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장편소설 '나가사키 파파' 내놓은 소설가 구효서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중견 소설가 구효서 씨가 '애별' 이후 6년 만에 새 장편소설 '나가사키 파파'를 내놨습니다. 강화도 북단 마을에서 태어난 구효서 씨는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마디'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는데요. 등단 이후 장편 소설 14편, 단편집 8권, 산문집 2권 등 왕성한 창작을 보여온 소설가 구효서 씨는 구성진 입담과 실험적 정신, 세련된 감각으로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는데요.
작업실로 출퇴근하고, 오로지 글만 써서 두 아이를 키운 전업작가 구효서 씨. '소설을 통해서 인생을 보고 삶에 대해 통찰한다.' 는 소설가 구효서 씨를 3월 26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6년 만에 나온 새 장편 ‘나가사키 파파’▶ 새 장편이 6년 만에 나온 것이죠?
장편이 6년 만에 나온 것이고, 단편은 그동안 꾸준히 써왔습니다. 단편은 체형 관리랄까? 늘 자신의 작품세계를 담금질하는 작업이에요. 그런 의미로서 단편은 의미가 있습니다. 장편은 못 썼지만 단편은 꾸준히 써서 그 사이에 두 권의 책과 두 권의 산문집을 냈으니까 그동안 별로 쉴 틈은 없었습니다.
▶ ‘나가사키 파파’작품 구상은 어떻게 하셨어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할 때의 씨앗은, 작고 사소하고 아주 일상적이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밥 먹고 TV보고 잠자고 영화보고 드라마보고 라디오듣고 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소설거리를 건져내는 일도 아주 작은 일상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주인공이 아버지를 찾아서 큐슈지역을 찾아가게 되는데서 시작합니다. 친아버지를 찾는다는 테마는 아주 고전적이죠. ‘엄마 찾아 삼만리’ 처럼요. 친아버지를 찾아 나가사키를 갔는데 사실 나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 그런데 다시 보니까 아버지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더라. 핏줄로서의 아버지, 혹은 핏줄은 아니지만 아버지란 무엇인가에 대해 시작을 해보자..그렇게 된 것입니다.
▶ 사건이 어떻게 풀려 나가나요?
21살 짜리 화자가 할머니나 고모를 통해서 자기를 키워주신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할 당시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나의 친아버지는 누구며 어떻게 생긴 분일까. 게다가 그 상태에서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리고. 더욱 더 친아버지에 대한 열망이 커져서 비록 고생은 되지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 작품 곳곳에 '대화와 지문','문어체와 구어체'가 혼재돼 있는데요?
아까 말씀드린‘엄마 찾아 삼만리’에서도 친어머니를 찾잖아요. 많은 드라마에서도 남녀가 사랑을 할 때, 알고 보니 남매였더라..이런 이야기도 있고, 삼각관계에서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인이 알고 보니 자매더라. 이런 이야기가 많잖아요. 거기서 보면, 핏줄이라는 것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핏줄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가 있거든요. 나의 핏줄만이 최고다. 우리 민족이 최고다. 하여 타 민족을 배척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런 의식을 사소한 집안문제에서 시작해서 핏줄의 문제, 민족과 인종의 문제까지 확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국 소설에서 많이 보이는 '무엇 무엇을 했습니다' 라고 끝나는 소설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언가 반성없이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서 무언가를 휘저어 놓고 섞어 놓음으로서 반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에 대해서 한 번쯤은 반대로 가고 싶었습니다.
▶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가사키는 일본지역이고, 파파는 특별히 영어라고 하기엔 세계 공용어에 더 가깝잖습니까? 주인공 빼면 다 일본인인 그런 상황이 시공간과 인물이 모두 일본이다 보니까 당연히 소설이 일본스러워졌어요. 그래서 너무 일본스럽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는데, ‘한국스럽다’ ‘일본스럽다’라고 나누는 것도, ‘우리 것’과 ‘너희 것’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일 뿐이지 이렇게 굳이 문화적으로 나누고 배제해야 할까 하는 회의가 들긴 합니다.
▶ 이 소설은 어떤 세대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까?
특정 나이대를 공략하기보다, 남녀노소를 불문해야 판매 부수가 많겠죠?(웃음) 젊은 세대는 가볍고 어떤 것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스러운 작품을 선호하고, 어머니 세대는 진지하고 엄숙하고 무거운 것을 좋아하시죠. 책도 두꺼워야 본전 생각도 나고, 요즈음은 책이 가벼워졌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머니 세대가 생각하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자문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 세대는 독립 이후 전쟁과 가난 때문에 나 자신보다는 국가와 민족, 사회, 가정을 생각해야만 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죠. 그런 인생관을 지금까지도 젊은 세대들에게 강요하거나 주입하고 있다는 반성의 의미도 담았고요. 이 책을 읽고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세대가 어우러져 함께 고민했으면 합니다. 그럼 남녀노소가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잘 팔리는 일본 소설 흉내를 낸 것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흉내를 내었을 수도 있죠. 다만, '흉내를 내었구나.'라고 생각하시기 전에 '왜 흉내를 내었을까?'에 대해 한 번 대답을 얻어보자..그러고 나서 ‘왜 흉내를 내면 안 되는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자..라고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겨울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하여준 백제 왕인 박사의 묘를 방문했었어요. 그런 것을 보면, 문화라는 것은 사소한 인적 교류이고, 개인적인 정서와 마음을 교감하는데서 싹튼다고 봅니다. '한국적이다' 혹은 '일본적이다'라고 굳이 나누는 것은 시대적으로 뒤쳐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으로 '열린다'는 것은 균형이라고 생합니다. 열린 것은 열리고 보호할 것은 보호하는 것이죠.
▶ 소설은 무언가 위대한 것을 담지 않으면 통속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소설을 만들어 팔아먹는 사람은 사실 아주 낮은 신분이었죠. 그러던 것이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시장통이 아니라 전국, 전세계를 커버하기 시작하면서 돈이 생겨났어요. 그러면서 신흥계급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전국에 자기 책이 돌아다니면서 영향력이 생기고, 영향력이 생기면서 권력과 권위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말도 조심해서 해야 하고, 한마디 하더라도 지적이고 고급스러운 말이 요구되고...그러다 보니 소설이 어렵고 무겁고 복잡해진 것이에요. 그렇지만 애당초 소설가는 잡직이었어요.
▶ 87년 등단 이래 장편 14편, 단편집 8권, 산문집 2권 내시는 등, 그간의 왕성한 창작이력과 달리 신간 소식이 많이 늦으셨는데요?
단편은 한편 쓰는데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한 달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장편은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걸려요. 그래서 옴짝달싹을 못합니다. 제가 장편을 못 쓰고 있을 동안, 큰애가 고등학생이었어요. 요즘 고등학교 다니는데 웬 돈이 그렇게 많이 드는지, 대학교보다 더 많이 드는 것 같아요.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것이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않고서는 많이 힘드니까, 간간이 단편도 쓰고 그 사이 아르바이트도 하는 등 아이들 대학 보낼 때까지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대학 보내 놓고 장편을 하나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가 이번에 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이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웃음)
▶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신 거예요?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소설쓰는 것 외에는 없어요. 또 나이가 50줄에 접어들고 경륜도 한 20여년 되다 보니 ‘배운 것 내려놓고 가라’는 성화가 있었죠. 대학생, 젊은이, 주부 등과 함께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삶이란 무엇일까’같은 생각하는 시간을 갖다 보니까 그게 아르바이트가 된 것이죠.
그런데 그게 어떻게 보면 참 사기치는 것 같아요. 선생님 말씀 따라 소설을 잘 써오면 '잘 썼다' 라고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시킨 대로 해와도 '이게 소설이냐' 하고 혼을 내요. 자기가 쓰라고 시켜놓고 혼을 내면 그게 사기죠.(웃음) 태도나 열정,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지 결과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데, 배우는 입장에서 그대로 따라하려고 해서 혼을 내는 것이긴 합니다만.
◇ 출퇴근하는 전업 작가 ▶ 가장으로서는 어떠세요?
이 직업이 누구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합니다. 대한민국은 인구도 적어서 초판 찍으면 3천부정도 되는데, 글만 써서 식구들이 먹고 교육받는다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조선시대 때 책이 나오기 이전에 '전기수'라고 해서, 시장통에서 돈을 받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소설가가 그 후예이니까, 이야기를 만들어서 먹고 사는 게 이 직업이 꽤나 역사는 오래됐죠.
우리집에는 딸이 없지만, 저한테 여성성이 있어요. 지금 아들만 둘이라 가족이 남자 셋, 여자 하나지만 어떨 때는 남자 둘, 여자 둘이 됩니다. 빨래나 요리취향 같은 것에서 말이죠. 그래서 딸이 없어도 아내가 외로워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웃음) 이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이 여자이고, 한국소설에서 여성을 화자로 제일 많이 쓴 사람이 바로 저이거든요.
그만큼 저에게는 여성성이 있습니다.모든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너무 남성성만 부각되다보면 사회 문제도 되고요. 지금은 여성작가의 시대이고 하니까, 저는 망하지는 않겠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웃음)
▶ 전업 작가로서 출, 퇴근을 하신다면서요?
문학은 예술이잖아요. 저 또한 예술가들의 자유로움, 틀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속성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또한 동시에 아버지이고 가장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섞어야 한다고 봐요.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면 무책임한 남자가 되고, 또 너무 책임감만 강하면 멋없는 예술가가 되고. 작가 중에서 외모만으로도 예술인 같으신 분이 있는가 하면 시인 안도현 씨, 정호승 씨 이런 분들은 샐러리맨 같아요. 복장도 그렇고. 하지만 복장이 그렇다고 내면도 그렇지는 않잖아요.
예술인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자유분방함만 주장하면 너무 철없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출퇴근도 하고 평소에도 단정하게 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그 속에 들끓는 무언가가 있긴 하죠.그리고 산문은 비교적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필요로 해요. 이미 사회화 되어있는 것이죠.
시인들은 시의 특성상 좀 더 자유분방한 것이 있지만, 소설가들은 시인과는 다르게 다분히 일상적이고 생활적이에요. 시인이 더 멋있긴 합니다.(웃음)저는 요리하는 것 좋아하고, 설거지도 하고. 분리수거도 해요. 아이들에게 결코 권위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좀 무서웠거든요. 아버지하고의 정이 없는 게 늘 슬프고 후회가 많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하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근데 너무 친구처럼 지내서 이것들이 아버지 무서운 줄 몰라서 잘 하고 있는 건지 싶긴 하지만.(웃음) 전업작가가 참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려면 무엇보다 가족의 협조가 있어야 해요. 한쪽으로 소설을 쓰면서 한쪽으로 가족에 대한 봉사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전폭적으로 내 편을 만들어 응원을 받으며 소설을 써야지, 가족으로부터 원망을 들어서는 결코 좋은 소설을 쓸 수 없습니다.
◇ 어린 시절 본 것은 책이 아니라 꽃, 바람, 바다, 노을, 그런 것▶ '강화도령'이셨다고요?
예. 강화도에서 태어나서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습니다. 저희 동네에 70년대 초까지 전깃불이 안 들어왔었어요. 라디오도 유선 라디오여서 바람불어 선이 끊어지면 찾아서 이어야 라디오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때 우리집에 책이 교과서 외에 딱 한권 있었어요. 어머니가 읽으시던 토정비결 한 권. 이것도 마을 통틀어 한 권이었어요.
그래서 정초가 되면 우리집에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토정비결 보는 것이 일이었어요.당시는 칡뿌리 캐먹고, 찔레 꺾어먹고, 개암 까먹고 그런 것이 일이었죠. 그때 강화도를 잇는 다리도 없어서 뻘 위로 배타고 오고가고 그랬어요. 그런 시절에 제가 본 것은 책이 아니라 꽃, 바람, 새, 바다, 노을, 그런 것이에요. 그것이 기가 막힌 책이죠.
▶ 소설가로서 어린 시절 자연이 준 영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TV나 게임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때 하는 일이라곤 수수깡으로 뭐 만들고, 새총 가지고 놀고, 자치기 하고 그랬죠. 저희 때는 그런 거 만들려고 칼을 썼잖아요. 요새 아이들은 칼로 사과도 못 깎으니까 손이 여물지를 못해요. 지금이야 사기만 하면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었지만, 저희 때는 돌, 나무, 수수깡, 감자, 고구마 같은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필요한 물건을 우리손으로 만들었어요. 그렇게 세상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형성된 것 같아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이야기도 만들어내는 것이지 않습니까?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어머니는 학교 근처도 못가보신 무학자셨어요. 그때는 동네 아주머니끼리 모여서 삼삼오오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는 심청이가 실존 인물인 줄 아셨대요.(웃음) 요즘 어머니들은 책을 사주지만, 그때만 해도 주로 이야기로 해주셨죠. 저희 어머니는 아주 구변이 좋으셨어요.
◇ 고등학교 때 700매 짜리 소설을 쓰기도▶ 언제부터 글을 쓰시기 시작하신 거예요?
고2때 작문시간이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있었어요. 그땐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이런 과목 위주여서 다들 무시할 때였죠. 하지만, 저는 그 시간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15장 써오는 숙제를 받으면 150장을 써왔어요. 제가 방학숙제로 50매짜리 소설을 써오라고 했을 때, 700매를 써갔었죠. 그러니까 선생님이 좋아하셨어요. 그때 칭찬받으면서 즐겁게 쓴 것 같습니다.
그때는 EQ라는 말이 없었는데, 제가 IQ는 좀 낮았고 EQ가 높았던 것 같아요. 우리시대에는 공부가 최고였었어요. 의대나 법대 가야 성공한다고 하면서, 글 쓰는 사람은 소외받았었죠. 그래도 글 쓰는 게 즐거워서 지구력 있게 했죠.
▶ 글을 쓰는데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으신가요?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가장 자유스러운 사람이다..라는 원칙입니다. 방송 많이 하시는 배한성 씨도 생방송 시간을 철저히 지켰을 때가 자유스럽지.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일주일이 정신없어지지 않습니까.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시간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술 먹고 늦게 일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헛갈리기 시작하지 않습니까.(웃음)
▶ 요새 문학계가 어렵다고들 하던데요?
인쇄 매체가 다양해졌을 뿐이죠. 저희 때는 공대나 상대 다니는 친구라도 문학잡지 하나는 보는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태도였어요. 요즘은 나의 관심분야만 잘하면 되는 추세이죠. 그래서 문학의 수요가 줄어들었고 하지만 대신 드라마나 연극, 영화 같은 제 2차 장르로 확산이 되었죠. 절대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전보다 인구도 늘어나고 실제로도 책 많이 사서 봅니다. 그러니 자기 작품에 최선을 다해서 부끄럽지만 않다면 작가로서의 일이 예전보다 힘들어졌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유대로 어우러지는 과정 그려▶ 라디오에서 '행복 스튜디오 구효서입니다.'를 진행하시기도 했죠?
그것도 일종의 아르바이트에요. 책 이야기도 많이 다루고, 작가들하고 이야기도 많이 했고요. 작가들이 방송 출연하는 것도 일종의 의무에요.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니까. 다른 매체에 참여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일도 큰 의미에서 보면 작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TV같은 곳은 메이크업도 해야 해서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이것도 독자를 위해서, 문학을 위해서 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 소설의 도입부와 끝 부분에 생방송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나가사키에 가면 실제 모델이 된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기차역에서 보면 스튜디오가 보여요. 좁은 지역방송인데, 방송이라는 것의 효과가 큽니다. 방송만큼 관객이 많은 매체가 없어요. 불특정 다수에 대한 파급력이 큽니다. ‘나가사키 파파가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당신을 나의 아버지로 선언합니다’라는 그 말을 나가사키 전 지역에 하는 선언적인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라디오 스튜디오를 소설 안에 들여왔습니다.
▶ 작품을 위해서 일본에 답사를 자주 가셨었나요?
자주는 아닙니다. 그냥 구체적인 지명, 이름 같은 것 보러 재작년에 갔었어요.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의 사실성 때문에 가긴 합니다만, 너무 취재가 많으면 상상력이 떨어져요. 그래서 서울 안 가본 사람이 말싸움에서 이긴다고 하잖아요. 소설가는 너무 샅샅이 보면 안 되고 적당히 보고 나머지는 메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월남전도 실제 참전한 분이 쓴 소설보다, 안 갔다 오신 분 소설이 더 재미있답니다.(웃음)
▶ 주인공이 요리사인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음식 하는 것 좋아해요. 그냥 제가 먹고싶은 것 제가 만들어먹는 정도긴 합니다만. 완성된 요리를 위해서는 각 재료가 자기의 맛을 희생해서 어우러져야 하지 않습니까? 일본인, 한국인, 대만인 등이 '넥스트도어'라는 한 식당에서 혈연은 아니지만 가족과 같은 유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하나의 재료가 요리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하고 비슷하지 않겠는가.. 해서 식당과 요리사를 내세운 것입니다.
▶ 현재 우리나라의 이주 노동자 문제와도 연결이 된다고 보기도 하던데요?
지난달 현대문학 잡지에 한 단편을 썼는데, 이주 노동자 이야기에요. 우리도 한때는 일본, 미국, 독일로 많이 갔잖아요. 현재 이주 노동들의 피부, 인종, 문화에 대한 갈등이 참 많아요. 그들에게 돼지고기를 강요한다거나 하는 문제 같은.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에요. ‘우리식으로 하지 않으면 왕따’라는 생각, 이건 폭력입니다. 이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열리고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죠.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런 부분을 많이 부각시킨 것은 아니에요.
▶ 야한 소설에 도전하고 싶다..라고 하셨는데?
야하다는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거든요. 다른 의미로는 ‘파격적이다. 적나라하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자기 생각이 비판 없이 굳어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망하는 것이거든요. 사람이 살아가려면 생각을 유연성 있게 유지해야 한다고 봐요.
'야하다'라는 것은 남이 모르는 우리들의 가장 은밀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잖아요. 가장 은밀한 느낌이어야 할 그 부분이 우리는 너무나 획일화돼 있어요. 우리의 정서와 감정이 획일화돼 이렇게 고사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야하면서도 경고성 있는 작품 같은 것을 써보고 싶어요. 작가란 자기가 경험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경험한 사람보다 더 실감나게 쓸 수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웃음)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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