다.

"그가 눈을 뜨고 정확하게 3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라는 말로 그녀는 그 당시의 수난을 전한다.

잠시의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이번엔 시어머니가 크게 다쳐 병상에 누우면서 그녀에게는 삶의 무게가 더해진다.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원망스러웠던 그때 그녀는 “사실 집단자살을 왜 생각하지 않았겠니”, “시어머니가 돌아가셔 준다면 조금은 짐이 가벼울 것 같다”는 고백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악다구니를 해댔다고 고백한다.

이런 지옥 같은 날 속에 종교는 지독하게 발목을 잡았던 삶의 무게를 이기는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또한 문학과 공부에 대한 열정은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에 진학하게 하고 글을 써 베스트셀러가 되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

24년이란 세월 동안 사연만 남겨준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인생도 잠시 평안을 얻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닥친 유방암 판정은 또다시 그녀를 절망하게 했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굴곡진 세월의 고통과 병마를 이겨낸 신달자의 담담하고도 격정적인 고백은 독자에게 '결국 영원히 싸우고 사랑해야 할 것은 삶'이라는 것을 전한다.

더럽고 치사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 바닥까지 고스란히 전하는 고통과 절망의 고백에서 독자는 인생의 또 다른 빛과 희망도 함께 할 수 있다.

[북스조선 임홍경 웹PD book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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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具學書 ▼ 194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 삼성 비서실 이사, 삼성전자 관리담당 이사, 신세계백화점 사장 ▼ 동아일보 ‘올해의 CEO 베스트 10’, 2007 한국의 경영자상(한국능률협회) ▼ 現 (주)신세계 부회장

“한국 기업가 중에서 진정한 시장주의자가 몇이나 될까?”

‘신동아’ 1월호 이 코너에 실린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의 말이다. 자유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우리 기업가들의 속성을 지적한 듯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있을 것 같아서 김 이사장에게 ‘자유인과의 대화’에 초대할 기업인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시장원리를 철저히 받아들이면 사업에 성공하기 힘들겠지요.”

기업가는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기업가의 성향에는 그 사회의 특성이 반영돼 있다. 한국 기업인들은 소비자에게만 잘 보여서는 안 됐다. 어떤 식으로든 공무원과 정치인에게 ‘보험’을 들어야 기업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기업인들이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업인들 중에 누군가 ‘자유인’으로 꼽을 만한 인물이 있을 것 같았다. 사회 탓하지 않고, 정부 탓하지 않고, 스스로 옳게 돈버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 있을 법했다. 그러던 차에 워런 버핏의 오른팔 격인 찰스 멍거 부회장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신세계는 정말 놀라운 기업이다…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멍거가 부회장으로 있는 버크셔 해서웨이는 가치투자, 즉 정도(正道)를 걸으면서도 돈을 버는 기업에 투자하는 데 정통한 회사다.

신세계에 대한 정보를 뒤져봤다. 오너가 자진해서 천문학적 상속세를 납부했고 ‘윤리경영’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정부로부터 특혜 받을 생각은 없어 보이는 회사다. 가격혁명으로 소비자에게 엄청난 혜택을 안겨줬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윤을 내서 지난 10년간 주가가 20배 가까이 뛰었다. 이런 회사의 경영자라면 자유와 책임의 원리를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다는 약간의 의구심을 품은 채 신세계 전문경영인 구학서 부회장을 찾았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미술관처럼 보이는 남대문의 집무실에서 약간은 수줍게, 하지만 아주 반갑게 그는 우리 일행을 맞았다.

인화(人和)의 부작용

김정호 구 부회장을 ‘자유인과의 대화’에 모신 것은 생활신조나 경영방식이 ‘자유와 책임의 원칙’에 충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본 건가요.

구학서 자유와 책임의 원칙을 지키는 것, 남에게 의지하기보단 스스로 노력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런데도 제게 자유주의자라는 호칭을 주시니 오히려 민망합니다. 인류 최고의 가치인 자유를 어떤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김정호 구 부회장께서 온정주의를 배격하고 신세계페이 운동을 펼친 것을 보고 자유주의 철학을 가진 경영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온정주의에 주목 했고, 또 그것이 경영 성과에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구학서 온정주의 배격과 신세계페이 운동은 외환위기 이후 윤리경영을 도입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한국적 온정주의 문화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꿔야겠다는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온정주의는 ‘인화(人和)’라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좋은 말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도 큽니다. 협력회사와의 술자리, 동향·동문 출신끼리의 결속 같은 것이 그렇지요. 저는 인화에 의한 온정적 의사결정이 결국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킨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자기 몫은 스스로 계산하는 신세계페이 운동을 시작했죠.

처음엔 협력업체 관계자와 식사하면 무조건 그 비용을 신세계가 지급하게 했습니다. 밥이라도 한 끼 접대 받으면 그게 다 마음의 빚이 되어 제대로 의사결정을 못할 것 같았어요. 초기에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신세계 직원이 밥값을 내니까 그때까지 으레 밥값을 부담해온 협력업체 직원들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만나기를 꺼리게 된 거예요. 함께하는 자리가 줄어드니 아무래도 정보 얻기도 힘들고 업무에도 지장이 생겼죠.

고민 끝에 각자 내는 더치페이로 방침을 바꿨습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제법 더치페이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신세계페이 문화는 외부와의 관계뿐 아니라 회사 내부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엄청난 비용절감을 가져왔습니다. 대외협력비가 많이 줄었거든요. 애초의 의도가 온정주의 문화를 없애자는 것이지, 비용절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돈을 모두 직원들에게 돌려줬습니다.

김정호 그렇게 온정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구학서 물론입니다.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것과 남을 배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희는 직원들이 자기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을 적극 장려합니다. 기부는 연말에 회사 이름으로 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실 그 돈은 주주와 직원들의 것이잖아요. 그래서 신세계는 개인이 기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어요. 매달 직원들의 개인 기부를 통해 모아지는 기금이 1억원 정도이고, 여기에 회사가 매칭그랜트 형태로 지원하는 1억원을 합쳐 매월 2억원을 결연아동 생활보조금 지원, 환아 수술 및 치료비 지원, 장학금 지급 등 다양한 지원활동에 사용합니다.

“PL은 윈-윈 게임”

김정호 ‘신세계’ 하면 무엇보다 이마트의 성공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이마트가 시장경제원리에 매우 충실한 기업이라고 봅니다. 품질향상과 가격인하를 통해 소비자에게 기여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벌어들이니까요. ‘가격혁명’이라고 불릴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구학서 할인점은 시스템 싸움입니다. 발주 시스템, 물류 시스템이 아주 중요한데 이마트는 그런 시스템들이 잘돼 있습니다. 또한 초기에 좋은 부지들을 저렴하게 확보한 덕에 투자비용이 낮은 편입니다. 더욱이 점포가 많다 보니 대량구매에 의한 바잉파워(buying power)가 강하다는 덤도 있고요.

“시장점유율 높으면 소비자에 이익”

김정호 싸게 팔려면 싸게 사올 수 있어야 하겠죠. 가령 농산물의 경우 산지에서 받아오는 가격이 경쟁업체들보다 더 싼가요.

구학서 그렇습니다. 전체물량을 미리 한꺼번에 사거든요. 그래서 소비자에게 싸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미리 많이 사면 생산자는 행여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안정적인 가격으로 거래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와 생산자, 유통업체인 이마트까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거죠.

이렇게 마트가 소비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은 우리가 중소상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비난과 규제로 대응하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구 부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보다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를 활성화하고 세금 잘 내는 게 근본”이라고 말했다.

김정호 미국에서도 록펠러 같은 기업인들이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고도 경쟁자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욕을 먹었죠. 신세계의 경우 납품업자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이마트가 도입한 PL(Private Label, 자체 상표) 때문에 제조업체들이 아우성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만.

구학서 과장된 기사입니다. 이마트의 PL점유율은 10% 미만입니다. 90% 이상인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지요. 그리고 PL은 유통업체 간의 차별화를 위한 전략이지 제조업과 싸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어느 제조업체든지 유휴설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이마트가 PL을 통해 고정적으로 가동시켜주면 해당 제조업체는 고정비용 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한 원가 절감은 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되죠. 결국 PL은 유통업체, 제조업체, 소비자 모두가 윈-윈 하는 전략입니다.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기 힘든 중소기업 제품의 경우 이마트가 신뢰성을 부여하고 인큐베이팅하는 기능도 하죠.

김정호 유통업에 대한 규제가 많은 편입니까.

구학서 꽤 그런 편이지요. 유통업은 시장 내에서 소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굳이 정부가 간섭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할인마트들은 인터넷 쇼핑, 모바일 쇼핑과도 경쟁하는 시대가 됐어요. 이마트만 해도 홈플러스나 롯데마트 같은 오프라인 업체들하고만 경쟁하는 게 아니에요. 하이마트, 지마켓 등이 모두 경쟁자이지요.

그런데도 정부는 한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좀 높아지면 바로 독점이라는 딱지를 붙여 규제하려 합니다. 지금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시장점유율이 좀 높다고 소비자가격을 올리는 등의 횡포를 부릴 수 있을까요? 유통업에선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기에 시장점유율이 높아져 거래의 규모가 커지면 오히려 가격을 더 낮출 수 있습니다. 제조업조차 이제 시장이 글로벌화해서 독점의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시점에 와 있는데, 그보다 규모의 경제가 더 큰 유통업은 말할 것도 없지요.

김정호 마치 경제학 강의를 듣는 것처럼 논리적이고 재미있습니다. 이마트가 국내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중국에도 진출했는데, 한국과 중국에서 기업할 때 규제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구학서 중국에서는 아직 규제라고 할 만한 것을 못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외자기업이 지분을 50% 이상 못 갖게 하는 규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다 풀렸습니다. 규제 때문에 힘든 부분은 없어요.

김정호 올해 신년사에서 중국에 이마트를 1000개 만들겠다고 하셨더군요. 중국에 진출한 이마트들의 실적은 어떻습니까.

구학서 중국에 이제 겨우 10개 진출했습니다. 중국은 워낙 큰 시장이라 1000개가 충분히 진출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계속 집중투자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진출한 점포 중 절반이 이익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중국의 도시 개발 속도와 이마트 점포 개점 속도에 차이가 있어 고생도 했지만 이젠 별문제 없이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백화점 같은 할인점’

김정호 글로벌 유통기업들과 비교할 때 이마트는 어떤 강점을 내세워 중국 소비자에게 다가가고 있습니까.

구학서 외국의 할인마트들은 대개 창고형입니다. 또 가격이 싸다는 인상을 주려 노력하지요. 그러나 이마트는 가격 이외의 것들에도 신경을 써서 백화점 같은 할인점을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포장에서부터 진열까지 모두 소비자(주부)에게 맞춥니다. 천장도 복개 공사를 해서 아늑한 느낌을 주려 하죠. 초기엔 공사비가 더 들지만 냉난방 비용까지 따지면 결국 비슷합니다. 작은 것에도 소비자를 배려했더니 반응이 좋았습니다.

가령 처음 이마트를 개장할 때 달걀 상품을 벌크(bulk)로 팔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깨지곤 했죠. 이로 인해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비위생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용은 좀 들지만 한국식 단위 포장으로 바꿨습니다. 중국 소비자들이 이걸 아주 좋아했어요. 이처럼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니 한국 기업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더군요.

김정호 한국의 유통기업들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구학서 이마트가 중국에 진출할 때는 현지 한족(漢族)을 점장으로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 점장에게 인사, 구매, 관리 등 모든 업무를 맡겼습니다. 철저하게 그쪽 문화에 동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외국에서 성공하려면 브랜드 고유의 장점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직원 1명에게 나갈 비용이면 현지에서 20명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현지화는 비용절감과 현지 고객의 마음을 잡는 데 모두 유용하기에 꼭 필요하죠. 우리가 규모면에서는 아직 월마트의 30분의 1 수준입니다. 하지만 내부 효율과 상품관리 측면에선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고 자부합니다. 제 입으로 이마트 자랑을 하는 것이 민망합니다만.

김정호 하하, 그렇군요. 그럼 백화점은 어느 수준입니까.

구학서 백화점은 할인마트와는 좀 다르죠.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특정 매입’이라고 해서 장사는 입점업체가 하고 백화점은 브랜드 관리와 부동산임대업 기능만 합니다. 재고부담이 적어 경영상의 리스크는 적지만, 전체적인 마케팅과 세일이나 관리하지 백화점을 확실히 차별화할 전략을 세우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 신세계는 자주(自主) 편집매장(백화점에서 임의로 상품을 선정해 테마별 매장으로 만드는 것)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이제 우리 백화점들도 수익이나 관리 측면에서 예전보다 많이 나아져서 일본백화점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시찰을 나올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노력할 부분이 많지만요.

윤리경영의 힘

김정호 신세계가 국내 최초로 윤리경영을 도입했다고 들었는데, 그 핵심은 무엇인가요.

구학서 신세계는 대한민국 모든 제조업체와 거래하는 유통업체입니다. 또 전국의 소비자와 만나고요. 우리의 팬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적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약점이 있으면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유통업은 더 투명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반(反)기업정서가 팽배하다고들 하는데, 여기엔 재벌들이 기업을 물려줄 때 상속세를 제대로 안 내는 등 떳떳하지 못하게 행동한 것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금 깨끗하게 다 내고 이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3500억원의 세금을 냈지만, 앞으로도 세금 더 낼 일 있으면 다 낼 겁니다. 떳떳하고 깨끗하게 말입니다. 그게 신세계의 윤리경영에도, 반기업정서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김정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독자의 속도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좋지 않은 일로 공격 받는 경우는 있지요?

구학서 예, 억울한 일도 있습니다. 예컨대 시민단체가 1998년 광주 신세계의 유상증자 건과 관련해 우리 경영진을 배임혐의로 고발한 바 있습니다. 각 방송사가 9시 뉴스 헤드라인에 편법상속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밝혀져 기소조차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편법상속을 했다는 보도는 이미 다 쏟아져 나온 뒤였죠. 시민단체가 고발한 사실은 크게 다뤄놓고 막상 무혐의로 결정나자 어디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더군요. 그래서 더욱 윤리경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지만, 정말 털어도 먼지 안 나오는 기업이 되어 보려고 합니다.

김정호 그런 윤리경영 시스템이 회사의 수익성에는 어떤 영향을 줍니까.

구학서 개인의 부정으로 얻은 이익은 회사 전체가 보는 피해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곧 경쟁력이 강한 조직입니다. 또한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윤리경영을 따르게 하려면 최고경영자부터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이마트가 월마트코리아를 인수하지 않았습니까. 월마트를 공개 M&A시장에 내놓았으면 우리가 인수한 것보다 1000억, 2000억원 정도 더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월마트가 이마트에 기업을 넘긴 것은 윤리경영을 하는 믿을 만한 기업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마트라면 직원들 고용승계는 물론 마무리 작업까지 깨끗하게 매듭지어줄 것으로 믿었던 거죠. 이런 것도 윤리경영으로 얻은 신세계의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君君臣臣 父父子子

김정호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워런 버핏이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기업으로 신세계를 꼽은 걸 보고 놀랐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이번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기업이 수익을 내는 것과 사회공헌으로 자선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습니까.

구학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제적 책임, 윤리적 책임, 박애적 책임 등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기업은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 활성화하고 세금 잘 내는 게 근본이라고 봅니다.

김정호 구 부회장께서는 말단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거대기업의 CEO에 오르는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개인적 성공의 비결은 뭐라고 보십니까.

구학서 저는 머리도, 공부도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다 그럭저럭 했지요. 물론 공부가 사업과 많이 다르긴 해도 저는 정말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입니다. 제가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논어’ 안연 편)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는 제가 실천해온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원일 때는 우수사원이 되려고 노력했고, 과장 때는 다른 과장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저 내 자리에서 성실하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큰 욕심이나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거다 하고 내놓을 만한 성공 비결은 없습니다.

김정호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구학서 돈 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돈을 버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듯해요. 벤저민 프랭클린의 삶을 그린 ‘덕의 기술’에 ‘최상의 행복은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서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사회를 위해 잘 쓰는 사람이 진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김정호 마지막으로 한국의 기업 환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구학서 기업가는 어떤 환경에서든 이익이 날 것이라고 예상되면 투자를 합니다. 정부가 좌파적인지 친기업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아무리 친기업 정부라고 해도 수익이 안 날 것 같으면 투자 안 하는 것이 기업가의 본성입니다. 요즘 제조업 투자가 부진한데, 그 근본원인은 공급과잉, 중국과 인도의 성장 등으로 투자할 곳을 못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서 해법 찾기

정부의 규제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정부가 기업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는 등 보조를 맞춰주면 좋겠지요. 그러나 정부가 굳이 나서서 투자를 유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결국 기업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좋은 투자처를 찾는 일인데, 이것은 기업 스스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특별히 기업하기 나쁜 나라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어떤 정부도 기업에 대해 돈 벌지 말라, 투자하지 말라고 한 적 없거든요.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고 수익을 낼 투자처를 찾으려 고민해야 합니다.

얼마 전 정몽준 의원이 ‘우리나라는 기업친화적이라기보다는 시장친화적이라야 한다’고 했는데, 기업가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기업은 스스로 당당하고 깨끗하게 경영해야 합니다. 정부는 그런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하고요.

그의 말은 쾌도난마였다. 유통업계와 기업환경에 관한 지식에서부터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경영철학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거침이 없었다. 막힘없이 이어진 두 시간의 대화 내내 그가 보여준 것은 자유주의의 구체적 모습, 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영학이었다. 특히 마음에 든 것은 투자 부진을 반기업 정서나 정부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 문제의 해법을 내 안에서 찾으라’는 공병호 소장(‘신동아’ 2007년 11월호 인터뷰)의 자유주의 철학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깨끗하게 경영할수록 수익률이 높아진다는 그의 믿음에도 공감이 갔다. 하지만 그것은 경영자 자신에게 대단한 도덕률을 요구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깨끗하기를 요구하면서 나만은 적당히 살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살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높은 수익도 올릴 수 있고 타인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은 경쟁을 통해 소비자에게 기여하는 일이라는 생각, 또한 자선은 기업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하는 것이라는 원칙도 철저한 자유주의와 재산권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영방침이다. 기업 경영자가 다들 그런 도덕성을 지니고 그 정도의 수익을 낸다면 대한민국이 곧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세계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 hunghokim@hotmail.com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신동아]

요즘 소리 없이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큰손이 있다. 바로 ‘국부(國富)펀드’다. 귀에 썩 익은 용어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된 지가 몇 년밖에 되지 않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생소하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SWF(Sovereign Wealth Fund)’라고 한다. 영한사전에 따르면 ‘sovereign’은 ‘최고 권력을 가진, 통치권이 있는, 자주의, 최고의…’ 등의 의미다. 단어 뜻만으로도 이 펀드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월23~27일 ‘다보스 포럼’이 열린 스위스의 휴양도시 다보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은 연단에 올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게이츠 회장은 “선진국이 저개발국 국민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감동적인 연설을 해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블레어 전 총리는 “테러리즘, 기후변화, 물 부족 등 지구촌이 당면한 과제들을 극복하려면 정부, 기업,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협력적, 혁신적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을 통해 즉시 보도됐다.

이들이 연설하는 동안 다보스 시내의 다른 곳에서는 몇몇 유력 인사가 조용한 회합을 가졌다. 핵심 사안을 논의하려면 언론의 눈길을 피하는 게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참가자 가운데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다. 흰색 다슈다샤(원피스형 아랍 전통 복장)를 입고 검은색 이칼(머리띠)을 맨 풍채 좋은 아랍 신사도 여럿 동참했다. 그들은 중동 산유국의 실력자였다. 서머스 전 장관은 침통한 얼굴로 미국의 경제상황을 설명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미국 금융회사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 금융계 전체에 난리가 났다”는 게 요지였다. 씨티그룹, 메릴린치,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미국 유수의 금융회사가 서브프라임모기지 때문에 입은 손실은 줄잡아 600억달러나 된다는 것이다.

유럽 금융 전문가들은 서머스 전 장관의 설명에 맞장구를 치면서 “유럽의 투자은행도 막대한 손실을 입기는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이들은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탓에 전세계 금융회사들이 당한 손실이 2000억~3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 전문가들은 산유국 실력자들에게 하소연했다.

“2007년 11월,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아부다비 투자청(ADIA)이 미국 씨티그룹에 75억달러의 긴급 자금을 공급한 점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ADIA도 씨티그룹의 최대 주주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을 것이다. ADIA 같은 산유국 국부펀드가 미국 및 유럽 금융회사에 더욱 활발히 투자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양측에 모두 이익이 된다.”

국부펀드 안건이 다보스 포럼에서 본격 논의된 것은 2008년이 처음이다. 국부펀드는 현재의 세계경제 난국을 돌파하는 열쇠로 요긴하게 쓰인다. 하지만 선진국 일각에서는 “국부펀드가 앞으로 미국 금융회사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성장하면 곤란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부펀드가 미국 및 유럽의 핵심 기업이나 부동산 등을 본격적으로 사들이는 상황을 걱정한다. 미국의 일부 극우세력은 “사막의 유목민들이 오일달러로 서방을 공략하면 중세와 같은 암흑기가 올지 모른다”고 경각심을 부추긴다.

외환 불리기

싱가포르 국부펀드는 ‘돈 될 만한’ 곳은 어디든 투자한다. 서울 강남의 스타타워 빌딩도 그 중 하나.

국부펀드는 각국 정부가 잉여 외화를 굴리기 위해 설정한 펀드다. 주로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중동 산유국들이 앞장서 국부펀드를 조성했다. UAE,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이 주인공이다. 1953년 쿠웨이트가 원유수출금을 재원으로 삼아 세운 국부펀드가 원조다.

싸구려 물건을 전세계에 수출해 벌어들인 외화를 1조5000억달러나 쌓아놓은 중국도 2007년 9월 2000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설정했다. 중국은 중국투자공사(CIC)를 출범시켜 이 자금을 관리하도록 했다. 러시아도 올해 국부펀드를 출범할 것으로 알려졌다. 싱가포르는 국부펀드를 운용한 지 오래다. 한국은 2005년 3월 한국투자공사법을 공포하고 이를 근거로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했다. 한국의 국부펀드인 KIC는 2006년 6월 한국은행에서 170억달러를 위탁받아 돈을 굴리기 시작했다. KIC는 이어 재정경제부에서도 30억달러를 받아 모두 200억달러를 관리한다. 2008년에는 정부로부터 추가로 100억달러를 받아 300억달러를 굴릴 예정이다.

각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라 곳간에 경화(硬貨), 즉 외환을 쌓아둔다. 이는 외환보유액으로 표시되고 대외지급능력을 나타낸다. 미국은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스스로 찍어내므로 외환보유액이라는 개념이 다른 나라보다 덜하다. 개발도상국은 달러, 유로, 엔 등 기축통화가 모자라면 국가 부도가 생기므로 외환보유액에 늘 신경을 쓴다. 한국은 1997년 12월 외환보유액이 거의 바닥나 외환위기를 맞은 바 있다. 이런 고초를 겪은 한국은 그 후에는 외환을 꾸준히 쌓아 보유액을 늘렸다. 2007년 말에는 2662억달러에 이르렀다. 외환은 가급적 안정적으로 굴린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수익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막대한 외환을 더욱 크게 불리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발상에서 국부펀드가 탄생했다. 산유국은 원유가 천년만년 생산되지 않음을 잘 안다. 지금 손에 쥔 오일달러를 불려야 미래 비전을 실천할 수 있으므로 국부펀드를 통해 고수익 재테크에 나섰다. 산업연구원 김계환 부연구위원은 산유국들의 국부펀드 운용에 관한 기고문(‘주간동아’ 618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한 자원 부국들의 전략은 2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산업적 다각화다. 경제의 자원수출 의존도를 줄여 외적 충격에 강하고 고용 창출력이 높은 산업구조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2015~2025년으로 예상되는 피크 오일(peak oil·세계 석유 생산량이 최고점에 이르는 시기)의 현실화에 대응해 새로운 경제성장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또한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으로 청년실업 문제가 점점 커지며, 이슬람 근본주의 부상과 같은 사회·정치적 압력이 가중되는 현실에 대처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포트폴리오 투자, 즉 위기에 빠진 선진국 금융기관과 기업을 인수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개도국들의 이런 움직임은 선진국의 보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유럽의 가스 유통망을 장악하려는 러시아의 시도는 영국과 유럽연합의 반발에 부딪혔다.”

계속되는 성장세

국부펀드의 자금 규모는 공식 집계되지 않는다. 각국 정부가 보고할 의무도 없다. 따라서 세계 전체의 국부펀드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경제 전문기관들의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세계 30여 개국의 40여 개 국부펀드 규모를 모두 합치면 2조5000억~2조9000억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한 바 있다. 나라별로는 UAE 8750억달러, 사우디아라비아 3000억달러, 쿠웨이트 2500억달러 등이다. 독일계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셈법에 따르면 실제 운용되고 있는 세계의 국부펀드는 3조1000억달러, 곧 설립될 펀드를 포함하면 3조4000억달러다. 여러 기관의 분석을 종합하면 각국 국부펀드에 쌓인 돈은 3조달러에 달한다.

엄청난 금액이다. 기업 인수합병(M&A)에서 폭풍의 핵 노릇을 하는 사모펀드가 2조달러, 국제 금융시장에서 게릴라식으로 치고 빠지는 투자수법으로 고수익을 올리는 헤지펀드가 1조4000억달러임을 감안하면 국부펀드가 얼마나 큰 규모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세계 전체의 돈 흐름과 견줘보면 아직 대단한 금액이라 할 수는 없다. 전세계 은행자산은 63조5000억달러다. 그러니 국부펀드는 아직 은행자산의 5%에도 미치지 못한다. 투자펀드(21조달러), 연기금(17조9000억달러), 보험사 자산(16조달러)의 15~20%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국부펀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고유가 체제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 원유가는 2002년 이후 줄곧 상승했다. 막대한 오일머니가 중동 산유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IMF, 도이체방크, 모건스탠리 등은 국부펀드가 2012년엔 5조~8조7000억달러, 2017년엔 10조~17조5000억달러, 2022년엔 27조7000억달러로 급증하리라 추측한다. 세계 전체 금융자산에서 차지하는 국부펀드의 비중도 2007년 2.5%에서 2022년엔 9.2%에 달할 전망이다.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종합분석팀은 2007년 10월 ‘세계 국부펀드의 확대 배경과 향후 전망’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국부펀드의 확대가 세계경제 질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요지를 달았다.

‘개도국들의 국부펀드를 통한 선진국 주요기업 인수합병 등 전략적 투자 확대 우려가 확산되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국부펀드 운용의 투명성 제고 압력, 자국 기업 보호 확대 등 국부펀드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는 움직임.

고유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단기간 내에 해소되기 어려워 국부펀드의 성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따라 선진국 투자를 확대하려는 개도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선진국 간 마찰이 심화되면서 보호주의 확산 등 글로벌 투자여건이 악화될 가능성.’

세계 국부펀드 1인자, ADIA

걸프지역에 자리 잡은 UAE는 아부다비, 두바이 등 7개 토후국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다. 대추야자 열매와 양젖을 먹고 살던 유목민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솟아난 원유 덕분에 오일달러를 움켜쥐게 됐다. 7개 토후국 가운데 아부다비와 두바이에 원유가 집중적으로 매장돼 있다. 나머지 5개 토후국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오일달러를 효율적으로 굴려 원유가 고갈될 때를 대비한다. ‘중동의 쇼핑센터’라 불리는 두바이는 일찍이 상업 중심지를 지향했다. 미래에 원유가 마르더라도 두바이를 비즈니스 중심지로 성장시켜 자생적으로 굴러가도록 할 계획이다. 아부다비는 오일달러를 주로 국부펀드로 굴린다. 1976년 아부다비투자청(ADIA·Abu Dhabi Investment Authority)을 세워 국부펀드 관리 업무를 맡겼다.

ADIA의 자산은 8750억달러로 세계 최대의 국부펀드다. 해마다 수백억달러의 잉여 오일달러를 쌓은 금액이다. 여기에 투자수익, 이자 수입이 덧붙여져 금액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몇 년 후엔 1조달러를 돌파할 것이 확실시된다. ADIA에는 금융전문가와 사무직원 등 1400여 명이 근무한다. 미국 금융회사 씨티그룹에 75억달러를 투자해 세계 금융가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이미 여러 금융회사에 대주주로 참여해 ‘금융계의 큰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튀니지, 바레인, 이집트 등의 주요 은행에도 투자했다.

UAE 대통령이자 아부다비 토후국 통치자인 셰이크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흐얀(60)이 ADIA의 회장이다. 할리파 대통령의 동생인 셰이크 아흐마드는 ADIA의 최고경영자다. 이들 형제가 아부다비의 국부를 좌지우지한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2007년에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할리파 대통령의 총재산은 190억달러다. 하루 생산되는 원유 250만배럴에 대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 말이 ‘책임’이지 판매 대금을 운용하는 권한을 가졌다. 총재산 가운데 특기할 품목은 경주용 낙타로, 1만4000마리를 갖고 있다. 그가 태어나던 1948년에만 해도 아부다비에는 변변한 학교조차 없어 그는 가문에서 전통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싱가포르는 싱가포르 투자청(GIC), 테마섹 홀딩스 등 2개의 국부펀드를 갖고 있다. 이들 국부펀드는 지구촌 어느 곳이든 ‘돈 될 만한’ 곳을 노려 투자한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대형 건물인 파이낸스 빌딩과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건물인 스타타워 빌딩을 사들인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부동산을 헐값에 사서 비쌀 때 판다는 것이 투자 원칙이다.

싱가포르 국영기업들의 지주회사인 테마섹은 2007년 말 미국 유수의 투자은행 메릴린치 주식 44억달러어치를 사들여 지분 9.4%를 가진 대주주가 됐다. 올 3월까지 행사할 수 있는 옵션까지 포함하면 50억달러를 투자하는 셈이다.

돈 되는 곳은 어디든 노린다

1981년 설립된 GIC는 더욱 공격적이다. 지난해 12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자금난에 빠진 스위스의 투자은행 UBS에 11억달러를 투자해 지분 9%를 차지했다. 이어 GIS는 미국 씨티그룹에도 68억8000만달러를 투자했다. 자산 총액 3300억달러인 GIC의 달음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부동산 헤지펀드인 로젠 펀드에 3억달러를, 영국의 부동산 투자회사인 브리티시랜드에 1억3000만파운드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GIC는 세계 50여 개국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 GIS가 투자하는 대상은 모두 일시적으로 ‘돈맥(脈)’ 경화에 걸린 우량 업체들이다. “위기 때 참여해야 큰 수익을 올린다”는 투자 상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신장섭 교수는 ‘싱가포르의 미국 사재기’(‘중앙선데이’ 2008년 1월20일자)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밝혔다.

“GIC는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의 수익률이 얼마인지 베일에 싸여 있다. 그러나 테마섹은 2004년부터 실적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테마섹의 32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18%였다. 장기간 이 정도 수익률을 올린 펀드는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해온 결과다. 물론 이들의 투자 판단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앞으로 상황이 더 나빠지면 좀 더 기다렸다 사지 못하고 너무 빨리 들어갔다고 후회할 수도 있다. 테마섹의 경우 탁신 전 태국 총리가 갖고 있던 신코퍼레이션을 인수했다가 큰 손해를 본 전력도 있다.”

중국 정부는 중국투자공사(CIC·China Investment Corporation)를 설립해 2000억달러의 국부펀드를 굴리도록 했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1조달러를 넘은 지 오래고 해마다 2000억달러 이상이나 늘어나고 있다. 산유국의 오일 달러와 달리 중국의 외환은 수출로 벌어들인 것.

CIC가 출범하자 세계 금융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CIC의 투자 행태를 살폈다. CIC는 일단 조용한 걸음을 내디뎠다. 2000억달러 가운데 3분의 2는 중국 내 은행의 지분을 매입하는 데 사용했다. 아직 외국 기업에 대한 대규모 지분 매입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CIC는 2007년 6월 미국계 사모 투자펀드인 블랙스톤의 지분 10%를 30억달러에 사들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CIC가 아직 정식 출범하기도 전에 사전투자 형식으로 이뤄진 일이다. 블랙스톤 투자 건은 난항을 겪고 있다. 투자 초기엔 블랙스톤의 주식 가격이 주당 29달러대였으나 신용경색 여파 탓에 20달러 수준으로 폭락했다. 투자금액 30억달러가 20억달러로 줄어든 셈. 이 때문에 중국 정계에서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중국, 일본도 설립

중국의 국영 에너지 업체인 해양석유공사(Cnooc)는 2005년 미국의 종합석유회사인 유노칼을 인수하려다 미국 내에 조성된 반대 여론 때문에 좌절한 경험이 있다. 미국에서는 “항공사, 통신업체, 에너지 기업, 기술업체 등 기간산업체를 외국에 넘기면 곤란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유노칼 인수 실패에 이어 블랙스톤 투자 불안이 잇따르자 CIC는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넌다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다 2007년 12월 미국의 모건스탠리에 50억달러를 투자했다. 일시적으로 자금 위기를 겪는 모건스탠리는 언젠가는 이름값을 할 투자은행이기 때문이다.

CIC의 초기 임직원은 중국인민은행에서 자리를 옮긴 20명이었다. 이들은 국제금융 거래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해외투자를 맡을 전문가를 모집하기 위해 신문 및 온라인 사이트에 구인 광고를 냈다. 리스크 분석가, 포트폴리오 운영자, 홍보 담당자 등 전문 인력 70명을 뽑았다. 포트폴리오 운영자를 해외 연수를 보내 선진 기법을 익히도록 할 계획이다. 이들은 앞으로 베이징에 머물면서 미국, 유럽, 일본 등의 금융시장을 대상으로 주식, 채권, 파생금융상품을 거래할 작정이다.

일본도 국부펀드를 설립할 가능성이 있다. 외환을 9000억달러나 쌓아둘 필요가 없다는 점이 그 이유로 꼽힌다. 만약 외환위기 상황을 맞더라도 일본은 선진국이어서 국제금융시장에서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 “보유하고 있는 거액의 외환을 너무 안정적으로만 굴리지 말고 국부펀드 형식으로 수익성에 중점을 두고 운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해 이를 줄여야 한다.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 사회보장비용이 많이 들 텐데 재정적자가 심각해지면 노인에게 줄 돈이 바닥난다. 국부펀드로 돈을 크게 불려 재정적자를 메워야 한다는 논리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본의 국부펀드 규모는 7000억달러 수준”이라 분석했다.

야누스의 얼굴

서방 선진국들은 중동 산유국과 중국의 국부펀드를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반반씩 가진 야누스로 보고 있다. 메릴린치, 씨티그룹, UBS 등이 자금난에 몰렸을 때 수십억달러씩 급전을 대준 국부펀드의 얼굴은 천사로 비쳤다. 그러나 국부펀드가 선진국의 통신, 에너지, 금융산업 등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경우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악마로 비친다. 선진국들은 개도국 국부펀드가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환율 개입, 공정경쟁 저해 등 국제경제 여건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하는 데 이용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국부펀드가 외국의 신문, 방송사를 인수해 여론에 영향에 줄 개연성도 걱정한다.

진석용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국부펀드에 대한) 국제 금융계의 환대는 잠시뿐이었고 지금은 국부펀드의 투자 활동에 대해 선진국들이 우려하고 있다”면서 “물론 그 기저에는 선진국들이 기득권을 누려오던 글로벌 경제가 점차 다원화하는 데 대한 불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선진국들은 국부펀드의 손발을 묶을 준비를 슬슬 하고 있다. 첫 번째 요구는 투명성을 높이라는 것. “국부펀드의 운용에 관한 정보가 부족해 루머가 난무하므로 시장이 불안해진다”는 것을 그 명분으로 내세운다.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이 국부펀드의 자산운용에 관한 국제적인 행동규범(code of conduct)을 제정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행동규범의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운용 목표, 투자전략, 운용결과 발표 등이다. 다른 나라 국부펀드의 속살까지 보겠다는 심산이다. 이와 함께 국부펀드가 미국 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엑손-플로리오(Exon-Florio)법을 ‘외국 정부 또는 대리인의 투자도 외국인투자관련 필수 조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고쳤다.

독일은 미국의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와 같이 국부펀드의 자국 기업 투자를 감시·제어할 수 있는 기구 설립을 추진 중이다. 독일은 또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국부펀드에 대한 대응방안을 찾으려 한다.

선진국들은 개도국 국부펀드로부터 자국 핵심 산업을 지키기 위해 입법을 서두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시장개방, 투자자유화를 강요하던 선진국이 자국의 사정이 다급해지자 보호주의로 돌아서는 꼴이다.

일본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국제 경험이 풍부한 박해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부펀드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국부펀드의 자산규모가 아직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데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장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높은 성장세를 바탕으로 국부펀드가 수익성 위주로 자산운용을 본격화할 경우 국제자본의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수익성 위주의 자산 운용은 국부펀드 자금이 안전자산→위험자산, 선진국 시장→신흥 금융시장, 미 달러화 자산→비(非)달러화 자산으로 이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체 효과는 국부펀드의 이동이 민간자금의 ‘군집(herd) 행위’를 동반할 경우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국부펀드의 투명성과 관련한 이슈도 주요 쟁점이다. 특히 이 논의는 중국투자공사 출범 이후 국제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인 행동규범이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본다. 펀드의 투명성은 비단 국부펀드뿐만 아니라 헤지펀드, 사모펀드, 연기금 등에 모두 걸려 있는 문제로 국부펀드에만 해당하는 어떤 장치를 마련하기는 힘들 것으로 여겨진다.”

증권연구원 김재칠 연구위원은 국부펀드 부상과 관련, “국내 금융기관들도 새로운 서비스 제공 기회로 삼아야 한다”면서 “국제 국부펀드의 흐름 변화를 주목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하우 축적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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