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이학렬 기자][(종합)]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걷은 세금 중 남은 금액(세계잉여금) 4조9000억원을 경기부양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재정부는 17일 세계잉여금 15조3428억원 중 5조4133억원은 지방교부세·교부금 정산으로 즉시 집행하고 나머지는 올해 중 적절한 시기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머지 금액 중 2조9788억원은 공적자금 상환에, 2조852억원은 국가채무 상환에 사용될 예정이다.

 이같은 내용이 담긴 '2007년도 일반회계 세입세출결산상 세계잉여금 처리안'은 이날 차관회의를 통과했으며 오는 22일 국무회의에 상정된다. 재정부는 남은 4조8555억원을 추경 편성을 통한 내수 진작에 사용하기로 하고 국가재정법 개정까지 추진할 방침이다.

 추경을 통한 즉각적인 재정지출은 경기를 부양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보도블록 교체 등에 재정지출을 사용한다면 낭비가 되겠지만 사회간접자본, 교육, 연구개발(R&D) 등에 재정을 지출하면 경기에 도움이 된다.

이영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5조원으로 예상되는 (추경) 규모가 적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용내역에 따라 (경기 부양) 효과는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추경을 통한 재정지출이 필요할 만큼 현재 상황이 절박한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다. 물가상승률이 4%에 육박하고 경기선행지수, 재고, 생산 등 경제지표들이 악화되고 있으나 수출은 여전히 호조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홍기택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국가재정법 취지는 추경을 중대한 일로 한정해 놓은 것"이라며 "경기 대응책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여유가 있다면 (세계잉여금을) 추경보다는 감세 재원으로 활용해 민간 부문의 활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광두 서강대 교수(경제학)는 "정부가 7% 성장을 공약으로 다급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급할수록 길게 보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추경 편성이 정부 생각대로 될지도 의문이다.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도 "국회로서는 추경보다는 감세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추경 편성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18일 열리는 당정청 협의회에서 조율돼야 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이명박 대통령의 판단에 달려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추경 편성 및 국가재정법 개정 문제는 미국 순방에서 돌아오는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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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렬기자 toot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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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다 돼 가는데, 스스로의 철학, 방향 제시는 보이지 않고 ‘참여정부’의 흔적을 지우는 데만 열심이다. 과연 앞선 정부가 해온 많은 일을 무산시키고, 거꾸로 가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철학이란 말인가. 좋은 답안은 스스로의 생각을 적어야지 지우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 과거 지우기 골몰하는 李정권 -

지우개 정부의 조짐은 도처에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위원회를 대거 없애버렸다. 사실 위원회는 큰 예산 들이지 않고 각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중요한 개혁과제를 수행하는 수단인데, 이를 해산해버린 것은 자충수다. 또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에서 유행하던 ‘로드맵’이란 말을 쓰기 싫어하고 “현장에 가봤어?”식의 현장주의, 실적주의 경향을 보인다. 전봇대 뽑기가 그 상징이다. 그러나 정부가 일을 하려면 철학이나 계획서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큰 그림 없이 현장주의에 매몰되다 보면 부지런하게 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결국은 낭패보기 십상이다.

살기 어렵다는 국민의 아우성 속에서도 참여정부가 참고 견디며 거품 일으키는 인위적 경기부양을 하지 않고 경제의 기초체력 보강에 주력해왔는데, 이명박 정부는 한두 달을 못 참고, 벌써 인위적 경기부양을 하겠다고 나선다. 과거 정부는 재벌의 폐단을 완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출자총액제한제, 금산분리 정책을 고수해왔는데, 이것도 허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첫 조각부터 1% 특권층의 정부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재벌왕국 건설에 나서고 있다.

교육의 3불정책은 문제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엄청난 부작용을 우려하여 역대 정부가 간신히 지켜왔는데, 이명박 정부는 자율이란 미명하에 대교협에 대학을 맡기고, 0교시 수업, 심야수업, 우열반 편성도 허용하겠다고 한다. 정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각자 자율에 맡겼을 때 이기적 행동으로 무질서, 부조리가 발생하니 그것을 막기 위해서 정부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앞으로 공교육이 후퇴하고 사교육비가 폭등하게 생겼다.

최근에는 혁신도시를 무너뜨리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데, 불과 몇 달 전 첫 삽을 뜬 국책사업을 이렇게 허물어도 되는 것인가. 참여정부는 극단적인 수도권 편중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 고사 직전의 지방을 살려보려고 발버둥쳤는데,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균형발전과 거꾸로 간다. 불과 한두 해 전에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현 정부가 부정한다면 국민이 어찌 정부 말을 믿겠는가. 정부의 공신력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

- ‘거꾸로’ 정책 실패땐 국민고통 -

원래 보수파는 웬만하면 기존의 것을 안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분명 보수정부인데,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희한한 보수다. 참여정부가 한 일도 제제다사들이 모여 오랜 토의, 숙고 끝에 추진한 것들이다. 이를 바꾸려면 역시 오랜 토의, 숙고가 필요한 것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단상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면전에서 “지난 10년 … 실패의 아픔” 운운하며 예의 없는 표현을 쓰더니 미국에 가서 “지난 몇 년간 한·미 관계가… 이념과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됐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를 지우고, 거꾸로 가려는 정부. 이것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성공 확률은 아주 낮다. ‘거꾸로’ 시도가 실패할 때 그것은 이명박 정부의 비극에 그치지 않고 국민도 함께 불행해질 것이다.

〈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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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문제를 놓고 통합민주당 지도부 사이에 파열음이 일고 있다. 오는 25일부터 내달 24일까지 잡힌 4월 임시국회에서 이를 처리해야 한다는 손학규 당 대표의 주장에 김효석 원내대표와 최인기 정책위의장 등 당 수뇌부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

급기야 김 원내대표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손 대표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고 직접 언급,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날 오후 전당대회 준비 태스크포스(TF) 팀 1차 회의를 열고 당 체제 재정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갈 길 바쁜 민주당이 난기류 속으로 빠져드는 모양새.

같은 날 손 대표는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끝끝내 함구했다.

이에 따라 오는 22, 23양일간으로 예정된 민주당 워크숍에서는 4월 임시국회 회기 내 FTA 국회 비준문제를 놓고 당 관계자들 간 난상토론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지난 16일 열린 통합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모습 ⓒ 통합민주당 
김효석 “손학규 대표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이 같은 불협화음은 지난 16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석상에서 감지됐다. 이 자리에서 손 대표는 “피해 산업에 대한 보상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면서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는 쪽으로 하자”고 제안한 뒤 “당내 토론 없이 대외적으로 처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최 정책위의장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4월 임시국회 FTA 처리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최 정책위의장이 최근 공개로 진행된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임시국회에서 (FTA를) 처리하지 말자”는 언급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 원내대표를 비롯 박상천 공동대표, 최 정책위의장, 김상희 최고위원 등이 입을 모아 손 대표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분위기가 험악해 졌으며 특히 김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정체성 문제까지 거론하며 손 대표를 압박했다는 후문이다.

김 최고위원과 같은 맥락에서 당내 대표적 개혁성향 인사로 분류되는 천정배 의원 역시 이튿날인 17일 기자들과 만나 “적어도 한나라당은 몰라도 민주당이 그래서는 안 된다. 4월 국회에서 (FTA를) 비준해 주자는 것은 당의 정체성과 거리가 멀다”고 쓴 소리를 내뱉었다.

이러한 분위기 탓인지 김 원내대표는 17일 기자간담회를 연 자리에서 “나도 경제학을 하는 사람으로 개방론자”라고 전제한 뒤 “FTA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처리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지에 대해 손학규 대표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뒤이어 김 원내대표는 “손 대표는 이번 (4월 임시) 국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고 내 입장은 지금 처리하는 게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라면서 “쇠고기 시장까지 개방하면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라고 4월 임시국회 회기 내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김 원내대표는 “오는 23, 24일 예정된 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 워크샵에서 의견을 모은 뒤 최고위원회의와 의원총회를 통해 이번 임시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 처리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손학규 함구 “이 자리는 TF회의자리”

같은 날 오후 ‘전당대회 준비 TF회의’에 참석한 손 대표는 이와 관련한 당내 상황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굳게 입을 닫은 뒤 “질문은 받지 않겠다. 이 자리는 TF회의자리”라고만 말했다.

한편 한나라당은 4월 임시국회 회기 동안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17일 재확인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날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미 FTA 비준동의안에 관해 손 대표는 찬성을, 김 원내대표는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어 민주당도 견해가 서로 나눠져 있는 것 같다”며 “이번 임시국회 회기 내에 반드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절충을 잘 해서 통과시키도록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재훈 기자

김재훈 (jhkim@dailyseoprise.com) 기자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13> 희소성 법칙

청정에너지 시스템 도입·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나서야

경제학에는 희소성의 법칙이 있다. 경제가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들이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바로 이 희소성의 법칙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이를 충족시켜줄 재화와 용역은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이 희소성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 경제 문제들은 항상 나타날 것이고 인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21세기 에너지 부문의 환경변화는 엄청나다. 기후변화에 따른 온실가스 저감이 그렇고 화석연료 고갈에 따른 유가인상이 그렇다.

이 문제는 시장경제하에서는 궁극적으로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당장 국민들이 당하는 에너지 공급량 부족, 이산화탄소(CO2)배출량 증가, 그리고 경제성장률 둔화 등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고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최근 지속가능개발이란 개념이 생겨나 경제성장, 환경보존, 에너지 안보란 세 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대안으로 환영 받고 있다. 지속가능개발이란 미래 세대들이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개발을 뜻한다.

특히 에너지 생산과 사용에 있어서 탄소 원단위 저감 문제가 지속 가능성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이산화탄소가 인위적으로 방출되는 온실가스의 70% 이상을 차지하며 이중 80%는 화석연료의 연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에너지 부문에서 가장 주된 관심사는 바로 이산화탄소의 배출량 억제다. 이를 해결하는 대책으로 화석연료의 저에너지가격 체제와 보조금제도의 철폐, 규제개혁의 가속화와 공정한 에너지 가격시스템의 정착 등이 거론되고 청정에너지 시스템 도입과 비탄소 에너지원의 사용 확대도 권장된다. 그리고 이산화탄소 포획에 대한 연구개발 강화와 에너지시스템의 탈탄소화 추진까지 주목 받고 있다.

이런 추진 과제들은 명확한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으면 실행되기 어렵다. 명확한 인센티브 제도는 사람들의 행동양식, 투자전략, 정책과 제도 등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기후변화 방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희소성의 법칙이 있기에 물가ㆍ실업ㆍ소득불평등이 일어나고 경제체제의 좋고 나쁨도 나타나며 환경공해도 발생하는 것이다. 희소성은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있음으로 경제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진오 에너지경제연구원 명예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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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신달자 ㅣ 민음사


섬세하고 화려한 문체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 우리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시인 신달자.

모두가 그녀의 편일 듯 승승장구 밖엔 모를 것 같은 그녀가 꼭꼭 감춰뒀던 어둡고 처절했던 그녀의 고통들을 고백한 에세이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를 써냈다.

제자인 '희수'에게 이야기 건네듯 써 내려간 에세이에는 짤막한 글의 길이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이 적나라하고 빼곡하게 쓰여있다.

명망 있는 경제학 교수였던 남편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고 하루 아침에 그녀는 세 아이의 가장, 간병인으로 혼신을 다해야 했다.

기사회생한 남편은 자유롭지 못한 몸이 되었음을 좌절하고 그로 인한 신경질과 우울증은 고스란히 신달자에게 전해졌다.

"그가 눈을 뜨고 정확하게 3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라는 말로 그녀는 그 당시의 수난을 전한다.

잠시의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이번엔 시어머니가 크게 다쳐 병상에 누우면서 그녀에게는 삶의 무게가 더해진다.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원망스러웠던 그때 그녀는 “사실 집단자살을 왜 생각하지 않았겠니”, “시어머니가 돌아가셔 준다면 조금은 짐이 가벼울 것 같다”는 고백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악다구니를 해댔다고 고백한다.

이런 지옥 같은 날 속에 종교는 지독하게 발목을 잡았던 삶의 무게를 이기는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또한 문학과 공부에 대한 열정은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에 진학하게 하고 글을 써 베스트셀러가 되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

24년이란 세월 동안 사연만 남겨준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인생도 잠시 평안을 얻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닥친 유방암 판정은 또다시 그녀를 절망하게 했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굴곡진 세월의 고통과 병마를 이겨낸 신달자의 담담하고도 격정적인 고백은 독자에게 '결국 영원히 싸우고 사랑해야 할 것은 삶'이라는 것을 전한다.

더럽고 치사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 바닥까지 고스란히 전하는 고통과 절망의 고백에서 독자는 인생의 또 다른 빛과 희망도 함께 할 수 있다.

[북스조선 임홍경 웹PD book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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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具學書 ▼ 194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 삼성 비서실 이사, 삼성전자 관리담당 이사, 신세계백화점 사장 ▼ 동아일보 ‘올해의 CEO 베스트 10’, 2007 한국의 경영자상(한국능률협회) ▼ 現 (주)신세계 부회장

“한국 기업가 중에서 진정한 시장주의자가 몇이나 될까?”

‘신동아’ 1월호 이 코너에 실린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의 말이다. 자유만 누리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우리 기업가들의 속성을 지적한 듯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있을 것 같아서 김 이사장에게 ‘자유인과의 대화’에 초대할 기업인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시장원리를 철저히 받아들이면 사업에 성공하기 힘들겠지요.”

기업가는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기업가의 성향에는 그 사회의 특성이 반영돼 있다. 한국 기업인들은 소비자에게만 잘 보여서는 안 됐다. 어떤 식으로든 공무원과 정치인에게 ‘보험’을 들어야 기업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기업인들이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업인들 중에 누군가 ‘자유인’으로 꼽을 만한 인물이 있을 것 같았다. 사회 탓하지 않고, 정부 탓하지 않고, 스스로 옳게 돈버는 일에 성공한 사람이 있을 법했다. 그러던 차에 워런 버핏의 오른팔 격인 찰스 멍거 부회장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신세계는 정말 놀라운 기업이다…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멍거가 부회장으로 있는 버크셔 해서웨이는 가치투자, 즉 정도(正道)를 걸으면서도 돈을 버는 기업에 투자하는 데 정통한 회사다.

신세계에 대한 정보를 뒤져봤다. 오너가 자진해서 천문학적 상속세를 납부했고 ‘윤리경영’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정부로부터 특혜 받을 생각은 없어 보이는 회사다. 가격혁명으로 소비자에게 엄청난 혜택을 안겨줬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윤을 내서 지난 10년간 주가가 20배 가까이 뛰었다. 이런 회사의 경영자라면 자유와 책임의 원리를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다는 약간의 의구심을 품은 채 신세계 전문경영인 구학서 부회장을 찾았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미술관처럼 보이는 남대문의 집무실에서 약간은 수줍게, 하지만 아주 반갑게 그는 우리 일행을 맞았다.

인화(人和)의 부작용

김정호 구 부회장을 ‘자유인과의 대화’에 모신 것은 생활신조나 경영방식이 ‘자유와 책임의 원칙’에 충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본 건가요.

구학서 자유와 책임의 원칙을 지키는 것, 남에게 의지하기보단 스스로 노력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런데도 제게 자유주의자라는 호칭을 주시니 오히려 민망합니다. 인류 최고의 가치인 자유를 어떤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김정호 구 부회장께서 온정주의를 배격하고 신세계페이 운동을 펼친 것을 보고 자유주의 철학을 가진 경영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온정주의에 주목 했고, 또 그것이 경영 성과에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구학서 온정주의 배격과 신세계페이 운동은 외환위기 이후 윤리경영을 도입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한국적 온정주의 문화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꿔야겠다는 필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온정주의는 ‘인화(人和)’라는 말과도 상통하는데, 좋은 말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도 큽니다. 협력회사와의 술자리, 동향·동문 출신끼리의 결속 같은 것이 그렇지요. 저는 인화에 의한 온정적 의사결정이 결국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킨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자기 몫은 스스로 계산하는 신세계페이 운동을 시작했죠.

처음엔 협력업체 관계자와 식사하면 무조건 그 비용을 신세계가 지급하게 했습니다. 밥이라도 한 끼 접대 받으면 그게 다 마음의 빚이 되어 제대로 의사결정을 못할 것 같았어요. 초기에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신세계 직원이 밥값을 내니까 그때까지 으레 밥값을 부담해온 협력업체 직원들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만나기를 꺼리게 된 거예요. 함께하는 자리가 줄어드니 아무래도 정보 얻기도 힘들고 업무에도 지장이 생겼죠.

고민 끝에 각자 내는 더치페이로 방침을 바꿨습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제법 더치페이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신세계페이 문화는 외부와의 관계뿐 아니라 회사 내부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엄청난 비용절감을 가져왔습니다. 대외협력비가 많이 줄었거든요. 애초의 의도가 온정주의 문화를 없애자는 것이지, 비용절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돈을 모두 직원들에게 돌려줬습니다.

김정호 그렇게 온정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구학서 물론입니다.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것과 남을 배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희는 직원들이 자기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을 적극 장려합니다. 기부는 연말에 회사 이름으로 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실 그 돈은 주주와 직원들의 것이잖아요. 그래서 신세계는 개인이 기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어요. 매달 직원들의 개인 기부를 통해 모아지는 기금이 1억원 정도이고, 여기에 회사가 매칭그랜트 형태로 지원하는 1억원을 합쳐 매월 2억원을 결연아동 생활보조금 지원, 환아 수술 및 치료비 지원, 장학금 지급 등 다양한 지원활동에 사용합니다.

“PL은 윈-윈 게임”

김정호 ‘신세계’ 하면 무엇보다 이마트의 성공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이마트가 시장경제원리에 매우 충실한 기업이라고 봅니다. 품질향상과 가격인하를 통해 소비자에게 기여하고, 그 대가로 이윤을 벌어들이니까요. ‘가격혁명’이라고 불릴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구학서 할인점은 시스템 싸움입니다. 발주 시스템, 물류 시스템이 아주 중요한데 이마트는 그런 시스템들이 잘돼 있습니다. 또한 초기에 좋은 부지들을 저렴하게 확보한 덕에 투자비용이 낮은 편입니다. 더욱이 점포가 많다 보니 대량구매에 의한 바잉파워(buying power)가 강하다는 덤도 있고요.

“시장점유율 높으면 소비자에 이익”

김정호 싸게 팔려면 싸게 사올 수 있어야 하겠죠. 가령 농산물의 경우 산지에서 받아오는 가격이 경쟁업체들보다 더 싼가요.

구학서 그렇습니다. 전체물량을 미리 한꺼번에 사거든요. 그래서 소비자에게 싸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미리 많이 사면 생산자는 행여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안정적인 가격으로 거래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와 생산자, 유통업체인 이마트까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거죠.

이렇게 마트가 소비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은 우리가 중소상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비난과 규제로 대응하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구 부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보다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를 활성화하고 세금 잘 내는 게 근본”이라고 말했다.

김정호 미국에서도 록펠러 같은 기업인들이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고도 경쟁자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욕을 먹었죠. 신세계의 경우 납품업자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이마트가 도입한 PL(Private Label, 자체 상표) 때문에 제조업체들이 아우성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만.

구학서 과장된 기사입니다. 이마트의 PL점유율은 10% 미만입니다. 90% 이상인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지요. 그리고 PL은 유통업체 간의 차별화를 위한 전략이지 제조업과 싸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어느 제조업체든지 유휴설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것을 이마트가 PL을 통해 고정적으로 가동시켜주면 해당 제조업체는 고정비용 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한 원가 절감은 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되죠. 결국 PL은 유통업체, 제조업체, 소비자 모두가 윈-윈 하는 전략입니다.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기 힘든 중소기업 제품의 경우 이마트가 신뢰성을 부여하고 인큐베이팅하는 기능도 하죠.

김정호 유통업에 대한 규제가 많은 편입니까.

구학서 꽤 그런 편이지요. 유통업은 시장 내에서 소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굳이 정부가 간섭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할인마트들은 인터넷 쇼핑, 모바일 쇼핑과도 경쟁하는 시대가 됐어요. 이마트만 해도 홈플러스나 롯데마트 같은 오프라인 업체들하고만 경쟁하는 게 아니에요. 하이마트, 지마켓 등이 모두 경쟁자이지요.

그런데도 정부는 한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좀 높아지면 바로 독점이라는 딱지를 붙여 규제하려 합니다. 지금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시장점유율이 좀 높다고 소비자가격을 올리는 등의 횡포를 부릴 수 있을까요? 유통업에선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기에 시장점유율이 높아져 거래의 규모가 커지면 오히려 가격을 더 낮출 수 있습니다. 제조업조차 이제 시장이 글로벌화해서 독점의 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시점에 와 있는데, 그보다 규모의 경제가 더 큰 유통업은 말할 것도 없지요.

김정호 마치 경제학 강의를 듣는 것처럼 논리적이고 재미있습니다. 이마트가 국내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중국에도 진출했는데, 한국과 중국에서 기업할 때 규제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구학서 중국에서는 아직 규제라고 할 만한 것을 못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외자기업이 지분을 50% 이상 못 갖게 하는 규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다 풀렸습니다. 규제 때문에 힘든 부분은 없어요.

김정호 올해 신년사에서 중국에 이마트를 1000개 만들겠다고 하셨더군요. 중국에 진출한 이마트들의 실적은 어떻습니까.

구학서 중국에 이제 겨우 10개 진출했습니다. 중국은 워낙 큰 시장이라 1000개가 충분히 진출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계속 집중투자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진출한 점포 중 절반이 이익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중국의 도시 개발 속도와 이마트 점포 개점 속도에 차이가 있어 고생도 했지만 이젠 별문제 없이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백화점 같은 할인점’

김정호 글로벌 유통기업들과 비교할 때 이마트는 어떤 강점을 내세워 중국 소비자에게 다가가고 있습니까.

구학서 외국의 할인마트들은 대개 창고형입니다. 또 가격이 싸다는 인상을 주려 노력하지요. 그러나 이마트는 가격 이외의 것들에도 신경을 써서 백화점 같은 할인점을 만드는 데 주력합니다. 포장에서부터 진열까지 모두 소비자(주부)에게 맞춥니다. 천장도 복개 공사를 해서 아늑한 느낌을 주려 하죠. 초기엔 공사비가 더 들지만 냉난방 비용까지 따지면 결국 비슷합니다. 작은 것에도 소비자를 배려했더니 반응이 좋았습니다.

가령 처음 이마트를 개장할 때 달걀 상품을 벌크(bulk)로 팔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깨지곤 했죠. 이로 인해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비위생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용은 좀 들지만 한국식 단위 포장으로 바꿨습니다. 중국 소비자들이 이걸 아주 좋아했어요. 이처럼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니 한국 기업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더군요.

김정호 한국의 유통기업들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구학서 이마트가 중국에 진출할 때는 현지 한족(漢族)을 점장으로 채용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 점장에게 인사, 구매, 관리 등 모든 업무를 맡겼습니다. 철저하게 그쪽 문화에 동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외국에서 성공하려면 브랜드 고유의 장점을 살리는 것만큼이나 현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직원 1명에게 나갈 비용이면 현지에서 20명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현지화는 비용절감과 현지 고객의 마음을 잡는 데 모두 유용하기에 꼭 필요하죠. 우리가 규모면에서는 아직 월마트의 30분의 1 수준입니다. 하지만 내부 효율과 상품관리 측면에선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고 자부합니다. 제 입으로 이마트 자랑을 하는 것이 민망합니다만.

김정호 하하, 그렇군요. 그럼 백화점은 어느 수준입니까.

구학서 백화점은 할인마트와는 좀 다르죠.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특정 매입’이라고 해서 장사는 입점업체가 하고 백화점은 브랜드 관리와 부동산임대업 기능만 합니다. 재고부담이 적어 경영상의 리스크는 적지만, 전체적인 마케팅과 세일이나 관리하지 백화점을 확실히 차별화할 전략을 세우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 신세계는 자주(自主) 편집매장(백화점에서 임의로 상품을 선정해 테마별 매장으로 만드는 것)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이제 우리 백화점들도 수익이나 관리 측면에서 예전보다 많이 나아져서 일본백화점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시찰을 나올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노력할 부분이 많지만요.

윤리경영의 힘

김정호 신세계가 국내 최초로 윤리경영을 도입했다고 들었는데, 그 핵심은 무엇인가요.

구학서 신세계는 대한민국 모든 제조업체와 거래하는 유통업체입니다. 또 전국의 소비자와 만나고요. 우리의 팬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적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약점이 있으면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유통업은 더 투명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반(反)기업정서가 팽배하다고들 하는데, 여기엔 재벌들이 기업을 물려줄 때 상속세를 제대로 안 내는 등 떳떳하지 못하게 행동한 것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금 깨끗하게 다 내고 이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3500억원의 세금을 냈지만, 앞으로도 세금 더 낼 일 있으면 다 낼 겁니다. 떳떳하고 깨끗하게 말입니다. 그게 신세계의 윤리경영에도, 반기업정서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김정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독자의 속도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좋지 않은 일로 공격 받는 경우는 있지요?

구학서 예, 억울한 일도 있습니다. 예컨대 시민단체가 1998년 광주 신세계의 유상증자 건과 관련해 우리 경영진을 배임혐의로 고발한 바 있습니다. 각 방송사가 9시 뉴스 헤드라인에 편법상속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로 밝혀져 기소조차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편법상속을 했다는 보도는 이미 다 쏟아져 나온 뒤였죠. 시민단체가 고발한 사실은 크게 다뤄놓고 막상 무혐의로 결정나자 어디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더군요. 그래서 더욱 윤리경영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지만, 정말 털어도 먼지 안 나오는 기업이 되어 보려고 합니다.

김정호 그런 윤리경영 시스템이 회사의 수익성에는 어떤 영향을 줍니까.

구학서 개인의 부정으로 얻은 이익은 회사 전체가 보는 피해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곧 경쟁력이 강한 조직입니다. 또한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윤리경영을 따르게 하려면 최고경영자부터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이마트가 월마트코리아를 인수하지 않았습니까. 월마트를 공개 M&A시장에 내놓았으면 우리가 인수한 것보다 1000억, 2000억원 정도 더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월마트가 이마트에 기업을 넘긴 것은 윤리경영을 하는 믿을 만한 기업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마트라면 직원들 고용승계는 물론 마무리 작업까지 깨끗하게 매듭지어줄 것으로 믿었던 거죠. 이런 것도 윤리경영으로 얻은 신세계의 경쟁력이라고 봅니다.

君君臣臣 父父子子

김정호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워런 버핏이 한국에서 가장 유망한 기업으로 신세계를 꼽은 걸 보고 놀랐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이번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기업이 수익을 내는 것과 사회공헌으로 자선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습니까.

구학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제적 책임, 윤리적 책임, 박애적 책임 등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기업은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 활성화하고 세금 잘 내는 게 근본이라고 봅니다.

김정호 구 부회장께서는 말단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거대기업의 CEO에 오르는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개인적 성공의 비결은 뭐라고 보십니까.

구학서 저는 머리도, 공부도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다 그럭저럭 했지요. 물론 공부가 사업과 많이 다르긴 해도 저는 정말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입니다. 제가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논어’ 안연 편)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이는 제가 실천해온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원일 때는 우수사원이 되려고 노력했고, 과장 때는 다른 과장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저 내 자리에서 성실하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큰 욕심이나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거다 하고 내놓을 만한 성공 비결은 없습니다.

김정호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구학서 돈 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돈을 버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듯해요. 벤저민 프랭클린의 삶을 그린 ‘덕의 기술’에 ‘최상의 행복은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서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을 사회를 위해 잘 쓰는 사람이 진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김정호 마지막으로 한국의 기업 환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구학서 기업가는 어떤 환경에서든 이익이 날 것이라고 예상되면 투자를 합니다. 정부가 좌파적인지 친기업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아무리 친기업 정부라고 해도 수익이 안 날 것 같으면 투자 안 하는 것이 기업가의 본성입니다. 요즘 제조업 투자가 부진한데, 그 근본원인은 공급과잉, 중국과 인도의 성장 등으로 투자할 곳을 못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서 해법 찾기

정부의 규제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정부가 기업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는 등 보조를 맞춰주면 좋겠지요. 그러나 정부가 굳이 나서서 투자를 유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결국 기업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좋은 투자처를 찾는 일인데, 이것은 기업 스스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특별히 기업하기 나쁜 나라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어떤 정부도 기업에 대해 돈 벌지 말라, 투자하지 말라고 한 적 없거든요. 기업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고 수익을 낼 투자처를 찾으려 고민해야 합니다.

얼마 전 정몽준 의원이 ‘우리나라는 기업친화적이라기보다는 시장친화적이라야 한다’고 했는데, 기업가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기업은 스스로 당당하고 깨끗하게 경영해야 합니다. 정부는 그런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하고요.

그의 말은 쾌도난마였다. 유통업계와 기업환경에 관한 지식에서부터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경영철학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거침이 없었다. 막힘없이 이어진 두 시간의 대화 내내 그가 보여준 것은 자유주의의 구체적 모습, 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영학이었다. 특히 마음에 든 것은 투자 부진을 반기업 정서나 정부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 문제의 해법을 내 안에서 찾으라’는 공병호 소장(‘신동아’ 2007년 11월호 인터뷰)의 자유주의 철학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깨끗하게 경영할수록 수익률이 높아진다는 그의 믿음에도 공감이 갔다. 하지만 그것은 경영자 자신에게 대단한 도덕률을 요구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깨끗하기를 요구하면서 나만은 적당히 살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살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높은 수익도 올릴 수 있고 타인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은 경쟁을 통해 소비자에게 기여하는 일이라는 생각, 또한 자선은 기업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하는 것이라는 원칙도 철저한 자유주의와 재산권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영방침이다. 기업 경영자가 다들 그런 도덕성을 지니고 그 정도의 수익을 낸다면 대한민국이 곧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세계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 hunghokim@hotmail.com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신동아]

요즘 소리 없이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큰손이 있다. 바로 ‘국부(國富)펀드’다. 귀에 썩 익은 용어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된 지가 몇 년밖에 되지 않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생소하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SWF(Sovereign Wealth Fund)’라고 한다. 영한사전에 따르면 ‘sovereign’은 ‘최고 권력을 가진, 통치권이 있는, 자주의, 최고의…’ 등의 의미다. 단어 뜻만으로도 이 펀드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월23~27일 ‘다보스 포럼’이 열린 스위스의 휴양도시 다보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은 연단에 올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게이츠 회장은 “선진국이 저개발국 국민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감동적인 연설을 해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블레어 전 총리는 “테러리즘, 기후변화, 물 부족 등 지구촌이 당면한 과제들을 극복하려면 정부, 기업, 시민단체 지도자들이 협력적, 혁신적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을 통해 즉시 보도됐다.

이들이 연설하는 동안 다보스 시내의 다른 곳에서는 몇몇 유력 인사가 조용한 회합을 가졌다. 핵심 사안을 논의하려면 언론의 눈길을 피하는 게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참가자 가운데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다. 흰색 다슈다샤(원피스형 아랍 전통 복장)를 입고 검은색 이칼(머리띠)을 맨 풍채 좋은 아랍 신사도 여럿 동참했다. 그들은 중동 산유국의 실력자였다. 서머스 전 장관은 침통한 얼굴로 미국의 경제상황을 설명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미국 금융회사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 금융계 전체에 난리가 났다”는 게 요지였다. 씨티그룹, 메릴린치,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미국 유수의 금융회사가 서브프라임모기지 때문에 입은 손실은 줄잡아 600억달러나 된다는 것이다.

유럽 금융 전문가들은 서머스 전 장관의 설명에 맞장구를 치면서 “유럽의 투자은행도 막대한 손실을 입기는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이들은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탓에 전세계 금융회사들이 당한 손실이 2000억~3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 전문가들은 산유국 실력자들에게 하소연했다.

“2007년 11월,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아부다비 투자청(ADIA)이 미국 씨티그룹에 75억달러의 긴급 자금을 공급한 점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ADIA도 씨티그룹의 최대 주주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을 것이다. ADIA 같은 산유국 국부펀드가 미국 및 유럽 금융회사에 더욱 활발히 투자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양측에 모두 이익이 된다.”

국부펀드 안건이 다보스 포럼에서 본격 논의된 것은 2008년이 처음이다. 국부펀드는 현재의 세계경제 난국을 돌파하는 열쇠로 요긴하게 쓰인다. 하지만 선진국 일각에서는 “국부펀드가 앞으로 미국 금융회사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성장하면 곤란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부펀드가 미국 및 유럽의 핵심 기업이나 부동산 등을 본격적으로 사들이는 상황을 걱정한다. 미국의 일부 극우세력은 “사막의 유목민들이 오일달러로 서방을 공략하면 중세와 같은 암흑기가 올지 모른다”고 경각심을 부추긴다.

외환 불리기

싱가포르 국부펀드는 ‘돈 될 만한’ 곳은 어디든 투자한다. 서울 강남의 스타타워 빌딩도 그 중 하나.

국부펀드는 각국 정부가 잉여 외화를 굴리기 위해 설정한 펀드다. 주로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중동 산유국들이 앞장서 국부펀드를 조성했다. UAE,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이 주인공이다. 1953년 쿠웨이트가 원유수출금을 재원으로 삼아 세운 국부펀드가 원조다.

싸구려 물건을 전세계에 수출해 벌어들인 외화를 1조5000억달러나 쌓아놓은 중국도 2007년 9월 2000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설정했다. 중국은 중국투자공사(CIC)를 출범시켜 이 자금을 관리하도록 했다. 러시아도 올해 국부펀드를 출범할 것으로 알려졌다. 싱가포르는 국부펀드를 운용한 지 오래다. 한국은 2005년 3월 한국투자공사법을 공포하고 이를 근거로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했다. 한국의 국부펀드인 KIC는 2006년 6월 한국은행에서 170억달러를 위탁받아 돈을 굴리기 시작했다. KIC는 이어 재정경제부에서도 30억달러를 받아 모두 200억달러를 관리한다. 2008년에는 정부로부터 추가로 100억달러를 받아 300억달러를 굴릴 예정이다.

각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라 곳간에 경화(硬貨), 즉 외환을 쌓아둔다. 이는 외환보유액으로 표시되고 대외지급능력을 나타낸다. 미국은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스스로 찍어내므로 외환보유액이라는 개념이 다른 나라보다 덜하다. 개발도상국은 달러, 유로, 엔 등 기축통화가 모자라면 국가 부도가 생기므로 외환보유액에 늘 신경을 쓴다. 한국은 1997년 12월 외환보유액이 거의 바닥나 외환위기를 맞은 바 있다. 이런 고초를 겪은 한국은 그 후에는 외환을 꾸준히 쌓아 보유액을 늘렸다. 2007년 말에는 2662억달러에 이르렀다. 외환은 가급적 안정적으로 굴린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수익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막대한 외환을 더욱 크게 불리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발상에서 국부펀드가 탄생했다. 산유국은 원유가 천년만년 생산되지 않음을 잘 안다. 지금 손에 쥔 오일달러를 불려야 미래 비전을 실천할 수 있으므로 국부펀드를 통해 고수익 재테크에 나섰다. 산업연구원 김계환 부연구위원은 산유국들의 국부펀드 운용에 관한 기고문(‘주간동아’ 618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한 자원 부국들의 전략은 2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산업적 다각화다. 경제의 자원수출 의존도를 줄여 외적 충격에 강하고 고용 창출력이 높은 산업구조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2015~2025년으로 예상되는 피크 오일(peak oil·세계 석유 생산량이 최고점에 이르는 시기)의 현실화에 대응해 새로운 경제성장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또한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으로 청년실업 문제가 점점 커지며, 이슬람 근본주의 부상과 같은 사회·정치적 압력이 가중되는 현실에 대처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포트폴리오 투자, 즉 위기에 빠진 선진국 금융기관과 기업을 인수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개도국들의 이런 움직임은 선진국의 보호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유럽의 가스 유통망을 장악하려는 러시아의 시도는 영국과 유럽연합의 반발에 부딪혔다.”

계속되는 성장세

국부펀드의 자금 규모는 공식 집계되지 않는다. 각국 정부가 보고할 의무도 없다. 따라서 세계 전체의 국부펀드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경제 전문기관들의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세계 30여 개국의 40여 개 국부펀드 규모를 모두 합치면 2조5000억~2조9000억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한 바 있다. 나라별로는 UAE 8750억달러, 사우디아라비아 3000억달러, 쿠웨이트 2500억달러 등이다. 독일계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셈법에 따르면 실제 운용되고 있는 세계의 국부펀드는 3조1000억달러, 곧 설립될 펀드를 포함하면 3조4000억달러다. 여러 기관의 분석을 종합하면 각국 국부펀드에 쌓인 돈은 3조달러에 달한다.

엄청난 금액이다. 기업 인수합병(M&A)에서 폭풍의 핵 노릇을 하는 사모펀드가 2조달러, 국제 금융시장에서 게릴라식으로 치고 빠지는 투자수법으로 고수익을 올리는 헤지펀드가 1조4000억달러임을 감안하면 국부펀드가 얼마나 큰 규모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세계 전체의 돈 흐름과 견줘보면 아직 대단한 금액이라 할 수는 없다. 전세계 은행자산은 63조5000억달러다. 그러니 국부펀드는 아직 은행자산의 5%에도 미치지 못한다. 투자펀드(21조달러), 연기금(17조9000억달러), 보험사 자산(16조달러)의 15~20%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국부펀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고유가 체제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 원유가는 2002년 이후 줄곧 상승했다. 막대한 오일머니가 중동 산유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IMF, 도이체방크, 모건스탠리 등은 국부펀드가 2012년엔 5조~8조7000억달러, 2017년엔 10조~17조5000억달러, 2022년엔 27조7000억달러로 급증하리라 추측한다. 세계 전체 금융자산에서 차지하는 국부펀드의 비중도 2007년 2.5%에서 2022년엔 9.2%에 달할 전망이다.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종합분석팀은 2007년 10월 ‘세계 국부펀드의 확대 배경과 향후 전망’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국부펀드의 확대가 세계경제 질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요지를 달았다.

‘개도국들의 국부펀드를 통한 선진국 주요기업 인수합병 등 전략적 투자 확대 우려가 확산되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국부펀드 운용의 투명성 제고 압력, 자국 기업 보호 확대 등 국부펀드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는 움직임.

고유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단기간 내에 해소되기 어려워 국부펀드의 성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따라 선진국 투자를 확대하려는 개도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선진국 간 마찰이 심화되면서 보호주의 확산 등 글로벌 투자여건이 악화될 가능성.’

세계 국부펀드 1인자, ADIA

걸프지역에 자리 잡은 UAE는 아부다비, 두바이 등 7개 토후국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다. 대추야자 열매와 양젖을 먹고 살던 유목민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솟아난 원유 덕분에 오일달러를 움켜쥐게 됐다. 7개 토후국 가운데 아부다비와 두바이에 원유가 집중적으로 매장돼 있다. 나머지 5개 토후국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오일달러를 효율적으로 굴려 원유가 고갈될 때를 대비한다. ‘중동의 쇼핑센터’라 불리는 두바이는 일찍이 상업 중심지를 지향했다. 미래에 원유가 마르더라도 두바이를 비즈니스 중심지로 성장시켜 자생적으로 굴러가도록 할 계획이다. 아부다비는 오일달러를 주로 국부펀드로 굴린다. 1976년 아부다비투자청(ADIA·Abu Dhabi Investment Authority)을 세워 국부펀드 관리 업무를 맡겼다.

ADIA의 자산은 8750억달러로 세계 최대의 국부펀드다. 해마다 수백억달러의 잉여 오일달러를 쌓은 금액이다. 여기에 투자수익, 이자 수입이 덧붙여져 금액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몇 년 후엔 1조달러를 돌파할 것이 확실시된다. ADIA에는 금융전문가와 사무직원 등 1400여 명이 근무한다. 미국 금융회사 씨티그룹에 75억달러를 투자해 세계 금융가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이미 여러 금융회사에 대주주로 참여해 ‘금융계의 큰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튀니지, 바레인, 이집트 등의 주요 은행에도 투자했다.

UAE 대통령이자 아부다비 토후국 통치자인 셰이크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흐얀(60)이 ADIA의 회장이다. 할리파 대통령의 동생인 셰이크 아흐마드는 ADIA의 최고경영자다. 이들 형제가 아부다비의 국부를 좌지우지한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2007년에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할리파 대통령의 총재산은 190억달러다. 하루 생산되는 원유 250만배럴에 대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 말이 ‘책임’이지 판매 대금을 운용하는 권한을 가졌다. 총재산 가운데 특기할 품목은 경주용 낙타로, 1만4000마리를 갖고 있다. 그가 태어나던 1948년에만 해도 아부다비에는 변변한 학교조차 없어 그는 가문에서 전통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싱가포르는 싱가포르 투자청(GIC), 테마섹 홀딩스 등 2개의 국부펀드를 갖고 있다. 이들 국부펀드는 지구촌 어느 곳이든 ‘돈 될 만한’ 곳을 노려 투자한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대형 건물인 파이낸스 빌딩과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건물인 스타타워 빌딩을 사들인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부동산을 헐값에 사서 비쌀 때 판다는 것이 투자 원칙이다.

싱가포르 국영기업들의 지주회사인 테마섹은 2007년 말 미국 유수의 투자은행 메릴린치 주식 44억달러어치를 사들여 지분 9.4%를 가진 대주주가 됐다. 올 3월까지 행사할 수 있는 옵션까지 포함하면 50억달러를 투자하는 셈이다.

돈 되는 곳은 어디든 노린다

1981년 설립된 GIC는 더욱 공격적이다. 지난해 12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자금난에 빠진 스위스의 투자은행 UBS에 11억달러를 투자해 지분 9%를 차지했다. 이어 GIS는 미국 씨티그룹에도 68억8000만달러를 투자했다. 자산 총액 3300억달러인 GIC의 달음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부동산 헤지펀드인 로젠 펀드에 3억달러를, 영국의 부동산 투자회사인 브리티시랜드에 1억3000만파운드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GIC는 세계 50여 개국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다. GIS가 투자하는 대상은 모두 일시적으로 ‘돈맥(脈)’ 경화에 걸린 우량 업체들이다. “위기 때 참여해야 큰 수익을 올린다”는 투자 상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신장섭 교수는 ‘싱가포르의 미국 사재기’(‘중앙선데이’ 2008년 1월20일자)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밝혔다.

“GIC는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의 수익률이 얼마인지 베일에 싸여 있다. 그러나 테마섹은 2004년부터 실적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테마섹의 32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18%였다. 장기간 이 정도 수익률을 올린 펀드는 세계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해온 결과다. 물론 이들의 투자 판단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앞으로 상황이 더 나빠지면 좀 더 기다렸다 사지 못하고 너무 빨리 들어갔다고 후회할 수도 있다. 테마섹의 경우 탁신 전 태국 총리가 갖고 있던 신코퍼레이션을 인수했다가 큰 손해를 본 전력도 있다.”

중국 정부는 중국투자공사(CIC·China Investment Corporation)를 설립해 2000억달러의 국부펀드를 굴리도록 했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1조달러를 넘은 지 오래고 해마다 2000억달러 이상이나 늘어나고 있다. 산유국의 오일 달러와 달리 중국의 외환은 수출로 벌어들인 것.

CIC가 출범하자 세계 금융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CIC의 투자 행태를 살폈다. CIC는 일단 조용한 걸음을 내디뎠다. 2000억달러 가운데 3분의 2는 중국 내 은행의 지분을 매입하는 데 사용했다. 아직 외국 기업에 대한 대규모 지분 매입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CIC는 2007년 6월 미국계 사모 투자펀드인 블랙스톤의 지분 10%를 30억달러에 사들여 주목을 받은 바 있다. CIC가 아직 정식 출범하기도 전에 사전투자 형식으로 이뤄진 일이다. 블랙스톤 투자 건은 난항을 겪고 있다. 투자 초기엔 블랙스톤의 주식 가격이 주당 29달러대였으나 신용경색 여파 탓에 20달러 수준으로 폭락했다. 투자금액 30억달러가 20억달러로 줄어든 셈. 이 때문에 중국 정계에서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중국, 일본도 설립

중국의 국영 에너지 업체인 해양석유공사(Cnooc)는 2005년 미국의 종합석유회사인 유노칼을 인수하려다 미국 내에 조성된 반대 여론 때문에 좌절한 경험이 있다. 미국에서는 “항공사, 통신업체, 에너지 기업, 기술업체 등 기간산업체를 외국에 넘기면 곤란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유노칼 인수 실패에 이어 블랙스톤 투자 불안이 잇따르자 CIC는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넌다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다 2007년 12월 미국의 모건스탠리에 50억달러를 투자했다. 일시적으로 자금 위기를 겪는 모건스탠리는 언젠가는 이름값을 할 투자은행이기 때문이다.

CIC의 초기 임직원은 중국인민은행에서 자리를 옮긴 20명이었다. 이들은 국제금융 거래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해외투자를 맡을 전문가를 모집하기 위해 신문 및 온라인 사이트에 구인 광고를 냈다. 리스크 분석가, 포트폴리오 운영자, 홍보 담당자 등 전문 인력 70명을 뽑았다. 포트폴리오 운영자를 해외 연수를 보내 선진 기법을 익히도록 할 계획이다. 이들은 앞으로 베이징에 머물면서 미국, 유럽, 일본 등의 금융시장을 대상으로 주식, 채권, 파생금융상품을 거래할 작정이다.

일본도 국부펀드를 설립할 가능성이 있다. 외환을 9000억달러나 쌓아둘 필요가 없다는 점이 그 이유로 꼽힌다. 만약 외환위기 상황을 맞더라도 일본은 선진국이어서 국제금융시장에서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 “보유하고 있는 거액의 외환을 너무 안정적으로만 굴리지 말고 국부펀드 형식으로 수익성에 중점을 두고 운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해 이를 줄여야 한다.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 사회보장비용이 많이 들 텐데 재정적자가 심각해지면 노인에게 줄 돈이 바닥난다. 국부펀드로 돈을 크게 불려 재정적자를 메워야 한다는 논리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본의 국부펀드 규모는 7000억달러 수준”이라 분석했다.

야누스의 얼굴

서방 선진국들은 중동 산유국과 중국의 국부펀드를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반반씩 가진 야누스로 보고 있다. 메릴린치, 씨티그룹, UBS 등이 자금난에 몰렸을 때 수십억달러씩 급전을 대준 국부펀드의 얼굴은 천사로 비쳤다. 그러나 국부펀드가 선진국의 통신, 에너지, 금융산업 등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경우 국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악마로 비친다. 선진국들은 개도국 국부펀드가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환율 개입, 공정경쟁 저해 등 국제경제 여건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하는 데 이용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국부펀드가 외국의 신문, 방송사를 인수해 여론에 영향에 줄 개연성도 걱정한다.

진석용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국부펀드에 대한) 국제 금융계의 환대는 잠시뿐이었고 지금은 국부펀드의 투자 활동에 대해 선진국들이 우려하고 있다”면서 “물론 그 기저에는 선진국들이 기득권을 누려오던 글로벌 경제가 점차 다원화하는 데 대한 불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선진국들은 국부펀드의 손발을 묶을 준비를 슬슬 하고 있다. 첫 번째 요구는 투명성을 높이라는 것. “국부펀드의 운용에 관한 정보가 부족해 루머가 난무하므로 시장이 불안해진다”는 것을 그 명분으로 내세운다.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이 국부펀드의 자산운용에 관한 국제적인 행동규범(code of conduct)을 제정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행동규범의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운용 목표, 투자전략, 운용결과 발표 등이다. 다른 나라 국부펀드의 속살까지 보겠다는 심산이다. 이와 함께 국부펀드가 미국 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엑손-플로리오(Exon-Florio)법을 ‘외국 정부 또는 대리인의 투자도 외국인투자관련 필수 조사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고쳤다.

독일은 미국의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와 같이 국부펀드의 자국 기업 투자를 감시·제어할 수 있는 기구 설립을 추진 중이다. 독일은 또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국부펀드에 대한 대응방안을 찾으려 한다.

선진국들은 개도국 국부펀드로부터 자국 핵심 산업을 지키기 위해 입법을 서두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시장개방, 투자자유화를 강요하던 선진국이 자국의 사정이 다급해지자 보호주의로 돌아서는 꼴이다.

일본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국제 경험이 풍부한 박해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부펀드의 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국부펀드의 자산규모가 아직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데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장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높은 성장세를 바탕으로 국부펀드가 수익성 위주로 자산운용을 본격화할 경우 국제자본의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수익성 위주의 자산 운용은 국부펀드 자금이 안전자산→위험자산, 선진국 시장→신흥 금융시장, 미 달러화 자산→비(非)달러화 자산으로 이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체 효과는 국부펀드의 이동이 민간자금의 ‘군집(herd) 행위’를 동반할 경우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국부펀드의 투명성과 관련한 이슈도 주요 쟁점이다. 특히 이 논의는 중국투자공사 출범 이후 국제적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인 행동규범이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본다. 펀드의 투명성은 비단 국부펀드뿐만 아니라 헤지펀드, 사모펀드, 연기금 등에 모두 걸려 있는 문제로 국부펀드에만 해당하는 어떤 장치를 마련하기는 힘들 것으로 여겨진다.”

증권연구원 김재칠 연구위원은 국부펀드 부상과 관련, “국내 금융기관들도 새로운 서비스 제공 기회로 삼아야 한다”면서 “국제 국부펀드의 흐름 변화를 주목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하우 축적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신동아]

물은 한 곳에 가둬두면 썩지만, 흐르게 하면 신선함을 유지해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소한다. 돈은 물과 같다. 돈이 몰려드는 곳을 우리는 시장이라 부른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라 사회구성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마련인데, 이기적인 행동을 못하게 막는다면 돈은 그것을 피해 달아난다. 그러나 정부는 공동선(共同善)을 이룩한다는 명분으로 그런 이기적 행동에 제동을 걸려고 한다. 정부의 이런 손을 흔히 ‘규제’라 부른다. 사회주의는 체제 자체가 이걸 주(主) 임무로 삼는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도 모순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게 바로 세상의 이치이고 시장의 원리인데, 그걸 막겠다고 정부가 나서니 잘살 수가 없는 것이다. 북한과 쿠바가 못사는 이유를 보면 이는 확연해진다.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규제완화가 급선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각자가 제 이익을 찾아 행동하도록 내버려두면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를 가장 싼값으로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을 테니 이것이 선(善)이 아니고 무엇인가. 공생의 원리도 결국 이런 것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시장경제가 양극화의 주범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경제발전이 빈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공통된 견해다.

공생의 원리 구현하는 시장

공생의 원리가 시장의 영역에서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의 세계,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권자에게 선택받으려면 그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예술가는 대중이 아직 본 적이 없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참신한 미(美)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그들의 감성을 자극해야 한다.

세상엔 두 가지의 공생이 존재한다. 하나는 동양인이 전통적으로 인식하고 지켜온,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인 공생이다. 다른 하나는 나도 잘살고 남도 잘살게 하려는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공생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이 시대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유효하고 이 시대 사람들이 원하는 공생 방법일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란 적극적인 공생 노력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던가. 그렇다면 시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이다.

시장은 개인의 삶에 토대를 제공할 뿐 아니라 공생의 터전도 마련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국력 또한 시장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시장은 끊임없이 변한다. 거래되는 물자와 서비스가 변하고 가격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장은 역동적이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근대경제학은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정부의 시장 개입에 반대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경제 주체가 건전한 사회제도하에서 사전 조정 없이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면 가격기구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국민경제는 질서가 잡히고 부(富)와 번영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자유방임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됐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돈과 물자, 인력이 물 흐르듯 흐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2007년 4월 두바이를 방문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예비 후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 뿐 아니라 돌고 돈다. 생명의 기반이 되는 물의 순환은 바로 이 같은 물의 성질에 따른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순환은 타인과의 교류를 의미한다. 돈 또한 돌고 돌면서 부를 증진하고 가난을 퇴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방은 자유와 다를 바 없다. 굳이 그 차이를 따진다면 자유는 내적인 자기표현, 개방은 외적 자기 표출쯤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

시장은 품질과 가격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작동되는데,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이 가격이다. 누구나 품질과 가격에 자신이 있다면 시장에 참가할 수 있다. 그게 시장 참가자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장은 한껏 열려 있다.

“세계도시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

자유와 개방이야말로 경제발전과 인간의 삶의 질 향상에 필수적이란 사실을 두바이만큼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20여 년 전, 동양과 서양을 잇는 걸프 만에 위치한 교통요지, 더 정확히 말하면 런던과 싱가포르의 꼭 중간지점에 있는 이 도시를 항로 관계로 우연히 지나친 적이 있다. 당시엔 너무나 한산해 이름마저 생소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몇 년 전, 파키스탄을 거쳐 이집트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른 두바이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들 스스로 “이제 두바이는 세계도시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라고 할 정도다.

공항부터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세계 각국의 명품이 화려한 진열장에서 빼어난 자태를 드러내고, 아랍 국가답지 않게 히잡을 쓴 아랍 여성이 남자와 함께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등을 훤히 드러낸 외국 여성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아랍 국가는 고유 종교인 이슬람을 지키기 위해 폐쇄적이라는 선입관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알고 보니 두바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했던 것이다. 국적이나 종교, 언어에 대한 차별도 없앴다고 했다. 심지어 외국인에게 이슬람에선 금기하는 술과 돼지고기까지 팔고 있었으며, 신앙의 자유가 허용돼 각자의 예배 공간을 둘 수 있다고 했다.

물 흐르듯 돈이 흐르게 하겠다는 두바이의 개혁 전도사 셰이크 모하메드 국왕의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듯, 두바이는 전세계의 돈과 상품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 두바이를 북아프리카,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일대의 금융, 무역, 비즈니스, 쇼핑, 관광, 컨벤션, 문화의 중심지로 키울 계획이다.

제한이 없기는 투자 및 외화 송금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게 빠지면 금융허브의 꿈이 어찌 이뤄지겠는가. 금융·외환 부문의 개방은 중동에 처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동(東)지중해의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레바논에서도 외화 소지가 자유롭고 어디서나 환전이 가능하다.

레바논의 이런 전통은 기원전 1200년경 한때 해상무역으로 번성했던 페니키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곳에서 만난 레바논 사람들은 대부분 쾌활하며 자신감에 넘쳤고 무엇보다도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국적이나 인종에 괘념치 않는 듯했다. 누군가는 필자에게 “우리는 무역에 능했던 페니키아인의 후예로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다”라고 했다.

고대 문명이 모두 큰 강 유역에서 발생한 것은 비옥한 충적토가 있는 강 하류 지역이 정착과 농경의 적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변 지역은 원거리 교역에는 불리했다. 시장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확대되지 못해 그들이 필요한 것을 모두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도 점점 활기를 잃어갔다. 그래서 문명의 중심지가 모든 게 모이고 흩어지는 바다로 옮겨갔다. 그 첫 무대는 동지중해. 지금의 시리아 서부와 레바논 일대로 그 주인공이 바로 페니키아인이었다.

세금 면제, 학비 전액 무료

세계 금융의 메카인 맨해튼은 바위땅에 설립된 도시다.

약 300년간 존속한 페니키아 문명은 인류 최초의 해상상업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지를 상대로 활발한 교역활동을 벌였다. 비록 중개무역이었지만 원거리 민족과의 효율적인 거래를 위해서는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종래의 메소포타미아 설형문자나 이집트 신성문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표음문자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알파벳의 원형이라 불리는 ‘페니키아 알파벳’이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페니키아인은 한동안 지중해 무역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두바이에는 또 세금이 없다. 터키와 그리스가 남북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키프로스도 외국 자본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한다. 세금이 없으니 돈이 모여드는 게 당연하다. ‘조세 천국(tax heaven)’이라 불리는 라이베리아나 케이만 제도, 버진 아일랜드, 버뮤다 등은 그 좋은 예다.

두바이가 있는 아랍에미리트는 정말 작은 나라이고, 1971년에야 독립했으니 신생국가나 다름없다. 국력은 영토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다. 시장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자와 사람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문화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하는데, 큰 시장을 가진 나라는 자연스레 강국이 된다. 그러므로 강국이라고 해서 반드시 영토가 넓은 나라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영토가 작고 인구가 적어도 강국이 될 수 있다. 이를 흔히 ‘강소국’이라 부른다.

기업이든 나라든 자기가 잘하지 못하거나 아예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업체에 맡기곤 하는데, 이를 아웃소싱이라 한다. 자금과 인력도 아웃소싱이 가능하다. 두바이는 부족한 자금을 아웃소싱하기 위해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뿐 아니라 금융거래에서 세금과 규제를 모두 없앤 것이다(해외자본 유치 정책을 ‘open sky policy’라 부른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최신 관리 노하우는 선진국의 것을 빌려 쓴다. 명품 메이커, 세계적인 도시계획자, 금융전문가, 미술관 설계자 등을 초빙하거나 그들에게 운영 권한 일체를 넘기는 것이다. 이제 이 도시에는 80개나 되는 외국인 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어디서나 유럽인과 미국인, 인도인, 러시아인, 아랍인, 한국인, 중국인, 이란인, 베트남인, 필리핀인 등 세계 각국 사람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두바이 경제는 석유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석유 매장량도 그리 많지 않아 조만간 동이 날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 나라를 건국한 라시드 국왕은 이미 1966년(유전도 1966년에 발견됨)에 ‘비전 2010년’을 세워 “2011년에는 오일달러에 대한 경제의존도를 제로로 만들겠다”며 학교, 병원, 도로망 등 인프라 구축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인재 육성만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며 학비를 전액 무료로 하는 조치도 취했다.

‘없으면 있게 하라’

이러한 인재 육성 프로젝트는 요르단에서 먼저 시작됐다. 중동국가 중 몇 안 되는 비산유국인 요르단은 일찍이 교육에 투자해 쿠웨이트 등 걸프 산유국에 인력을 공급해 1970~80년대에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인 바 있다. 당시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는 주택 건설 사업이 붐을 이뤘는데, 우리 건설사들이 큰 구실을 했다. 지금 코트라(KOTRA)가 입주해 있는 암만의 ‘피라미드’ 빌딩은 쌍용건설이 지은 것이다.

모하메드 국왕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는 일이다. ‘비전 2020년’을 통해 그는 철저히 아버지 라시드 왕의 뜻을 따르고 있다. 천연자원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큰 자산이라 믿기 때문이지만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또 사람을 가려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면담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이 그의 집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불쑥 나타나 면담을 청해도 만나준다고 할 정도다.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여러 사람에게 전하고 두바이에 관심을 갖게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카리스마가 아니라 설득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평양의 리더십과 대조를 이룬다. 한쪽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세계를 상대로 경쟁함과 동시에 교류협력을 강화해 국력을 키우고, 내부적으로는 국민에게 자기가 제시한 길로 함께 가자며 국가를 번영시키려 한다. 다른 한쪽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내부를 보여주는 것은 치부와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외국과의 교류를 삼가고 모든 문제를 자력으로 풀어가자며 국민을 힘들게 한다. 그리고 국가마저 빈궁으로 끌고 가고 있다. 다시 말해 ‘궁핍의 정치’를 통해 국민이 딴생각을 하지 못하고 입에 풀칠하는 일에만 신경 쓰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고도 과연 ‘인민민주공화국’이라 할 수 있을까.

두바이가 대외개방을 추진하면서 교류협력까지 강화하는 것은 필요한 자금과 물자,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만은 결코 아니다. 외국과의 교류는 세계 속에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또 그들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가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서비스함으로써 자신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으니 말이다.

아랍 지역은 지금은 석유가 생산되어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원래는 척박한 땅이라 살기 위해서 일찍이 장사를 하거나 무역업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중세기에 탄생한 유명한 이야기모음집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일등항해사 신밧드가 아랍에미리트 남쪽의 오만 출신이라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또 이웃 사우디의 왕족 등 최고의 엘리트들은 언제든지 사막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중동지역을 여행하면서 확인했다.

암스테르담 본뜬 뉴욕

1년에 한 달씩 라마단(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단식)을 지키는 것이나 종종 사막 속에 텐트 가옥을 짓고 한동안 지내면서 양을 잡아 ‘캅사’라는 밥을 배불리 먹고 매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 좋은 예다. 매 사냥은 언뜻 보기에 사치의 극치를 달리는 것 같지만 인내와 신중함을 단련하는 훈련으로는 최고라고 한다. 그리하여 환경이 바뀌면 언제라도 거친 옷, 거친 음식으로 돌아갈 마음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사막에서 야성을 길러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두바이인들은 ‘없으면 있게 하라’를 모토로 삼았고, 두바이는 ‘무엇이든 가능한 땅’이 되었다. 덕분에 세계는 두바이가 이룩한 놀라운 성과에 주목하고 있다. 메마른 초원을 돌며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들에게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최고’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게 한 결과 황량한 사막이 세계 금융의 허브, 이색관광지, 명품 쇼핑장 등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런 야성에 개방성과 융통성이 덧붙여진 결과라 해야 할까. 그들은 사막이란 지형을 훌륭한 도시 공간으로 만들었다. 라시드 국왕은 해안 수로인 크리크(Creek)를 건설했고, 지금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7성(星)급의 부르주 알 아랍 호텔이 막바지 공사 중이다. 돛배 형상으로도 보이지만 원래는 사막의 꽃을 이슬람 건축에 접목한 것이다. 그 자체로도 놀랍지만 최종 높이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국가기밀이라는 것이다. 바다를 메워 그토록 높은 초고층 건물을 건설하려는 것도 ‘두바이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악조건을 무릅쓰고 악착같이 최고의 높이로 건설하려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에펠탑 없는 파리를 누가 찾겠는가.” 부르주 알 아랍이 두바이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작은 나라지만 통은 무척 커 보인다.

또 앞바다에선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 ‘팜 아일랜드’와 세계지도 모양의 ‘더 월드’ 공사가 2010년 완공을 목표로 분주하다. 지형은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들을 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지형을 바라보는 시각과 활용하는 기술, 그리고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그 형태는 말할 것도 없고 용도마저 달라질 수 있는 모양이다.

이런 예는 예전에도 더러 있었다. 바다보다 낮은 땅을 관개해 삶의 터전으로 바꾼 네덜란드인들이 우선 그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겨난 암스테르담은 한때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항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런 암스테르담의 예에 따라 건설한 도시가 뉴욕의 맨해튼이다. 뉴욕의 옛 이름이 바로 뉴암스테르담이었으니까. 이제는 세계 금융의 메카가 된 맨해튼의 월가(Wall Street)는 옛날 성벽이 세워졌던 곳을 일컫는다.

통일비용 절감 방안

그런데 맨해튼의 토대는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바위로 되어 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살지 않는 쓸모없는 땅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이곳을 차지했을 때는 해상무역이 한창 빛을 발하던 시기라 오피스 공간이 절대 필요했다. 그런 오피스 빌딩을 건설하는 데 단단한 바위 지반이 안성맞춤이었으니 지금 그곳에 100층이 넘는 마천루가 서 있는 것이다. 초고층 빌딩이야말로 업무용으로는 최고의 효율성을 발휘하지 않는가.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도 바뀌고 사회도 바뀌고 국가도 바뀔 수 있다. 성경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자유와 개방!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개념일 것 같지만 최근 10년간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서도 자유와 개방, 그리고 시장의 기능을 제대로 살릴 임무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동포이면서 특수한 관계에 있는 북한에 대해서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일방적으로 제공하거나 지원하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그것들을 구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게 그들에게도 득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그럴 것이고. 다시 말해 대북정책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얘기다. 북한을 자유화하고 개방으로 이끌수록 북한 주민의 삶의 질도 나아질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통일비용 절감에도 이바지할 터니 말이다.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신동아]

가히 ‘경제만능시대’인 듯하다. 이명박 대통령후보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슬로건을 집요하게 내세워 당선됐다. 동창회 모임에서도 펀드 투자 이야기가 주요 화제다. 중학생 정도면 친구들끼리 “너희 아빠는 연봉이 얼마냐?”고 묻는다. 서점의 경제·경영 서적 코너는 남녀노소로 북적거린다.

대학에서도 경영학 과목은 인기가 최고다. 수강 인원이 제한돼 있어 인터넷 수강신청에 성공하려면 운수가 좋아야 한다. 경영학을 부전공, 복수전공하려는 대학생이 급증하고 있다. 최소한의 경제·경영학 지식이라도 알아야겠다고 작심한 학생이 수두룩하다. 이공계 전공 학생들도 경영학 강의실을 기웃거린다. 음악, 미술, 체육 등 예체능계 전공자들도 예술 경영, 스포츠 마케팅에 관심이 많다며 경영, 경제학 강의에 관심을 보인다.

고려대 철학과에서 있었던 일이다. 철학과 전공과목에서 줄줄이 A+ 학점을 받는 우수 학생이 늘었다. 지도교수는 “인문학이 위기를 맞았다지만 학생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니 그 진단이 잘못된 것 아닌가”하며 흐뭇해했다. 그러나 그 교수는 최우수 학생을 불러 격려하다 허탈감에 빠졌다. 학생으로부터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신청하려면 학점이 좋아야 하므로 철학 공부에 몰두했다”는 말을 들어서다.

직장인 서가에도 ‘맨큐의 경제학’

경제학의 바이블로 통하는 ‘맨큐의 경제학’을 쓴 하버드대 그레고리 맨큐 교수.

한국 대학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선진국 대학에서도 경영학 강좌와 경제학 기초 과목은 큰 인기를 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는 경제학원론 강의에 학생들이 몰려들어 40개 강좌를 개설했다. 호주 멜버른대 교직원은 경제학원론 기말고사의 응시생 1000여 명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대형 강당을 물색하느라 곤욕을 치른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맨큐의 경제학’은 전세계 경제학도에게 바이블처럼 읽힌다.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 체코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루지아어, 러시아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됐다. 1960년대에 선풍을 일으킨 ‘위대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교수의 저서 ‘이코노믹스’보다 ‘맨큐의 경제학’ 위력은 글로벌시대를 맞아 훨씬 센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근 대기업 임원 A씨는 건축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아들의 책상 위에 놓인 ‘맨큐의 경제학’(김경환·김종석 옮김, 교보문고)을 발견하고 놀랐다. 경제학 서적치고는 표지 디자인이 화려하기 때문이었다. 내용을 훑어보니 컬러 사진과 그래픽이 그득했다.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A씨는 요즘도 손때 묻은 ‘경제학원론’(조순 지음, 법문사)을 가끔 들춰본다. 청년 시절에 경제학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준 소중한 길라잡이였고 그 내용이 여전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1974년 당시 조순 서울대 교수가 저술한 이 책은 다양한 사례와 깔끔한 편집으로 출판되자마자 경제학 서적 분야를 평정했다. 그 후 20여 년간 유사 서적의 추종을 불허했다. 영어 참고서 분야에서 ‘성문종합영어’가 누린 지위와 비슷했다.

A씨는 34년 전에 출판된 그 책 초판과 맨큐 책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세상이 크게 변했음을 실감했다. A씨도 ‘맨큐의 경제학’을 샀다. 아들 것은 3판이지만 자신의 것은 2007년 1월에 나온 4판짜리다. 회사 사무실에 갖다 놓고 틈틈이 읽는다. ‘맨큐의 경제학 연습문제 풀이’(김경환·김종석 옮김, 교보문고)도 사서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부터는 복습문제와 응용문제를 풀어 해답집과 비교하며 공부할 작정이다. A씨는 회사 직원 몇 명에게도 이 책을 선물로 줬다.

동아일보 경제부, 산업부 기자들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 열중하는 편이다. 독서 동아리를 만들어 새벽 일찍 출근해 ‘맨큐의 경제학’을 공부했다. 집에서 각자 읽고 와서 토론하고 한국의 현실 문제와 연결시켜 해법을 찾았다. 1032쪽에 달하는 두툼한 이 책을 뗀 공력을 바탕으로 화폐금융 분야 전문서 ‘미쉬킨의 화폐와 금융’(이상규 옮김, 한티미디어)도 독파했다. 이 책 역시 802쪽이나 돼 기자들의 가방이 더욱 무거워졌다. 공부 동아리 모임에 꾸준히 참여한 이나연 기자는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때 독서 덕분에 큰 도움을 얻었다”고 말했다.

맨큐 교수의 저서가 경제학 입문서로 왕좌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화려한 학력부터 눈길을 끈다. 프린스턴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몸담고 있으니…. 그는 소장 교수 시절부터 학생들을 지루하지 않게 잘 가르쳐 ‘베스트 티칭’ 상을 여러 번 받았다. 그의 강의를 정리한 노트가 다른 학교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그는 출판사로부터 거액의 선금을 받고 경제학 입문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책이 나오자 경제학계와 언론계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경제 이론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풍부한 사례와 비유를 사용해 경제학 기본원리를 잘 설명했다”는 호평을 얻었다.

예컨대 임금 차별에 대해 설명할 때 농구선수 샤킬 오닐과 영화배우 짐 캐리가 고소득을 얻는 이유를 사례로 들었다.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가 1931년에 받은 연봉 8만달러는 요즘 선수의 연봉과 비교해서 많은 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물가수준과 화폐가치를 설명한다.

한국어 번역판은 매끄럽게 잘 정리됐다. 여러 신문에서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며 문장력을 인정받은 김경환 서강대 교수와 김종석 홍익대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결과인 듯하다. 공동 번역자는 처남 매부 사이인데다 프린스턴대 동문이기도 해서 호흡이 잘 맞았다. 잠시 강단을 떠나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자리에 앉아 있는 김종석 교수는 딱딱한 경제학 이론을 재미있게 풀이하는 것으로 이름났다. 그는 “교수 생활 초기부터 언젠가 좋은 경제학 입문서를 쓰리라고 마음먹었는데 맨큐 교수의 책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맨큐에 도전하는 한국 토종

조순 전 서울시장이 쓴‘경제학원론’은 34년째 사랑받고 있다.

조순 교수의 ‘경제학원론’은 법문사에서 2000년까지 출판됐다. 그 후 율곡출판사로 판권이 넘어가 개정판이 나왔다. 초판이 나온 1974년 3월 저자는 서문에서 “다섯 수재 제자의 도움을 받았다”며 그들의 실명을 밝혔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다섯 수재는 모두 역량 있는 경제학자로 성장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수석으로 발탁된 김중수 박사와 노무현 정부 초기에 청와대 수석으로 활동했던 이정우 교수 등이 그들이다. 법문사에서 4판을 찍을 때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공저자로 참여했다.

법문사는 조순·정운찬 공저 ‘경제학원론’의 후속편을 마련했다. 책 제목도 똑 같은 ‘경제학원론’(이준구·이창용 지음, 법문사)이다. 이 책은 ‘맨큐의 경제학’에 자극 받아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쓴 새로운 차원의 경제학 입문서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 책이 좋은 반응을 얻자 저자들은 ‘경제학 들어가기’(이준구·이창용 지음, 법문사)를 썼다. 경제원리를 더욱 쉽게 설명한 책이다. 저자인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창용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학력으로도 맨큐 교수에게 뒤질 것 없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저자들은 ‘경제학 들어가기’ 개정 2판 머리말에서 “외국 경제학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재미없는 책을 썼기에 그런 말이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외국의 사례를 들어 외국 사고방식에 맞는 방법으로 설명한 책은 어차피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저자들은 또 “그런데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는 뜻”이라면서 “이제는 외국 책으로 경제학에 입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자유주의 강조한 입문서도 눈길

이준구·이창용 교수의 ‘경제학 들어가기’.

이 책은 실제로 재미있고, 한국인 사고방식에 맞게 집필됐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다. 토씨 하나도 적확하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화려한 컬러 사진이나 세련된 그래픽은 맨큐 저서를 능가한다. 곳곳에 ‘생각해 봅시다’란 작은 박스형 글을 실어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경제원리를 쉽게 설명했다. 읽을거리 글로 ‘좋은 음식점을 고르는 방법’ ‘다이어트 열풍’ ‘놀아야 경기가 살아난다’ 등을 곁들였다. 흥미진진하게 읽다 보면 어느덧 경제원리를 깨우친다. ‘경제학 들어가기 연습문제와 해답’(이준구·이창용 지음, 법문사)이란 자습서를 옆에 놓고 보면 적잖은 도움을 얻는다. 제대로 책을 이해했는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식(數式)을 써서 경제 이론을 주로 설명하는 경제학자 대부분은 문장력이 달리는 편이다. 문과 재능보다 이과 재능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고급 경제학 논문을 보면 글보다는 수식이 더 많다. 계량경제학 논문은 거의 수식으로만 이뤄져 수학 논문을 방불케 한다. 문장으로 쓰면 장황하게 서술해야 할 내용이 수식이나 그래프로는 일목요연하게 요약된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경제학자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정황이 이해되지 않는가.

연세대 상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윤석범 명예교수와 김학은 교수는 문장가로 예우 받는 학자들이다. 두 교수 모두 역사, 종교, 철학, 문학 등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윤 교수는 화가로도 활약한다. 시야가 넓고 상상력이 풍부한 학자임을 알 수 있다. 계량경제학을 전공한 윤 교수는 ‘경제사상의 흐름: 그 시대, 그 사람, 그 학설’(윤석범 지음, 세경사)이란 저서에서 절제된 문장의 진수를 보여줬다. 화폐금융론이 전공 분야인 김 교수는 ‘폰지게임과 베짓처방’(김학은 지음, 전통과 현대)에서 현란한 비유법을 구사했다.

호방한 성격의 이들 교수는 멋진 경제학 서적을 함께 쓰기로 의기투합했다. 그 첫 결실이 ‘새 거시경제학’(윤석범·김학은 지음, 세경사)이다. 이 책은 경제학의 흐름을 명료하게 설명했다. 계량 연구방식에 정통한 저자들의 서술 솜씨가 돋보인다. 경제학 이론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으므로 문장의 멋을 나타낼 여유는 없다.

“경제원리 활용해야 선진국 된다”

글솜씨가 좋은 윤석범·김학은 교수의 ‘새 거시경제학’과 ‘자유주의 경제학 입문’.

저자들은 ‘자유주의 경제학 입문’(윤석범·김학은 지음, 세경사)이라는 846쪽짜리 두툼한 책을 냈다. ‘자유주의’란 말이 붙은 이유는 머리말에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해서 경제를 발전시켜야 국민은 격앙가를 부르며 편안하게 산다는 논리다.

“국가는 여전히 영토를 벗어날 수 없지만 시장은 전세계를 영토로 삼고 있다. 교회가 전세계에 성경 하나를 들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듯이 시장은 상품 하나를 들고 전세계를 찾아간다. 전에는 국가와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한 국가가 선진 강국이 되었듯이 앞으로는 ‘국가와 시장’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는 국가와 국민이 선진강국이 될 것이다. 국가와 교회의 시절에는 신학이 중심이었듯이 국가와 시장의 시대에는 경제학이 중심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인문학 소양을 충분히 발휘했다. 세계사 에피소드, 철학 이야기, 문학적 비유가 넘쳐난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제국주의 마지막 단계에서 아프리카 식민지의 22개 코코아 대농장 중 4곳만이 배당금을 지불할 수 있었고, 58개 고무 대농장 가운데 8곳만이 배당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미국의 시인 칼 샌드버그의 시도 인용됐다.

이 책은 오랜 세월의 숙성을 거쳐 탄생했다. 윤석범 교수는 소장 학자 시절부터 경제학 입문서를 저술하고 싶었으나 스승 최호진 교수의 저서가 있었기에 중복되는 책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집필을 시도하려다 원로 스승 김상겸 교수가 입문서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또 포기했다. 윤 교수는 이 책의 맨 앞 페이지에 ‘고 김상겸 교수님을 추모하며’라고 썼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학’(송병락 지음, 박영사)의 저자 프로필에 독자는 압도당하지 않아도 된다.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경제학자라…. 책을 펼치기도 전에 “경제 전문용어가 수두룩해 골치 아픈 책이 아니겠는가”고 지레 겁을 먹는 사람이 상당수 아닐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경제를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술술 읽힌다 해서 건더기 없이 멀건 국물만 그득한 책이 아니다. 저자의 깊은 내공 덕분에 푸짐한 건더기가 곰삭았다.

피해야 할 책들

송병락 교수의 ‘글로벌 시대의 경제학’.

이 책의 특징은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됐다는 점이다. 여느 경제학 서적과는 달리 수식과 도표가 거의 없다.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다가 보면 책 내용에 공감해서 무릎을 치는 경우가 있으리라. 한국의 장래를 매우 밝게 전망하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저자는 경제학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노스 교수는 경제학은 오락처럼 즐길 수 있는 것이고, 니시무라 가즈오 일본 교토대 교수는 일본인들이 21세기를 맞이하여 활력을 찾는 최선의 방법은 경제원리를 잘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기본 경제원리이다.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우리 기업과 산업, 나라의 경쟁력과 우리 생활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높이는 길은 이런 경제원리를 잘 이해하고 잘 활용하는 것뿐이다.”

저자는 서울대 부총장 시절에 많은 외국 귀빈을 맞았다. 그들에게서 선물을 받고 뭘 답례로 줄까 고민하다 갓을 골랐다.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공식 모자가 바로 이것”이라 설명하며 뫼 산(山)자 모양의 대감 갓을 주자 모두들 대단히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저자는 서울대 교육행정연수원이 초중고교 교장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연수강의에서 ‘최고 명강사’로 자주 뽑힌다. 이 강의를 직접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명강의를 듣는 것으로 갈음하면 되겠다.

경제학 교과서, 입문서는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 각 서적마다 특징이 다르다. 기피해야 할 책은 저자가 예닐곱 명이나 되는 대학교재이다. 이런 책은 주로 수강생이 의무 교재로 선택하도록 급조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함량이 떨어진다. 또 공무원 수험서 비슷한 형식의 경제학 입문서도 피해야 한다. 표지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조악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신동아]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_ 김병종 지음

원색의 강렬한 화풍으로 사랑받는 김병종 화가가 환상과 결핍이 교차하는 라틴 세계로 떠났다. 쿠바 멕시코 브라질 칠레 페루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그는 예술가의 눈으로 남미의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무용은 물론, 사회 전반을 살펴보았다. 에세이와 그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헤밍웨이,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로맹 가리, 체 게바라, 에바 페론이 그의 붓끝에서 화려하게 피어났다. 반평생을 쿠바에 머물며 정신적 쿠바인으로 살아간 헤밍웨이, 환상문학의 꽃을 피워낸 신화적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궤적을 따라가는 맛이 이채롭다. 노동자의 춤에 불과하던 탱고를 세계화한 위대한 작곡가 피아졸라, 전세계에 쿠바음악 열풍을 불러일으킨 아프로 쿠반 재즈 그룹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감동적인 선율도 그의 화폭에 고스란히 담겼다.

남미 사람들의 삶에 대한 묘사는 실감난다. 푸른 나무, 밝은 태양, 맑은 하늘, 청옥빛 카리브해…, 이런 자연을 닮아 낙천적인 쿠바인들은 석양이 되면 골목에 끼리끼리 모여 연주하고 춤추는 데 거침이 없다. 아르헨티나로 가면 그의 글과 그림도 탱고 선율을 닮는다. “고단한 이민자들이 첫 짐을 풀었다는 푸르토 마데로 항. 적막하고 스산한 이 부두는 언젠가부터 원색의 옷이 입혀지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현란한 색깔들은 처음엔 풍경을 바꾸고, 마침내 ‘가난쯤이야’ 하고 말하듯 삶마저 바꾸어버린다. 무기력과 우울은 환희와 기쁨에 자리를 내준다.” 책을 읽고 나면 여행가방을 꾸려 떠나고 싶어진다. 랜덤하우스/ 288쪽/ 1만2000원

공부하다 죽어라 _ 현각 외 지음, 청아·류시화 옮김

푸른 눈의 외국인 출가 수행자들이 던지는 인생의 화두. 하버드·예일·코넬·소르본·제네바 대학 등 세계적인 명문대를 졸업한 서양의 젊은 지성 11명이 ‘낡은’ 세계관을 버리고 만난 깨달음의 세계관을 들려준다. 2003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대전 자광사에서 매달 행한 ‘외국인 출가 수행자 초청 영어 법회’의 내용을 받아 적어 우리말로 옮겼다. 미지의 길에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발견했는가? 현각 스님은 “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 어떤 종교를 믿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라고 했고, 파나완사 스님은 “그 누구도 고귀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천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따라 고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화로운삶/ 352쪽/ 1만4000원

밤으로의 여행 _ 크리스토퍼 듀드니 지음, 연진희·채세진 옮김

밤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폭넓게 다룬 백과사전식 에세이. ‘나는 밤을 사랑한다. 신비한 여름밤, 밤이 찾아올 때 느끼던 흥분, 밤의 검은 광채’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매력적인 에세이는 ‘낮과 낮 사이에 낀 어둠의 시간’에 대해 흥미롭게 풀어낸다. 밤에 대한 천문학 생물학 생리학 의학 등 학문적 접근도 놀랍지만, 문학 영화 축제 신화 나이트클럽 불꽃놀이 등 문화적 차원의 해석도 풍부해 읽는 맛을 더한다. 독자는 이 책에서 수많은 예술가가 왜 그토록 밤을 찬양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또 ‘나이트클럽이 생겨난 이유’ ‘불면증의 원인’ ‘미국 갱영화를 필름 누아르(noir, 검다는 뜻)라 부른 이유’ 등 밤과 관련된 일상의 궁금증도 풀 수 있다. 예원미디어/ 500쪽/ 1만8000원

미래에 관한 마지막 충고 _ 마티아스 호르크스 지음, 송휘재 옮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유행병처럼 주민들 사이에 만연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을 가리키는 ‘얼라미즘(alarmism)’이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기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지금보다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권위 있는 미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예스’라고 말한다. 극단화의 경향을 지닌 얼라미즘 때문에 우리 삶이 더욱 어리석고 일차원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 그는 또 세계화를 사악하게 보는 시각, 온난화로 지구가 멸망한다는 시각, 폭력의 증가와 문화 전쟁이 평화를 파괴할 것이라는 시각 등을 미래를 두렵게 느끼게 하는 빌미가 되는 ‘동화’라고 규정하면서 그런 시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마트비즈니스/ 352쪽/ 1만5000원

신은 위대하지 않다 _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2001년 벌어진 9·11 사건으로 종교의 배타성과 폭력성, 호전성, 반인간성, 반문명성에 대한 회의가 전세계 시민사회로 퍼져나갔다. 특히 팍스아메리카나의 기독교 복음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앞에서 사람들은 신과 종교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이 책은 지난해 5월 출간 직후부터 전세계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포린 폴리시’와 ‘프로스펙트’가 뽑은 ‘100인의 지식인’에도 든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경전의 원전, 문헌학과 해석학, 역사 등에 근거해 신중하고 지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특히 저자는 종교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신의 속성에서 찾아내고, 신의 자기모순을 파고들어 신과 함께라면 인간은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알마/ 440쪽/ 2만5000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 _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개인 도서관인 ‘고양이 빌딩’에서 책에 파묻혀 지내던 일본의 지성 다치바나 다카시가 2001년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로 한국에서 다카시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고양이 빌딩에 책이 가득 차자 그는 인근에 집을 한 채 더 빌려 서고를 만들고 책읽기와 글쓰기에 매달렸다. ‘나는 이런 책을…’의 완결판인 이 책은 그런 그의 독서 기록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10년을 책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체력단련기라고 표현한다. 대학 졸업 뒤 문예춘추사에 입사한 그는 자신의 독서 편향에 좌절하고,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고 느끼자 ‘마음껏 책을 읽고 싶어’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이후 그는 인간 지구 우주 예술 문명 신화 사랑 세계경제 등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지혜를 건져 올렸다. 그의 독서평(2부)은 산만한 듯하면서도 하나하나가 독특한 여운을 안겨준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리히테르에 관한 평전인 ‘리히테르’, 세계 금융시장의 핵심을 파고든 ‘전 지구화하는 돈’, 예수 탄생 신화의 뒷얘기를 파헤친 ‘마리아’를 하나의 에세이에서 다룬 것이 한 예다.

독서평보다는 책과 자신의 성장 과정을 풀어놓은 1부가 훨씬 재미있다. 그의 삶과 독서론이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무언가를 새로 안다는 것은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험길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책이라는 것. 청어람미디어/ 632쪽/ 2만3000원

임꺽정(4판) _ 홍명희 지음

한국 문학의 고전인 벽초 홍명희의 대하역사소설 4판이 출간됐다. 남북 분단 사상 최초로 남한 출판사가 북한과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은 작품으로, 어려운 용어나 생소한 낱말은 뜻풀이를 하고 박재동 화백의 그림을 곁들여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집했다. 소설가 김훈이 쓴 ‘산성 칠장사 답사기’, 관련 논문과 인물 관계도, 김남일 주강현 등이 쓴 ‘임꺽정 백배 즐기기’ 같은 부록에 담긴 내용도 흥미롭다. 소설은 알다시피 백정 출신 도적 임꺽정의 활약을 통해 조선시대 민중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김훈은 ‘임꺽정’을 읽는 즐거움을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신바람에 올라타서 글과 함께 출렁거리면서 흘러가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사계절/ 전 10권 각 300~500쪽/ 각권 1만800원

탐험의 시대 _ 마크 젠킨스 엮음, 안소연 옮김

인간은 왜 여행을 하는 걸까. 유목민들은 살기 위해 여행을 한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행을 한다. 무역업자들은 돈에 이끌려 여행을 한다. 제국주의자들과 군인들은 권력을 좇아 여행을 한다. 여행의 목적은 그래서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여행의 동기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좀더 이전 시대 사람들은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여행길에 올랐다. 이 책은 그 호기심 해결의 기록이다. 1888년부터 1957년까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탐험과 여행에 관한 수천 편의 글 중에서 가려 뽑았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기자, 외교관 등 26인의 여행기다. 지호/ 376쪽/ 1만6000원

오즈의 프랑스 와인 어드벤처 _ 오즈 클라크 외 지음, 김보영 옮김

요즘엔 국내에서 값싸고 질 좋은 신대륙 와인들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와인의 본고장은 프랑스다. 평균적으로 프랑스는 전세계 와인 생산량의 19%를 차지하고 있으며, 와인 애호가들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와이너리들이 즐비한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비평가 가운데 한 명인 오즈 클라크가 자동차 애호가이면서 와인보다 맥주를 더 좋아하는 친구 제임스 메이와 프랑스 와인 기행을 떠났다. 오즈는 부르고뉴, 보르도, 프로방스, 론 등 주요 산지들을 돌며 친절하게 와인을 설명한다. 와인 용어, 테이스팅법, 에티켓, 레이블 읽는 법, 저장법, 추천 와인 등이 컬러 화보와 함께 잘 정리돼 있다.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에 대한 음식궁합 이야기도 재미있다. 예담/ 284쪽/ 1만6000원

왕유 詩全集 _ 왕유 지음, 박삼수 역주

왕유는 중국 당나라 시대 시인으로 시선 이백, 시성 두보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시뿐 아니라 음악과 그림에도 능해 남종문인화의 시조로도 알려져 있으며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그는 19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지만 좌천, 아내와의 사별 등 굴곡진 삶을 보내다 나이 40에 자연에 은거했다. 이후 그는 시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정치적 이상을 토로하며, 현실 사회의 불합리성을 풍자했다. ‘한가로이 살아가는 이곳, 이름하여 우공곡(愚公谷)/ 어찌 번거로이 세속의 시시비비를 따지랴?’(‘농가’ 중에서)고 읊은 그의 넓은 마음을 왕유 연구의 권위자인 박삼수 울산대 교수의 주석으로 만끽할 수 있다. 현암사/ 912쪽/ 3만8000원

미코노미 _ 김태우 지음

제목 ‘미코노미’는 나(me)와 경제학(economy)을 합친 말이다. 미코노미란 웹을 통해 개인과 개인이 대화를 나누고 무한대의 정보를 공급받으며, 소규모 사업자가 미디어·금융·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는 등의 새로운 경제 흐름을 일컫는다. 이런 변화 탓에 과거에 수동적인 소비자였던 개인이 능동적인 공급자의 위치에 서게 됐다.

예컨대 책을 출판할 수 없었던 이들이 자기출판 사이트인 룰루(www.lulu.com)를 통해 책을 출판하고, 자기 음반 발매가 가능한 셀라밴드(www.sellaband.com)를 통해 음반을 발매한다. 또 단돈 수십만원이 없어서 사업을 할 수 없었던 제3세계 사업가들이 키바(www.kiva.org)에서 소액대출을 받아 창업에 성공하며,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서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집필자로 참여한다.

흥미로운 일화는 끝도 없다. 미국의 고교생 세 명이 장난으로 다이어트 콜라에 멘토스를 넣고 분수를 만드는 3분짜리 동영상을 유투브에 올렸다. 이 동영상은 곧 유투브에서 인기를 누리며 불과 몇 달 만에 코카콜라에 1000만달러의 마케팅 효과를 가져다줬다.

참여와 공유, 개방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모습의 경제’(미코노미)가 우리 가슴을 떨리게 하고 있다. 쉽게 대화의 장으로 뛰어들 수 있게 하는 웹2.0, 어텐션(주목) 이코노미,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던 80%에 귀기울이는 롱테일(Long Tail)이라는 단어들이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 코넬대 석사 출신의 저자는 ‘풀타임 블로거’이자 ‘프리랜서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한빛미디어/ 292쪽/ 1만5000원

결단 _ 천천·쉬지엔 지음, 윤진 옮김

하루하루가 ‘결단’의 나날이다. 그러나 중요한 결단 앞에 서면 언제나 머뭇거리게 된다. 이 책은 그처럼 어려운 결단을 조금 더 쉽게 내릴 수 있는 방법론을 우화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한정된 먹이를 두고 약육강식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초원에서 표범·사자·하이에나·영양 무리가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사투는 곧 현대인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 표범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섯 가지 결단의 법칙을 배우게 된다. 먼저 성공은 반성에서부터 시작된다. 둘째 강력한 자신감을 가져라. 셋째 나와 소통하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라. 넷째 자신만의 선물을 잘 가꿔라. 다섯째 우리의 수호천사는 바로 ‘나’ 자신이다. 1부 우화에 이어 2부에선 실천법을 자세히 정리했다. 미르북스/ 224쪽/ 1만원

2008 트렌드 키워드 _ 김민주 지음

최신 트렌드를 경제, 사회, 문화, 인물, 과학 등 분야별 키워드로 정리해 보여준다. 저자는 “트렌드는 먼지와 같다”라고 말한다. 주변에서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보고 들어도 이를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민감한 사람들만 그 기척을 감지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둔감한 사람들은 먼지가 뭉쳐서 방바닥에 굴러다녀야 알게 되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늦다. 저자는 남보다 먼저 먼지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키워드에 민감할 것을 권한다. 예컨대 물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소비하는 과정에 관련된 기업에 투자하는 금융상품인 ‘물펀드’, 생체의 원리나 메커니즘을 이용해 공학적 난제를 푸는 자연모사공학 등 다양한 트렌드 키워드를 만날 수 있다. 미래의창/ 351쪽/ 1만2000원

하와이로 간 젊은 부자 성공 비밀 38 _ 히로 나카지마 지음, 송수영 옮김

27세에 10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34세에 은퇴하고 하와이로 떠난 젊은 부자 이야기다. 그는 생존 경쟁의 레이스에서 탈출한 뒤 네 가지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 장소의 자유, 시간의 자유, 행동의 자유, 경제의 자유가 바로 그것.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목표를 향해 의식을 개혁하기 위한 부의 방정식을 만들었다. ‘Y(젊어서 은퇴한 뒤 남은 삶을 즐기며 자유롭게 사는 생활) = A(현재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력)x(자산)+c(콤플렉스)’가 그것. 즉 A가 크면 자산이 많지 않아도 ‘생존경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마케팅, 시장 개척, 파트너 관리법 등 실천 전략들을 제시한다. 밀리언하우스/ 208쪽/ 1만1000원

돈 버는 감성 _ 시마 노부히코 지음, 이왕돈·송진명 옮김

경제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21세기 전반, 적어도 앞으로 20년은 감성의 시대가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취재를 통해 알게 된 다양한 기업과 지역의 사례에서 바로 이 키워드를 길어 올렸다. 예컨대 오늘날의 소비자는 가격이나 양이 아니라 디자인, 센스, 안전, 건강, 청결, 환경 등 라이프스타일의 ‘감성’을 중요시한다는 것.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인구의 감소’ ‘고령화 시대’ ‘환경의 세기’ ‘웰빙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다. 부문별로 수많은 사례가 등장하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환경으로 자동차업계의 세계 제일을 추구하는 도요타자동차, 철의 도시에서 의료와 건강 도시로 탈바꿈한 미국 피츠버그 등이 그런 사례다. 젠북/ 344쪽/ 1만3000원

스시 이코노미 _ 사샤 아이센버그 지음, 김원옥 옮김

저널리스트 사샤 아이센버그가 2년간 5개 대륙 14개 국가를 돌며 ‘발로 쓴’ 이 책은 날생선의 무역 이야기에서 문화·역사·경제 이야기를 발라낸 논픽션이다. 팔딱이는 생선을 재빨리 저며 따끈한 밥 위에 얹어내는 즉석요리 ‘스시’가 글로벌 문화상품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스시는 사무라이 시대 후반기에 나타났지만 주로 길거리에서 팔리는 간식용 절임식품이었고, 선어(鮮魚) 상태로 요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저자는 스시가 미국인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전세계적으로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일본인 정착촌 ‘리틀 도쿄’에 출장 간 일본 비즈니스맨들이 즐기는 것을 보고 업자들이 생선을 ‘상하지 않은 상태로’ 미 전역에 유통하면서 스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담백한 스시가 다이어트 식품으로 소개돼 끈적끈적한 소스를 싫어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각광을 받았고, 마침내 고급음식으로 자리매김됐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인 스시 요리사 마쓰히사 노부유키가 큰 활약을 했고, 스시 체인의 국제화 버전인 ‘노부’도 탄생했다. 스시의 인기에 힘입어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아 고양이 사료로 쓰이던 참치고기가 최고급 스시 요리 재료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 책은 스시를 소재로 글로벌 산업주의의 현재를 두루 이야기하고, 세계화의 단면을 입 안에서 음미케 한다. 미식가에게는 식도락의 의미를, 마케터에게는 시장 개척의 기회를, 일반 독자에게는 세계화의 효용과 가치를 한눈에 조망케 하는 ‘한 점의 스시’ 같은 책이다. 해냄/ 360쪽/ 1만5000원

아부지, 저희 집으로 가입시더 _ 윤문원 지음

각박한 세상 인심에 멍울진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가족 에세이. 먹을거리조차 부족하던 보릿고개 시절부터 21세기에 접어든 최근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가족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그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아버지, 아내를 여의고 시골에서 혼자 살아가는 노인, 호롱불 아래서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의 고단한 이야기 등 20여 편의 에세이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가족이란 언제나 함께하기에 그 소중한 의미를 잊고 사는 공기와 같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새삼 ‘공기’의 소중함을 일깨우게 하는 힘이 있다. 밝은세상/ 224쪽/ 9800원

호모 엑스페르투스 _ 이한음 지음

‘실험하는 인간(Homo Expertus)’이라는 뜻의 제목처럼 이 책은 인류의 삶을 바꿔온 과학 실험에 대한 얘기를 갈무리했다. 뛰어난 과학번역가 겸 저술가인 저자는 과학의 최첨단을 이끈 실험에 대해 유려한 글솜씨로 풀어놓는다. 예컨대 호기심 많은 미시간대 데이비드 버스 박사는 ‘바람기에 대처하는 남녀의 자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힌다. 남성은 여성과 달리 2세가 자기 자식임을 100% 확인할 수 없으므로 여성의 성적 방종을 생물학적 위기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육체적 불륜을 더 참지 못한다. 하지만 반대로 여성은 안정적인 육아를 위해 정서적 불륜을 더 위험하게 생각한다. 과학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이성’이 아니라 ‘호기심’일 수 있음을 짐작케 하는 사례다. 효형출판/ 256쪽/ 1만2000원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_ 김준혁 지음

저자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 대한 학술연구를 담당해온 학예연구사이자 정조시대를 연구해온 소장 연구자다. 그런 그가 정조의 개인적 삶과 개혁정치, 화성에 대한 이야기를 쉬운 글로 풀어썼다. 더욱이 도시 경관에 대한 수준 높은 고민의 산물인 화성에 대한 이야기는 중심이 돼야 할 인간과 자연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물신주의가 차지하고 있는 세태를 비판하는 글로도 읽힌다. 정조의 위민사상과 그를 둘러싼 음모와 여인 등의 일화는 요즘 방영되고 있는 정조에 관한 TV 드라마 따라잡기에 좋다. 정조가 8일간의 화성행차를 결행한 이유는 사도세자를 참배하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거기엔 고도의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여유당/ 368쪽/ 1만5000원

세상을 바꾼 어리석은 생각들 _ 프리더 라욱스만 지음, 박원영 옮김

엉뚱한 생각 끝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필요 없는 기계와 계산법을 발명한 라이프니츠,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돌을 던진 사상가 루소,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그림에 담은 화가 고야 등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들’로 세상을 바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법학 박사인 저자는 이런 엉뚱한 인물들과 사건을 통해 ‘불필요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생각’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며 독자에게 생각의 자유를 향한 여행을 제안한다. 그런 여행을 통해 누구나 세상을 바꾸는 ‘선구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독일 언론은 이 책에 대해 ‘라욱스만의 편안한 지식여행은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어 모든 이가 이해하기 쉽게 쓰였다’라고 평했다. 말글빛냄/ 243쪽/ 1만3800원



담당·정현상 기자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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