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논바닥.
수분이 촉촉이 배인 시골 흙의 푹신한 느낌, 밟아본 사람은 안다.
이 산뜻한 기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매일 걸을 수는 없을까.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긴 이가 있다. 한국 사람도 아닌 스위스인이다. 바로 칼 뮐러 엠베테(MBT)코리아 회장(56)이다.
그는 부드러운 자연 바닥의 느낌을 신발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MBT 신발은 판매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세계 24개국에서 600만켤레가 팔렸다.
최근 걷기 열풍과 맞물려 한국에서도 3년 만에 130여개 직영점이 생겼다.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MBT’ 브랜드를 언급했을 만큼 인기가 대단하다.
국내 창업계에서도 새로운 아이템으로 주목받고 있다. 칼 뮐러 회장은 한국과 어떤 인연을 갖고 있기에 시골 논바닥까지 경험했을까.
한국에서 부인 만나 정착
52년생인 그는 취리히공대와 대학원(기계공학)을 졸업한 엔지니어다. 한국과의 인연은 69년에 시작됐다.
고향 근처 페스탈로치 마을에 사는 한국인 박희천(인하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씨와 만나 친해졌고 같은 대학까지 다녔다. 그 인연으로 79년 한국으로 왔다. 문교부 국비장학생으로 한국어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때 자전거로 전국을 일주하기도 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휴교령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칼 뮐러 회장은 공부 대신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식자재, 등산용품, 자수기계 등 이것저것 수입했지요. 대학로에 ‘하이델베르그’라는 레스토랑도 열었어요.”
그는 한국에 스키를 처음으로 수입한 무역상이다. 82년 부인 고정숙씨(47)도 만났다.
한국이 제2의 고향이 된 칼 뮐러 회장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였고 레스토랑, 무역업 등 10여개가 넘는 사업체를 운영했다. 너무 과로했던 탓일까.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술과 스트레스 때문에 건강이 너무 나빠졌어요. 특히 위가 아파 여러 차례 쓰러지기도 했지요.
그때 경기도 의왕시 학의리 한옥으로 요양을 갔습니다. 추수가 끝날 무렵 갈아엎은 부드러운 논바닥도 이때 경험했지요.”
그래도 몸이 낫지를 않았다. 89년, 모든 사업체를 직원들에게 넘기고 스위스 고향 마을 로그윌로 돌아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깡촌’에서 농사만 지었다. 그동안 번 돈은 유럽의 마약환자 재활 돕기에 쏟아 부었다.
돈이 떨어질 무렵, 그는 한국의 논바닥을 떠올렸다. 이 느낌을 담은 신발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1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마사이족의 걸음걸이 응용
“인체공학을 공부하면서 편안한 걸음걸이를 연구했죠. 논바닥의 기억과 마사이족 걸음걸이를 접목시켜 96년 제품 개발에 성공했어요. 마사이족은 맨발로 생활하며 건강하게 평균 80~90세까지 살지요.
이름은 마사이족의 이름을 따 MBT(Masai Barefoot Technology)라고 불렀죠.”
일반 운동화보다 두 배가량 두꺼운 밑창, 반달처럼 동그랗게 휘어진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 신을 신어보면 매트 위를 걸을 때처럼 푹신푹신하다. 허리와 가슴이 펴지고 자세가 꼿꼿해진다.
“일반 신발은 발바닥이 뒤꿈치에서 발끝 순으로 두 번 만에 땅에 닿지요. 밑창이 둥근 MBT는 발바닥 바깥에서 뒤꿈치 발바닥 안의 순으로 세 단계로 살짝 굴리듯 발을 내딛게 돼요.
이 때문에 무릎, 허리에 충격을 주지 않습니다. 또 밑창이 바닥과 완전히 밀착되지 않기 때문에 몸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무릎, 허리 등 근육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운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는 스위스 한 양로원에서 노인들에게 신겨보았다.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었던 노인들이 편안하게 걷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게 됐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럽에서는 “의료보조 기능까지 갖췄다”며 호평받았다.
이 제품은 시쳇말로 ‘완전대박’이었다.
판매 첫해인 2003년부터 입소문이 나더니 2006년에만 200만켤레가 팔렸다. 누적 600만켤레 판매량을 기록했고 연매출 6000억원이라는 알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신발 품질 외 고속 성장 비결이 하나 더 있다. MBT는 각 매장에서 걸음걸이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신발을 파는 기업’이 아니라 ‘올바른 걸음법을 알리는 기업’이라는 마케팅 전략을 썼다.
MBT 매장을 ‘판매점’이 아닌 ‘마사이 워킹 센터’라고 이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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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향수업계에서 알아주는 사업가와 손을 잡았다. 문제는 그와 사업 철학이 달랐다는 점이었다.
“동업자는 판매를 늘리기 위해 라이프스타일 개념으로 신발에 접근했어요. 그러나 저는 철저하게 건강과 기능 위주로 접근했죠. 의견이 맞지 않으면서 2006년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한국과의 인연을 생각해 MBT코리아 지분만 남겨둔 채 글로벌 사업을 정리했다. 지분을 팔면서 수천억원대 엄청난 돈을 벌었다.
신앙심이 깊은 그는 ‘하나님께서 부족할 때마다 채워주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표현대로 교만했던 탓일까. 다시 시련이 닥쳤다.
“환율거래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손해를 봤지요. 그때 교훈을 얻었어요. 돈만 벌겠다고, 그것도 쉽게 벌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업도 공익에 맞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피트니스센터 이름은 한국말 기분(Kybun)”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강점을 갖고 있는데 자신의 경쟁력은 사업이라고 말하는 칼 뮐러 회장은 새로운 비즈니스를 선보였다. 바로 피트니스센터다.
이름은 ‘기분(Kybun)’. 기분 좋은 삶을 만드는 곳이라는 뜻으로 한국어에서 따왔다.
스위스에서도 ‘기분’이라는 이름을 쓴다. 스위스 고향에 옛 방앗간을 리모델링해 만든 10층짜리 본사 이름도 ‘기분타워’다.
‘기분’에서는 MBT를 신고 걷고 뛰기도 하고, 무릎관절·허리통증이 있는 이를 위한 맞춤형 걷기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일반 매트보다 반동효과가 커 몸에 무리가 적은 폴리우레탄 소재의 특수매트 ‘키바운더(Kybounder)’도 만들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동작 부족입니다. 너무 앉아 있어요. 저희 회사는 의자가 없습니다. 사무실 바닥에 ‘키바운더’를 깔아 전 직원이 선 채로 하루 9시간씩 일하지만 피로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서 있는 것은 걷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자세로 걸으면 아무리 오래 걸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불만이 있었던 직원들도 이제는 높은 업무 효율을 보이며 의자 없는 사무실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는 “키바운드 위에서 일할 때 미세한 근육들이 움직여 운동도 되고 집중력도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칼 뮐러 회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KM재단을 만들어 MBT 사업 아이디어를 준 아프리카와 한국의 고아들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