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에 그만 천지가 어둑하고 아득해집니다.

언제라도 찾아뵈면 밭에서 일하시다가 흙 묻은 손을 바삐 닦으시며 “어서 와라” 그 높고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다정히 맞아주시고, 선생님 표현하신 대로라면 ‘악’ 소리가 나게 맛있는 된장을 퍼주시고 손수 농사 지으신 알 굵은 감자도 싸주시고, 언제까지라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10대의 문학소녀시절부터 제게 선생님은 그리운 분이셨습니다. 꿈속에서 선생님을 찾아간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흠모나 그리움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선생님의, 등을 곧추세우고 긴장된 표정의 옆모습 사진을 서랍 안에 붙여놓고 바라보면서 저 또한 등을 곧추세우며 젊음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고 외롭고 처절했던 시간들이셨을 1974년 가을, 처음 선생님을 정릉 골짜기 자택으로 찾아가 뵈면서 저는 그때 선생님께서 겪으시는 고초에 얼마나 많은 문학인들, 독자들, 국민들이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있는가 하는 말씀으로 작은 위안이나마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자상에 놓인, 붉은 줄이 쳐진 원고지와 만년필, 소박한 밥상, “소설쓰기란 장부가 일생을 걸고 할 만한 일이다”라고 말씀하시던 그 뜨거운 열정에 외려 제가 큰 용기와 위안을 받게 되었지요. 이곳이 선생님께서 글 쓰고 사시는 곳이구나, 작가란 이런 사람이구나, 작가의 생활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평생의 마음을 새기게 되었지요. 닮고 싶은 분, 그 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분이기에 제게는 어느 것 하나 예사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는 일, 쓰는 일이 그저 아득하고 두렵고 종잡을 수 없었던 20대 후반의 나이, 문청기질만 가득한 햇내기 작가였던 제게 고통과 고독을 숙명처럼 끌어안으며 오로지 글쓰기에 전념하시던 모습과 그 낡고 소박한 자택이 품고 있던 정신적 품격은 어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 어떠한 언설보다도 강렬하고 직접적인 학습효과를 주었던 것입니다.

꿈길로라도 찾아가던, 선생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토지문화관 창작실에서 지내던 소설가 후배는, 글이 안 풀릴 때나 나태해질 때면 방을 나와 선생님 사시는 자택을 바라본다고, 불빛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한동안 선생님이 계시는 곳을 바라보고는 힘을 얻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문청, 작가들, 문학을 사랑하고 선생님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서성이면서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먼발치에서 선생님을 뵙고 다시금 살아갈 힘, 글을 쓸 힘과 용기를 얻었을는지요.

천지간에 생명만큼 존귀하고 아프고 슬픈 것이 있겠는가 하고 애타게 호소하시며 우리들의 굳은 마음과 잠든 영혼을 일깨우시던 선생님, 늘 닮고 싶은 큰 나무이고 쉬고 싶은 넉넉한 그늘이셨던 선생님, 어둑해지는 저녁, 선생님 혼자 계시는 댁을 나올 때면 선생님의 그 시린 고독과 쓸쓸함에 마음이 아파서 혼자 중얼거리곤 했지요. ‘선생님께서는 잘 지내실 거야. 작가시니까’라고. 창작이란 어떻게 말해도 결국은 고통과 고독의 산물이고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서릿발같은 결기와 존엄성과 아픈 사랑의 힘으로 위대한 문학, 장하고 아름다운 생애를 완성하셨습니다.

‘모진 세월 가고/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최근에 발표하신 시의 마지막 연을 가슴으로 읽으면서도 이것이 먼 길 떠나시는 작별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천년만년 가까운 곳에 그대로 계실 줄로만 생각하는, 나중된 자의 영원한 미욱함 탓입니다.

선생님, 바람 불고 꽃 지는 봄날입니다. 회자정리, 생자필멸이라는 말을 당연히, 예사로이 해대면서도 선생님께서 떠나신 이 아름다운 봄날의 세상이 저는 낯설고 이상하고 외롭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 그 누구도 채울 수 없는 선생님의 크나큰 빈자리에의 그리움과 슬픔은 남은 자들의 몫일 터인즉 이제 어떤 생명도 아프지 않은 ‘평화와 선’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소서.

<오정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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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현대문학 거목 박경리선생의 삶과 문학

5일 별세한 박경리 선생은 한국 현대문학의 큰 나무이자 세상의 고통과 생명을 품에 안은 넓은 강이었다. 전쟁과 독재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어낸 고인은 20세기 한국사를 ‘토지’라는 거대한 피륙으로 직조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5년간 스스로를 글 감옥에 가두고 한 작품에 매진했던 고인은, 노년에 들어 생명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토지문화관을 설립해 후배작가들의 뒷바라지에 애썼다.

고인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한 탓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져 진주고녀를 1년 늦게 졸업했다. 이듬해인 46년 김행도와 결혼, 딸 영주씨 등 1남1녀를 두었으나 6·25전쟁 중 남편이 납북되는 바람에 홀몸이 됐고, 전쟁 직후 아들을 잃었다. 그 무렵 고향을 떠나 상업은행 본점에 다니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소설가 김동리를 찾아가 두세 편의 시를 보여줬다. 그후 “시보다는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는 동리의 권유에 따라 단편 ‘불안시대’를 썼고 55년 ‘현대문학’에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돼 문단에 나왔다.

고인은 등단 초기 단편을 주로 쓰다가 장편으로 옮겨갔다. ‘계산’ ‘불신시대’ ‘암흑시대’ 등 초기 단편은 작가의 신변문제나 생활 속의 부조리를 심리적 사실주의의 방법으로 묘사했다. 그후 ‘성녀와 마녀’(60년), ‘김약국의 딸들’(62년), ‘시장과 전장’(64년) 등의 장편을 발표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성녀와 마녀’는 낭만적 사랑에의 열정, 여성의 삶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또 ‘김약국의 딸들’은 김약국집 다섯 딸과 어머니 한실댁의 삶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성을 그렸으며, ‘시장과 전장’은 중학교 교사인 남지영과 남로당 당원인 하기훈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행복과 이념 사이의 갈등을 그렸다.


그러나 박경리의 본격적인 작가인생은 ‘토지’와 함께 꽃피웠다. 43세이던 69년 시작해 68세인 94년까지 25년간 5부로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21권)는 한국문학사에 우뚝 선 최고, 최대의 역작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수난기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원고지 4만장에 써내려갔다. 몰락한 최참판댁 손녀 서희와 그의 남편이 되는 하인 길상이를 비롯해 700여명의 인물이 명멸하는 이 작품은 실존인물을 소재로 삼은 역사소설과 달리,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민족의 역사를 형상화해 ‘창안적 역사소설’(이재선 서강대 명예교수)로 명명됐으며 ‘역사보다 더 역사적인 소설’(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토지’는 주인공이 따로 없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뼈마디와 실핏줄처럼 얽혀있는 탈중심적 성격으로 서구소설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창작실험을 보여주는 동시에, 2500여개의 독특한 어휘와 방언, 속담, 풍속, 제도 등을 담은 사전이 발간될 만큼 민족문화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작품이다.

고인은 운명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다뤘다. ‘토지’는 물론이고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의 주인공은 모두 운명이라는 초인간적 힘 앞에 선 문제적 인간이다. 이는 작가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불행은 전쟁통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데서 그치지 않고 사위 김지하 시인의 민주화운동과 투옥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인지 작가는 평범한 삶에 대한 선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생이 행복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유명한 딸보다는 곁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효도인데 나는 불효막심했다”는 회한을 쏟아내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직전 통영을 떠났던 그가 2004년까지 50여년간 한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창작활동으로 바빴다”고 하지만 고향에 불행한 추억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토지’의 주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 역시 집필기간 동안 일절 방문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자료에 의존한다든지, 생생한 현장이 작가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만년의 그는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였으며 후배작가들을 뒷바라지하는 ‘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했다. 작가가 17년 동안 살던 강원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도시계획으로 사라지는 것에 반대한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으로 99년 6월 토지문화관 건물이 세워졌다. 이곳은 문화계 인사들의 집필실이자 문화사랑방이었다. 2006년에는 사재를 털어 창작전용관을 세웠다. 작가는 이곳에서 낮에 텃밭을 가꾸고 밤에는 글을 쓰는 단박한 일상을 영위했다. 여러 차례 그곳을 찾았던 작가 윤대녕씨는 “후배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인사조차 받지 않으시면서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작가들이 먹을 반찬을 한두 가지씩 만들어 내려보내셨다”고 회고했다.

작가는 마지막까지 창작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2003년 ‘토지’의 후속편인 지식인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시작했으나 ‘현대문학’에 연재하다가 건강 악화로 중단했으며, 지난 3월에는 8년 만에 ‘까치설’ 등 시 3편을 역시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윤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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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씨 장례준비위원장의 브리핑
【서울=뉴시스】

소설가 박경리씨가 타계한 5일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준비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씨가 간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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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한혜숙·최수지·김현주 그리고 ‘토지’
【서울=뉴시스】

소설가 박경리(1926~2008)가 25년 동안 사역한 한국문학의 거대한 산맥 ‘토지’는 이제까지 3차례에 걸쳐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1979년 한혜숙(57), 1987년 최수지(40), 2004년 김현주(30)가 주인공 ‘최서희’를 열연했다.

1대 ‘서희’한혜숙은 5일 박씨의 부고를 듣고 “안 그래도 지금 박경리 선생님께 꽃다발이라도 보내려고 병원을 알아보고 있던 중”이라며 “내가 게을러서 진작 찾아뵙지 못했다”며 눈물을 쏟았다. 최수지는 “서울에 올라가게 되면 선생님 병실을 찾아뵈려 했는데 내가 너무 부족했다”며 애통해 했다.

한혜숙은 근엄한 여장부 스타일의 서희를 열연했다. 격랑의 역사에 맞서 당주가 된 당당하고 대찬 여성상을 선보였다. 지위와 재물에 걸맞는 위엄과 품위를 극 내내 유지했다.

최수지가 해석한 서희는 고고했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단아한 자세와 미모, 강렬한 눈빛,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고하지 만은 않는 한국 여인상을 상징했다.

김현주는 박씨가 ‘토지’를 탈고한 1994년 이후의 첫 동명 드라마에서 서희를 연기했다. 한혜숙·최수지의 서희와 달리 질곡의 한국사보다는 개인의 삶에 더 치중했다. 5~54세에 걸친 서희를 그렸다. 가족을 잃고 재산을 빼앗긴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젊은 날의 서희뿐 아니었다. 질곡을 겪고 지난날을 관조하는 인생 후반부까지 담아냈다.

서희는 경남 하동의 만석지기 최 참판네 유일한 혈육이다. 서희의 생모 별당아씨는 머슴과 야반도주한다. 아버지 최치수는 살해당하고,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할머니 윤씨마저 병사한다. 이렇게 가족을 모두 떠나보낸 서희는 13세 어린 나이로 만석지기 당주가 된다. 하지만 친척 조준구에게 전 재산을 빼앗기고 만다.

복수를 결심한 서희는 용정으로 떠난다. 일련의 시련을 겪으며 더욱 독해진다. 동시에 고향 땅을 향한 집착도 커져만 간다. 자기 땅을 되찾는 데 손발이 돼줄 머슴 길상과 혼인한다. 그러나 믿었던 길상은 서희를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다. 간난신고 끝에 조상의 땅을 되찾았건만 기대했던 것 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다. 결국, 땅은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인간은 만물의 근원인 땅의 일부일 따름이었다.

박경리가 남긴 마지막 문학작품은 시다. ‘옛날의 그 집’이라는 이 시편의 마지막 3행은 이렇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는 ‘토지’였고,‘토지’는 박경리였다. 그리고 박경리와 토지 사이의 대리자는 ‘서희’였다.

<사진> 왼쪽부터 한혜숙, 최수지, 김현주

이민정기자 benoit051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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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임성균 기자]

소설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씨의 장례식장이 마련된 5일 오후 서울 송파구 풍납동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장례준비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씨가 장례절차에 대해 취재진에게 브리핑 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외동딸인 김영주(62)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67) 시인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9일, 장지는 경남 통영 미륵산 기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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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타계한 '토지' 작가 박경리 연보
'토지'의 작가 박경리, "참 홀가분하게"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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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균기자 tjdrbs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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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장..토지문학공원 노제후 통영서 영면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朴景利)씨가 5일 오후 2시45분께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2세.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은 박씨는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투병하다 4월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달 말 한 차례 고비를 겪은 후 의식불명 상태에서 산호 호흡기에 의존해 왔으며, 이날 오후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산소 호흡기가 제거된 뒤 곧 숨을 거뒀다.

딸과 사위, 외손자들을 비롯해 소설가 박완서, 최일남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최유찬 연세대 교수, 김병익 문학과지성 상임고문, 이상만 정보문화사 사장 등이 임종을 지켜봤다.

1926년 10월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소설가 김동리에 의해 추천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해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 현대문학에 '토지' 1부를 연재하기 시작한 후 '문학사상', '월간경향', '문화일보' 등으로 매체를 옮기며 1994년 8월 집필 25년 만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하소설 '토지' 전 5부를 탈고했다.

1897년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1945년 8월 해방때까지 서울, 만주, 일본 등을 무대로 격동의 근대사를 살아가던 민중의 삶을 그린 '토지'는 한국 문학사의 가장 큰 수확으로 여겨진다.

1980년부터 원주시 단구동,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했으며 1998년부터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왔다.

'토지' 탈고 이후 9년만인 2003년 현대문학에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도 했으나 세 차례만 실은 채 미완으로 남겼다. 이후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 만에 발표하며 시 창작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1950년 남편 김행도(金幸道)씨와 사별했으며 유족은 외동딸인 김영주(62)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67) 시인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5일 동안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씨는 "8일 오전 8시 영결식을 하고 원주로 가서 토지문화관에 들른 후 원주시 단구동 자택터인 토지문학공원에서 노제를 진행하고 이튿날 통영 장지에서 장례를 치를 것"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이어 "거인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충격이 컸다"며 "정부에서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통영시측에서 미리 준비했던 산양읍 미륵산 기슭에 묻히게 된다.

☎02-3010-2631.

mihy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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