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ss base jumper Olivier Vietti-Teppa performs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a complete fly with a Leonardo da Vinci parachute, in the sky over the military airport in Payerne, Switzerland, Saturday, April 26, 2008. The original design of this pyramidal parachute was scribbled by Da Vinci in a notebook in 1483. An accompanying note reads: "If a man is provided with a length of gummed linen cloth with a length of 12 yards on each side and 12 yards high, he can jump from any great height whatsoever without injury. " EPA/LAURENT GILLI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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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ss base jumper Olivier Vietti-Teppa performs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a complete fly with a Leonardo da Vinci parachute, in the sky over the military airport in Payerne, Switzerland, Saturday, April 26, 2008. The original design of this pyramidal parachute was scribbled by Da Vinci in a notebook in 1483. An accompanying note reads: "If a man is provided with a length of gummed linen cloth with a length of 12 yards on each side and 12 yards high, he can jump from any great height whatsoever without injury. " EPA/LAURENT GILLI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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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ss base jumper Olivier Vietti-Teppa lands after performing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a complete fly with a Leonardo da Vinci parachute, at the Military Airport, in Payerne, Switzerland, Saturday, April 26, 2008. The original design of this pyramidal parachute was scribbled by Da Vinci in a notebook in 1483. An accompanying note reads: "If a man is provided with a length of gummed linen cloth with a length of 12 yards on each side and 12 yards high, he can jump from any great height whatsoever without injury. " EPA/LAURENT GILLI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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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ss base jumper Olivier Vietti-Teppa lands after performing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a complete fly with a Leonardo da Vinci parachute, at the Military Airport, in Payerne, Switzerland, Saturday, April 26, 2008. The original design of this pyramidal parachute was scribbled by Da Vinci in a notebook in 1483. An accompanying note reads: "If a man is provided with a length of gummed linen cloth with a length of 12 yards on each side and 12 yards high, he can jump from any great height whatsoever without injury. " EPA/LAURENT GILLI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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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ss base jumper Olivier Vietti-Teppa performs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a complete fly with a Leonardo da Vinci parachute, in the sky over the military airport in Payerne, Switzerland, Saturday, April 26, 2008. The original design of this pyramidal parachute was scribbled by Da Vinci in a notebook in 1483. An accompanying note reads: "If a man is provided with a length of gummed linen cloth with a length of 12 yards on each side and 12 yards high, he can jump from any great height whatsoever without injury. " EPA/LAURENT GILLI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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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man observes a design of wardrobe by Spanish artist Pablo Picasso for the ballet company 'Le Tricorne' at an exhibition inaugurated at the culture centre Bancaja in the coastal city of Valencia, Spain, 25 April 2008. The exhibition shows several Picasso's designs for a number of theatre and ballet shows between 1917 and 1962 and will be opened until 01 June. EPA/MANUEL BRU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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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의 대화 <2> 종교와 과학, 다시 만나다

 [프레시안 신재식/목사·호남신학대 교수]

   
한국은 정교 분리를 엄격히 규정하는 나라다. 그러나 종교와 일상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 세계적으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신도를 거느린 대형 교회가 여러 곳일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집단을 거론하는 뉴스는 늘 사람의 눈길을 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던 특정 교회 신도를 중용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과연 한국의 종교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생명공학을 둘러싼 윤리 논란이 그렇다. 외국의 기독교계가 생명윤리를 아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계는 사실상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일부 불교계는 생명공학의 강력한 지지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신도들이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는 일도 있었다. 테러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이런 선교 여행이 '기독교 패권주의'라고 교계 안팎에서 강하게 비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사건과 맞물려 "신은 망상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외국 지식인의 책이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21세기의 세계를 살펴보면 더욱더 상황은 복잡하다. 현대 사회를 과학기술시대라고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 또한 계속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이 시대의 두 가지 화두라고 할 만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단초를 찾아볼 생각이다. 이 쉽지 않은 작업에 김윤성(종교학자,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신재식(목사, 호남신학대 조직신학과 교수), 장대익(진화론을 연구하는 과학철학자,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세 사람의 젊은 지식인이 나섰다.
  
  이들은 이미 지난 2006년 말부터 과학과 종교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해왔다. <프레시안>과 과학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는 공동으로 이 서신을 정리해 <프레시안>에 1주일에 한 차례씩 싣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 기획을 통해 독자들은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국내외 최신 담론을 접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장대익 교수는 "왜 지금 종교와 과학이 대화를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으로 논쟁을 시작했다. '과학의 시대'에 여전히 그 위세가 커지는 종교가 "또 다른 중세를 야기할지 모른다"는 그의 문제제기는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최근의 지식인의 지적과 궤를 같이한다. 이런 장 교수의 문제제기에 목사 신재식 교수가 답했다.

  
  신재식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 드루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존 템플턴 재단 '과학과 종교 교육 프로그램' 연구자, 풀브라이트 초빙 교수를 지냈다.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쓰고, <근대 신학의 이해>,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을 옮겼다.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오래 전부터 깊은 고민을 해온 목사이다.
  
  신재식 교수는 2006년 12월 26일부터 2007년 2월 8일까지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를 배낭여행했다. 볼리비아의 산타쿠르즈에서 시작한 여행은 코차밤바, 라파스를 거쳐, 칠레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산티아고, 푼타 아레나스, 토레스 델 파이네, 아르헨티나의 칼라파테, 부에노스 아이레스, 이과수 폭포로 이어졌다. 그는 사막부터 빙하까지 이어지는 여행 중에 시장과 성당에 머무르면서, 남아메리카의 사람, 자연, 종교를 둘러보았다. 이 편지의 초고는 코차밤바에서 작성된 것이다. <편집자>

  김윤성, 장대익 선생님께
  
  여기는 코차밤바입니다. 배낭여행 중에 장 선생님 편지를 받았습니다. 코차밤바는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해발 약 2500m 높이에 위치한 고원 도시입니다. 장 선생님께서 계신 미국 땅에서 비행기로 불과 예닐곱 시간 거리인데, 상당히 다른 세계입니다.
  
  1월인데도 온통 따가운 햇볕으로 가득합니다. 이곳 남반구는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이기 때문이지요. 이곳 사람들은 흰 눈으로 덮인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축하하는 서설(瑞雪)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저에게는 한여름에 맞는 새해가 아직도 낯설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낯선 땅 코차밤바에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방문자가 된 듯한 느낌(또는 타자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어디선가 이런 낯선 느낌이 든 적이 있고, 그것도 상당히 익숙한 느낌입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아! 그렇군요! 제가 영화나 책을 통해서 과학의 세계로 들어갈 때 받은 느낌이 그랬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는 아니지만 낯선 곳에 들어선 방문객의 느낌, 이방인의 느낌은 아니지만 아무튼지 익숙하지 않는 세계에서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입니다. 제가 낯선 남미 땅을 여행하면서 느낀 느낌이 처음 과학의 세계에서 느낀 느낌과 비슷하다니, 과학의 영토나 남미 원주민의 땅 모두가 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곳인가 봅니다. 저에게 이 둘 모두는 미지의 땅이고, 이 땅에 들어서는 저는 방문객이고 타자입니다.
  
  이웃사촌, 종교와 과학
  
  장 선생님의 '왜 지금 우리가 과학과 종교를 이야기해야 하나?'라는 편지를 코차밤바의 한가운데에 있는 '9월 14일 광장'(Plaza 14 de Septiembre, 1834년에 건설된 코차밤바 중앙광장으로, 지명인 9월 14일은 코차밤바가 세워진 날짜이다 : 필자)의 나무 그늘 아래서 읽었습니다. '종교와 과학'에 관한 편지를 읽고 있는 저에게, 이곳 광장은 우리 삶에서 종교와 과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학자인 저에게 "과학과 종교"보다는 "종교와 과학"이라는 말이 더 익숙해서 이렇게 쓰겠습니다. 그리고 종교라는 말도 주로 기독교적 입장이 배어 있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양에서 도시의 중심은 광장이지요.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이 지배한 거의 모든 땅에서 광장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지요. 그리고 그 광장에는 서구 문명에서 주인 역할을 한 기독교가 떡 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남아메리카도 예외는 아니지요. 물론 이곳 광장에도 대성당(La Catedral)이 자리 잡고 있고, 주변에도 몇 개의 성당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면 성당 주위에 빼곡하게 인터넷 PC방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인터넷 전화를 하고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거의 한 집 건너 하나가 인터넷 PC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동 전화 등의 통신 관련 사회 기반 시설이 뒤쳐진 나라일수록 인터넷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PC방이 많이 보입니다.) 성당과 인터넷 PC방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웃사촌입니다. 밤에는 성당 종탑과 회랑 조명 불빛과 인터넷 PC방의 네온사인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종교와 과학 기술이 이렇게 만나고 있습니다.
  
  성당과 인터넷 PC방은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습니다. 형형색색의 전통 복장을 한 이 땅의 주인들이나, 오래전에 정복자로 이 땅에 온 유럽 백인들의 후손들이 성당을 지나다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인터넷 PC방에 들러 전화를 하거나 게임을 합니다. 성당에서는 기도를 통해 신과 대화를 나누고, 인터넷 PC방에서는 인터넷 전화나 게임을 통해서 인간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들에게 성당과 인터넷 PC방은 그냥 대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장소입니다. 전통 종교의 상징인 성당과 현대 과학 기술의 상징인 인터넷이 도시 한가운데서 나란히 이웃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라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과학은 우리 삶의 일부
  
  제가 보기에, 종교와 과학이 여전히 이야기되는 까닭은 이 둘이 개인이나 사회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함께 체현되는 현실적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와 과학은 개인의 삶과 무관한 분리된 실재가 아니라 한 개인 안에서 함께 엮여 있는 현실적인 실재입니다.
  
  이것은 꼭 이곳 볼리비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장 선생님이 머무르고 계신 보스턴에는 하버드 대학교나 MIT를 비롯해 좋은 학교들이 많이 있지요. 그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 많은 수가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이지요. 그곳에 있는 과학자들이나 과학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이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도 전자 현미경이나 입자 가속기를 통해 원자와 기본 입자의 세계를 보고, 전파 망원경과 거대한 우주 망원경을 통해 거대한 우주를 들여다보고, 수학을 사용해서 미시 세계에서 대우주까지를 설명하는 과학자가 종교를 갖는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24시간 실험실을 지켜야 하는 과학자가 잠시 짬을 내어 예배나 예불에 참여하고 다시 실험실로 급하게 향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흔적을 찾겠다고 열심히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이렇게 종교를 가지지 않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현대 과학을 거부하거나 무관심한 종교인도 있습니다. 여전히 불교도인 생물학자도 있고, 이슬람교도인 화학자가 있고, 천체 물리학자인 신부도 있고,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목사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여전히 많은 사회에서 종교와 과학은 일정한 접점을 지니고 있는 당면한 현실입니다. 과학이나 과학 기술이 적용되는 문제를 다룰 때, 자연 과학자나 공학자뿐만 아니라, 종교나 윤리 관련 연구자나 이해 당사자들을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사회적 활동인 종교와 과학은 과학 지식과 종교 신념의 충돌이라는 지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차원적 현상이지요. 그래서 이 둘에 대한 논의의 양상은 항상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여전히 개인이나 사회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저는 종교와 과학이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이며, 개인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둘에 대한 논의를 특정한 범주로 일반화시키면서 이 둘을 파악하는 것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갈등이나 조화라는 단순한 범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일반화인 동시에, 둘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구체성과 다양성을 간과하는 접근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 선생님도, 진화 생물학자가 쓴 최근의 종교나 종교와 과학에 대한 저작에서 이 둘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양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것이 바로 종교와 과학이 맺고 있는 관계의 현실을 단순하게 범주화시킬 수 없음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 그 과거, 현재, 미래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세계에서 제일 큰 그리스도 상 '크리스토 데 라 콘코르디아'. ⓒimageshack.us

  그럼 '왜 지금 우리가 과학과 종교를 이야기해야 하나?' 하는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저는 종교와 과학의 만남의 역사적 경험을 되돌아보고, 오늘의 만남의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로 나갈 방향을 살피는 순서로 나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코차밤바의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크리스토 데 라 콘코르디아'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그리스도 상(Cristo de la Concordia,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6.24m의 받침대 위에 세워진 34.20m의 높이의 그리스도 상이다 : 필자)이 멀리 보입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보다 더 큰 40m 높이의 그리스도 상이 두 팔을 벌린 채 높은 언덕 위에서 도시를,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리스도 상이 도시를 두 팔 벌여 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갑자기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도시를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그리스도 상을 세웠을까?' 하고 궁금해졌습니다. '혹시 그리스도상이 도시의 모든 것, 광장의 모든 것, 성당뿐만 아니라 PC방마저 품을 것을 믿거나 기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성당과 PC방을 함께 품는 그리스도, 종교와 과학마저도 내려다보고 함께 품는 기독교를 꿈꾼 것은 아닌가? 글쎄, 기독교인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상의 이름을 생각하니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름에 들어 있는 "concordia"는 원래 "조화와 평화"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 상을 우리말로 하면 "평화의 그리스도"나 "조화의 그리스도"가 되지요. 어쩌면 이들에게 그리스도 상은 '종교와 과학의 조화'나, '종교와 과학의 평화'를 향은 꿈이 투사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교와 과학의 평화와 조화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나 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런 꿈을 허망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으로 여기겠지요. 기독교가 외래 종교인 한반도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도 선뜻 수긍할 수 없습니다.
  
  왜 수긍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종교와 과학이 함께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편합니다.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종교와 과학은 각각 서로 다른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성직자와 과학자는 다른 땅을 다스리는 두 영주이고, 이 둘은 늘 긴장과 갈등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니 종교와 과학을 하나로 품으려는 시도는 상당히 무모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모하다고 느끼는 이러한 시도, 즉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와 과학을 함께 포용하려는 시도는 서구 기독교가 지닌 오랜 전통이었고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근대 이전, 종교와 과학이 두 권의 책으로 만나다
  
  이 문제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잠깐 짚어 볼까요. 제가 머무르고 있는 남아메리카를 떠나 잠시 유럽으로 가 봅시다. 4세기경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래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구 문명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기 전까지 기독교의 권위와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서구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지요. 장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여전히 서구 사회에서 무신론자는 예외적인 사람입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느 영역도 기독교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모태였고 심장이었습니다.
  
  이런 서구 문명을 이끈 지성인은 누구였을까요? 유럽의 대학은 원래 성직자와 교회 관련 직무를 수행할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지적 활동의 중심지가 대학과 수도원이었습니다. 당시 지식의 중심에는 기독교 성직자들이 있었던 거지요. 13세기 이슬람 세계를 통해서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과학이 중세 유럽으로 들어왔을 때, 이를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도 성직자였습니다. 이들이 종교적 지식은 물론, 철학, 수학, 수사학, 공학 등 그야말로 '모든' 지식을 담당했습니다. '신에 관한 탐구'와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이들의 활동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자연 과학(science)에 해당하는 자연에 대한 탐구는 당시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죠. 중세 지성인들에게 자연 탐구는 기독교 신앙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때까지, 자연을 탐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며, 자연에 대한 탐구는 기독교 신앙의 실천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중세 최고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그로세테스테(1175-1253년,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주석을 달고, 그리스 어와 아랍 어 과학 저술들을 라틴 어로 번역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 역임하고, 기하학과 광학, 천문학 분야에 저작을 남겼다 : 필자)는 주교였으며, '중세의 갈릴레오'로 불린 로저 베이컨(1214-1294년, 영국 서머싯 출신으로, 실험 과학을 중시한 대표적 중세 인물이다. 수학, 천문학, 광학, 연금술 등에 관심을 가졌다 : 필자)은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으며, 15세기의 최초 물리학자로 무한한 우주에 대한 견해를 처음으로 제시했던 쿠사의 니콜라스(1401∼1464년, 독일 출신 신학자이며 철학자로, 기하학과 논리학, 천문학 등에 관심을 가졌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지구와 같은 세계가 무한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 필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었지요.
  
  17세기에 과학 혁명의 위대한 개척자나 설립자로 불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과학이 자신들의 신앙과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와 뉴턴은 그들의 새로운 견해가 자신들의 신학에서 파생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특히 뉴턴은 종교적인 열광자로 불릴 정도로, 전 생애에 걸쳐 신에 대한 탐구의 작업을 수행했었죠. 뉴턴에게 과학과 신학과 연금술은 분화되지 않은 통일된 전체였습니다. 이렇게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뉴턴과 근대 화학의 아버지 로버트 보일을 비롯해 18세기까지 유럽에서 과학 작업에 종사한 대부분의 과학 혁명의 선구자들은 실제로 과학자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학 연구를 했던 깊은 신앙인들이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신학 교육이 사제가 되지 않더라도 꼭 들어야 하는 일종의 교양 과정과도 같은 것이었죠. 그중의 예외는 뉴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과학 혁명의 시기까지 기독교는 자연에 대한 탐구를 의식적으로 억압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장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권의 책"이라는 생각이 그 대답입니다. 기독교가 문화의 모태였던 당시 사람들은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은 사람들에게는 두 권의 책, 즉 '성서라는 책(Book of Bible)'과 '자연이라는 책(Book of Nature)'을 주었습니다.
  
  신이 성서와 자연이라는 두 권을 책을 쓴 저자이기 때문에 두 권의 책의 내용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저자를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신이 쓴, 인간을 위해 준 두 권의 책은 서로 보완하면서 그 저자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장려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자연이라는 책의 탐구를 통해서 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전통입니다.
  
  과학의 독립 선언, 종교에 도전하다
  
  이런 상황이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점차 바뀝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오늘날 과학을 의미하는 'science'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고, 19세기 후반에는 이 분야의 작업을 전담하는 새로운 지식 계급에 '과학자'(scientist)라는 명칭이 사용됩니다. '과학자' 집단의 등장과, 이들이 자연에 대한 탐구, 즉 과학을 전담하게 되면서, 종교인들은 더 이상 모든 지적 작업을 독점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자연 법칙에 따른 자율적인 세계라는 기계론적 인식과 진화론의 등장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도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자연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에 따라, 과학과 이를 응용하고 적용한 기술의 효율적 결과가 잘 확인되면서, 종교의 영역은 축소되고 영향은 약화됩니다.
  
  결국 자연은 과학자의 영역(물리적 세계는 뉴턴 물리학의 영역, 생명 세계는 다윈 적자 생존론의 영역)에 속하고, 역사와 인간과 사회와 윤리 도덕은 여전히 종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 영역은 조금씩 넓어집니다. 종교가 맡고 있던 설명들이 하나씩 차례차례 과학적 설명으로 대치되고, 이 과정에서 종교는 수세와 방어로 일관한 것이 지난 300년간 종교와 과학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종교가 과학에게 자연이라는 영토를 순수하게 이양한 것은 아니지요. 17세기 이후 성직자와 과학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다툼은 자연적 지식에 대한 권한과 지식 판단의 우월권이라는 특권을 어느 집단이 갖느냐 하는 주도권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19세기 전까지 서구에서 기독교와 과학이 철저하게 대립하거나 화해할 수 없는 긴장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합리주의적 분위기에서도, 칸트나 루소와 같은 철학자들은 과학과 종교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이라고 주장했을 따름입니다. 즉 18세기까지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전쟁'으로 치달은 적이 없습니다.
  
▲존 드레이퍼. ⓒ프레시안

  종교와 과학이 전쟁 상태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준 것은 구체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출판된 존 드레이퍼(1811∼1882년, 영국 출생 미국 과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사진작가. 뉴욕 대학교 교수, 뉴욕 대학교 의과 대학 설립자, 미국 화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 필자)의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사>(1874년)와 앤드루 화이트(1932∼1918년, 뉴욕 출신으로 역사학자이며 교육자. 코넬 대학교 공동 설립자로 초대 총장이 되었으며, 이후 외교관과 미국 역사학회 초대 회장 역임했다 : 필자)의 <기독교 국가에서 과학과 신학의 전쟁사>(1896년)는 책 이름만큼이나 기독교가 과학을 전투적으로 억압했다고 표현합니다. 이 책들의 출판과, 더불어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부정적인 태도와, 창조-진화 문제와 관련해 벌어진 몇 번의 재판이 오늘날 종교와 과학이 갈등 관계나 전쟁 상태에 있다는 인상을 결정적으로 심어 주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종교와 과학의 역사를 갈등 관계로 보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입니다. 오히려 서구 역사에서는 오랫동안 종교와 과학은 동거하던 상태였습니다. 코차밤바를 내려다보면서 종교와 과학을 한품에 안으려는 듯한 그리스도 상의 꿈은 과거의 사실(史實)과 이에 대한 향수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19세기적 화두, 종교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있는가?
  
▲앤드루 화이트. ⓒ프레시안

  오늘날 과학자들의 종교에 대한 설명, 특히 진화론적 입장에서 종교를 설명하고, 종교의 존립 문제를 논하는 것에 대해 좀 생각해 보죠. 사실 과학이 야기한 문제로 인해 종교가 고민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지요. 멀리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출발한 유대교가 지중해 문화권 전체로 확장되고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고대 그리스의 합리적 사유를 만날 때부터 이런 종류의 고민은 있었습니다. 가까이는 코페르니쿠스에서 뉴턴에 이르는 과학 혁명기 이후 과학의 독립 선언과 지속적인 영역 확장을 마주하게 된 기독교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었습니다.
  
  19세기 초에 서구 지성인 사이에서 제일 중요한 화두는 '종교가 과연 더 이상 존재할 수 있는가?' '더 이상 신학이 가능한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구 기독교의 권위와 가르침이 도전을 받았습니다.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많은 서구 근대 사상가들은 기독교의 권위의 정당성과, 그때까지 당연시해온 교회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종교적 권위의 뒷받침에 의해 신비의 영역, 신의 활동 영역으로 남아 있는 많은 부분들을 순순하게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 법칙과 자율성을 지닌 세계라는 새로운 세계관은 당연히 신의 존재와 기적을 비롯해서 이제까지 신의 활동으로 여겨졌던 영역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습니다.
  
  기존의 교리가 도전받고, 세계와 자연에 대해 종교적인 설명보다 과학적이거나 자연주의적 설명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자연의 영역에서 자연 과학이 그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점차 인간과 사회의 영역마저 자연 과학은 그 주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제 사회는 신이나 교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로 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과학의 자율성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이 교회로부터 또는 기독교로부터 자율성을 선언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뭉뚱그려서 '세속화'라고도 말하지요. 이러니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종교의 위기, 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타났습니다. 이게 19세 초반 서구 사회의 문제, 보다 정확하게는 기독교의 문제였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이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할 방도를 찾습니다. 자연 과학의 도전에 대한 19세기의 종교적 대응은 주로 과학이 침범할 수 없는 종교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슐라이어마허, 칸트, 헤겔입니다. 이들은 자연 과학과 구별되는 종교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을 각각 제시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내면적 감정을, 칸트는 도덕이나 윤리의 영역을 과학이 침범할 수 없는 종교만의 영역으로 제시합니다. 심지어 헤겔은 역사가 바로 종교의 영역이라고 선언합니다. 이후 서구 문화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태도는 이 둘이 각각의 영역을 달리한 채로 각자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 전통에서도 신학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나 인간의 내적 상태였습니다.
  
  코차밤바의 광장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뜨입니다. 사람들은 성당으로 들어가지만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마 잠깐 기도를 드리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PC방으로 들어간 사람은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터넷 전화를 해도 컴퓨터 게임을 해도 금방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성당과 인터넷 PC방 모두 거의 거쳐 가는 곳이지만 머무르는 시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 있는 상황이 눈에 뜨입니다. 성당은 오랜 건축물입니다. 이곳저곳 훼손된 곳이 많고, 또 퇴락한 채 거의 방치되고 있는 성당도 눈에 자주 뜨입니다. 아마 성당을 수리하거나 새로 짓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PC방의 수는 나날이 늘어납니다. 물론 새로 짓고 단장한 곳이라 깔끔하고 합니다. 쇠락한 성당과 새로 단장한 인터넷 PC방의 대조는, 그리고 어느 곳에 오래 머무르는가는 퇴락한 종교와 욱일승천하는 과학이라는 오늘날 둘의 현실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과거 서구 문명의 상징을 하늘로 치솟는 첨탑을 지닌 고딕식 대성당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 문명의 상징은 거대한 입자 가속기나 전파 망원경, 컴퓨터나 이동 전화가 될 것 같습니다. 문명의 상징이 바뀐다는 것은 이미 다른 문명이라는 이야기지요. 설사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성당의 첨탑이 아니라 전파 망원경이나 휴대전화를 통해서 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300년 동안 놀라운 발전을 한 과학은 오늘날 우리 문명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과학자는 과거 중세에 성직자가 했던 역할을 대신하는 오늘의 사제와 같습니다. 종교는 여전히 존속하지만, 그 영향력은 예전과 같지 않고, 어쩌면 우리 삶과 사회에서 향신료와 같은 부수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리고 무대 뒤로 사라진 줄 알았던 종교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장 선생님이 언급한 것처럼, '종교 그것'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종교와 과학'이 다시 함께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천년에 종교와 과학이 다시 만나다
  
  서구 지성계에서 한동안 따로 놀던 '종교와 과학'은 20세기가 끝날 즈음부터 다시 서로 만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1990년대 이전까지도 종교'와' 과학 또는 종교와 과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는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끌지 못했고, 특히 학문적인 담론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를 거치면서 동시 다발적으로 종교와 과학에 대한 학술활동과 저술이 급격히 늘어나고, 언론의 대대적 조명을 갖게 됩니다.
  
  <자이곤: 종교와 과학 저널(Zygon: Journal of Religion and Science)> 이외에 이 분야의 학술지와 소식지가 새롭게 창간되고,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집중하는 전문 연구 기관이 15개 이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렇게 관련 연구소의 증가, 학술지의 증가, 관련 학술 행사의 빈번한 개최, 미국의 '동등 교육법'(진화론과 창조론을 과학 시간에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창조론자들의 주장이 반영된 법으로 미국 아칸소 주와 루이지애나 주에서 1980년대 초반에 통과되었다가 위헌으로 판결을 받았다 : 필자) 재판 등에 대한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 관련된 학자와 저술의 급격한 증가 등이 불과 10여 년 사이에 겪은 변화입니다. 이 변화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아마 지난 10여 년간 엄청나게 늘어난 '종교와 과학' 분야의 출판물일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종교와 과학이 새롭게 만난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하느냐를 조금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 보지요. 하나는, 이 분야의 학술 활동이나 저작에 관련된 당사자들이 누구인가? 다른 하나는 이슈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고 나서 이런 만남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말씀드리지요.
  
  장 선생님이 언급했다시피, 최근 들어 진화론적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저작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조금 전까지 저는 대성당 옆 의자에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었습니다.) 생물학, 철학, 심리학, 인류학 등 각 분야에서 제시하는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마치 온갖 색깔의 폭죽이 동시에 터지면서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의 화려한 '절정'이자 '마지막'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은 이전에 다른 폭죽들이 벌써 이런저런 모습으로 하늘을 밝혔다는 말이지요. 누가 폭죽을 터트렸는지 색깔별로 살펴볼까요?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분야별로 보면,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선 종교 쪽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신학, 종교학, 여러 분야의 생물학, 철학, 역사학, 인류학 등등을 언급할 수 있겠네요.
  
  물론 전공 분야에 따라 종교나 과학 또는 종교와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가 획일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학자라고 과학에 대해 모두 부정적이라거나, 과학자라고 해서 종교에 부정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다양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 가운데서 현대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진화론을 비롯한 현대 과학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장 선생님도 언급하셨듯이, 진화 생물학자 가운데서도 종교의 가치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 종교와 과학이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 등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신학이나 종교 쪽에서 보면, 자연 과학과 대화는 두 부류로 나뉩니다. 우선 대화에 적극적인 대표적인 사람들로, 아서 피코크, 존 폴킹혼, 이언 바버, 로버트 러셀, 셀리아 딘드럼먼드 등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과학자-신학자(scientist-theologian)'로 불리는데, 자연 과학 분야의 박사 학위 소지자로 과학계에서 활동하다 성직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테드 피터스, 필립 헤프너, 존 호트 등의 신학자들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적극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창조 과학이나 지적 설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죠. 창조 과학자나 지적 설계론자의 공통점은 이 세계가 지성을 가진 존재, 즉 신적 존재에 의해 설계(design)되었으며, 진화론을 반대하죠. 윌리엄 뎀스키, 마이클 비히, 필립 존슨, 뒤앤 기시(Duan Gish)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자연 과학이나 철학 쪽에서 보면 많은 사람을 언급할 수 있을 겁니다. 근래 종교에 관한 저작을 출판한 사람들로, 대니얼 데닛, 스콧 애트란, 파스칼 보이어, 스티븐 핑커, 마이클 루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에드워드 윌슨, 데이비드 윌슨 등등. 모두 화려한 스타들이죠. 물론 이들 중 몇을 제외하고는 종교에 대해 비교적 진화론적 시각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달리 프랜시스코 아얄라, 케네스 밀러, 존 러프가드 등은 자연 과학자이면서 과학 지식과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진행되는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관심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종교와 과학의 역사적 상호 작용에 대한 관심인데, 주로 과학사가들이나 역사학자들이 논의에 참여합니다. 존 부룩, 데이비드 린드버그, 로널드 넘버스, 리처드 올슨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종교와 과학의 방법론에 관심을 가지면서 둘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이나 차이 등을 논의합니다. 주로 과학 철학이나 종교 철학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웬츨 밴 호이스틴, 낸시 머피, 마이클 스텐마크 등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종교와 과학의 이슈를 주로 '창조와 진화', '인지 과학과 종교', '대폭발과 창조', '인공 지능과 종교'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다루는 학자들은 직・간접적으로 이런 논의에 참여합니다.
  
  왜 종교와 과학이 최근에 다시 논의되는가?
  
  그렇다면 최근 들어 종교와 과학에 관한 관심과 논의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런 변화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이지만, 저는 그 요인을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내적으로 신학과 과학은 각각 자신의 지적 능력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자기 학문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서로를 보는 시각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졌기 때문에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죠. 먼저, 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다른 사회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신학 작업 역시 구성적(constructive)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신학 역시 시대와 상호 작용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인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경원시했던 자연 과학에 익숙해질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생태 문제와 관련한 생태 신학 작업에서 자연 과학의 도움이 필요해졌고, 현대 과학 기술의 성취로부터 현대 신학이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새롭게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과학을 이해할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최근 과학의 본질에 대한 과학 철학의 논의 등을 꼼꼼하게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과학의 객관성과 중립성 등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과학이 더 이상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 과학을 무조건 피하던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자기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이, 서로를 보는 눈을 바꾸었으며, 오히려 대화를 촉진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렇게 과학의 자기 한계를 직시하는 흐름과 조금 다른 과학적 흐름도 있습니다. 과학 지식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자연 현상 말고도 인간 문화의 모든 영역을 과학적 관점에서 일관성 있게 발언하려는 시도가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것은 과학자들이 한 명의 학자로서 당연히 마주하게 되는 지적 도전이겠지요. 사회 생물학이나 진화 심리학 등의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시도는 이런 흐름에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외부적 요인, 즉 사회적・경제적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와 과학에 대한 담론이 거의 서구 기독교권, 특히 영미를 중심으로 영어권에서 전개되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기독교 영향 아래에 있는 사회에서 발생한 것이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야기되는 결과가 기존의 기독교 가르침과 충돌을 일으킬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회적 압력이 증가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아직도 지속되는 창조 대 진화 논쟁, 유전자 조작과 생명과 인권 논쟁 등 이런 문제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해서 관련된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와 과학의 문제를 다루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도 여기에 일조하고 있고요. 여기에 경제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90년대 들어 존 템플턴 재단(John Templeton Foundation, 영국 투자가였던 존 템플턴 경이 1987년에 세운 재단으로 흔히 템플턴 재단으로 불린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매해 수여하며, 최근에는 과학과 종교(영성)에 관련해서 집중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 필자)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학술 활동에 엄청난 지원을 했고 이것이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의 복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출판사들의 상업주의도 많은 서적들이 출판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왜 지금 종교와 과학을 논의하는가?'에 대한 제 입장을 좀 더 거시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답장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저는 종교와 과학은 인류가 오랜 역사 과정에서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 낸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술이나 정치나 경제도 일종의 메커니즘입니다. 메커니즘 대신 '생존을 위한 시스템'이나 '모듈'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인류나 또는 특정 사회는 생존을 위한 메커니즘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고, 동시에 사용합니다. 각 메커니즘은 일정 부분 자기 영역과 자기 담론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메커니즘과는 서로 보완적일 때도 있고 경쟁적일 때도 있습니다. 인류는 이런 메커니즘 하나에만 독점적 지위를 주지 않고,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메커니즘의 비중을 달리하면서 각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합니다.
  
  그런데 특정 메커니즘이 그 메커니즘이 만들어진 기능이나 활동하는 영역을 벗어나서 지나치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 인류나 특정 사회는 자동적으로 자율적으로 그 비대해진 특정 메커니즘을 제어하려고 합니다. 즉 특정 메커니즘의 독주로 인해 인류나 특정 사회가 생존의 위협을 받거나 적응의 정도가 심하게 훼손될 때, 그 메커니즘을 제어하기 위해 다른 메커니즘을 사용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사회의 생존을 위협할 지경에 이를 때, 종교는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속박을 받았습니다. 그 제어 과정이 혁명처럼 과격하게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고, 지속적이고 완만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서구 문화에서 종교에서 과학으로의 주도권 이행을 과도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인류 또는 서구 사회의 자동적인 제어 과정이라는 흐름에서 보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날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강요하는 듯한 사회적 압력 또한 마찬가지 시각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류의 생존력 강화를 위해 봉사해야 할 과학이라는 메커니즘이 이제는 핵무기나 환경 파괴 등의 부작용을 통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자, 과학을 제어하기 위한 다른 메커니즘이 부상해야 했고, 그 역할이 현재 종교에 맡겨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다른 경제나 정치와 같은 메커니즘도 있지만, 가장 큰 제어 역할을 종교라는 메커니즘에게 맡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가 뭔지 과학이 뭔지 잘 알고 있는가? 이 둘이 서로를 보는 시선은 무엇인가? 이런 것이 더 궁금해집니다.
  
  '왕의 귀환'인가 '탕자의 귀가'인가?
  
  저는 서구 기독교 문화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이나, 신학자들이 과학과 치열하게 대화하려고 하는 최근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우리 안의 타자', 서구 사회에서 종교와 과학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구 문화에서 한때 함께 지내다 언제부터인지 서로에게 타자가 되어 버린 종교와 과학이 다시 만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귀환!
  
  종교와 과학이 다시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무척 궁금합니다. '왕의 귀환'인지 '탕자의 귀가'인지? <반지의 제왕>처럼 왕의 귀환을 통해 당면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할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실패한 아들로 여길지는 앞으로의 만남이 보여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서로가 타자성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여겨집니다.
  
  이를 위해서 내 안의 타자성을 서로 확인하고, 우리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토대로 종교는 과학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과학은 종교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좀 더 논의를 이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김윤성 선생님께서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고, 과학이 무엇인지, 비슷한 점이 있다면 그것대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대로, 좀 이야기를 풀어 주시길 기대합니다.
  
  여행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상식을 깨는 경험을 줍니다. 남반구에서는 햇볕 따뜻한 양지는 북쪽입니다. 당연히 북향집이 훨씬 비싸지요. 한 여름에 성탄절과 새해를 맞이합니다. 여행은 저를 낯선 것에 익숙하게 만들고, 새롭게 배우게 합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언어가 다른 낯선 사람들과 만날 때는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그때는 공통의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합니다. 제가 스페인어를 하거나 이곳 사람들이 한국어를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둘 다 불가능하다면 대안을 찾아야죠. 가령 영어로 이야기를 한다거나 말입니다. 둘 모두가 자신의 언어만을 고집한다면 서로의 의사소통은 힘들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려워집니다. 그냥 배움의 태도가 우선인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교와 과학의 만남도 여행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낯선 타자와의 만남, 이것에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이겠죠. 아니면 의사소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거나. 자신의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독백이며, 다른 말하면 지역주의나 영역주의를 고수하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와 과학의 만남으로 인해서, 종교가 존재 근거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귀 기울임의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김윤성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2007년 1월 3일
  코차밤바에서
  신재식 올림

신재식/목사·호남신학대 교수 (tyi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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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 성과 이름 이야기

전형적 미국인을 상징하는 엉클 샘’ 캐리커처.

대개 영국인이나 미국인들의 이름은 세 부분으로 이뤄진다. Edgar Allan Poe에서 Edgar는 first name, Allan이 middle name, Poe는 last name이다. 표기할 때는 ‘Poe, Edgar Allan’처럼 성을 먼저 쓰기도 하는데, 이 경우 성 다음에 반드시 comma를 찍어야 한다. ‘한인한담閑人閑談 The Idle Thoughts of an Idle Fellow’과 ‘보트의 세 사나이 Three Men in a Boat’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극작가 제롬(1859~1927)의 full name은 Jerome Klapka Jerome으로 first name과 last name이 같다.

이름 각 부분에 대한 명칭

(1) name given at birth(태어나면서 얻은 이름) : first name = forename = pre-name = given name

(2) inherited name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름) : last name = surname(성) = family name(가문 명)

(3) names other than one´s surname (성 이외의 모든 이름) : forenames = pre-names = personal name

(4) maiden name = the surname that a married woman had at birth : (결혼한 여성이 태어날 때 받은 성)

surname의 유래

The word surname derives from Latin super(‘over’ or ‘above’), meaning ‘additional name’. As early as the 14th century it was also spelled as sirname or sirename(suggesting that it meant ‘man´s name’ or ‘father´s name’).

(surnam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super(‘over’ or ‘above’)에서 나온 말로 ‘부가적인 이름’이란 의미다. 이 단어가 일찍이 14세기에는 sirname 또는 sirename이라고 철자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 단어가 ‘남자의 성’ 또는 ‘아버지의 성’을 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일본 천황(天皇 heavenly sovereign)은 현인신(現人神·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인간신)으로 숭배받는다. 이러한 ‘현인신 숭배(Emperor God-Worship)’사상에 근거해 일본 왕가(王家)는 성(姓)이 없다. 현재 천황의 full name은 Akihito(裕仁·1933~)이고, 직전 천황의 full name은 Hirohito(昭和·1901~ 1989)이다. 그 이유는 다르지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도 대부분 별도의 성이 없다.

middle name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인 John Fitzgerald Kennedy의 이름을 보자. 그의 아버지 Joseph Patrick ‘Joe’ Kennedy, Sr.(1888~1969)는 Rose Elizabeth Fitzgerald와 결혼했다. 그녀는 보스턴시장과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John Francis ‘Honey Fitz’ Fitzgerald (1863~1950)의 딸이다.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영어권 관습이다. 그래서 그녀는 Rose Fitzgerald Kennedy가 되었다. 이 부부의 둘째아들이 John Fitzgerald Kennedy다. 결국 그의 first name은 외할아버지(maternal grandfather)의 first name이고, middle name은 외할아버지의 last name(=어머니의 middle name)이고, last name은 아버지의 last name이다.

Truman´s middle initial

Jon F. kennedy의 F.는 Fitzgerald를 대신(stand for)하지만, Harry S Truman 대통령의 ‘S’는 이니셜(initial·머리글자)이 아니고 그냥 ‘S’다.

Truman did not have a middle name, only a middle initial. In his autobiography, Truman stated, “My Grandfather Truman´s name was Anderson Shippe Truman and my Grandfather Young´s name was Solomon Young, so I received the S for both of them.” His parents chose ‘S’ as his middle name, in attempt to please both of Harry´s grandfathers, but it didn´t stand for anything, as was a common practice among Scotch-Irish.”

(트루먼은 중간 이름이 없고 중간 이니셜만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할아버지 이름은 Anderson Shippe Truman이었고 외할아버지의 이름은 Solomon Young이었다. 그래서 나는 양쪽으로부터 이 S를 부여받았다.” 부모가 양쪽 할아버지를 모두 즐겁게 하기 위하여 중간 이름으로 S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어떤 것도 대신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Scotch-Irish(미국에 이주한 스코틀랜드계열 아일랜드 사람)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middle name의 다른 의미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은 ‘이니셜’이 아닌 ‘S’자를 가운데 이름으로 썼다.

구어에서 ‘두드러진 특징’ ‘눈에 띄는 성격’ ‘장기(長技)’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대화에서 ‘That´s my middle name’은 ‘That´s my trunk.(그게 저예요.)’ ‘That´s how I´m known to others.(그게 저예요.)’ ‘That´s my area of expertise.(그게 내 전공이야. 그것에 대해서 내가 좀 알아)’와 같은 취지로 사용된다.

[작문]나는 정직한 사람이야.

Honesty is my middle name.

이름이 한 부분인 경우와 두 부분 이상인 경우

Douglas MacArthur(1880~1964)처럼 이름이 두 부분으로만 된 경우도 있다. 미군에서는 병사의 이름을 세 부분으로 기록하는데, 중간 이름이 없으면 NMN(=No Middle Name)이라고 표기한다.

names other than one´s surname (성 이외의 모든 이름), 즉 forenames(=pre-names · personal name)이 셋 이상인 경우도 있다.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아버지이고, 제43대(현) 대통령 George Walker Bush는 아들이다.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 1973)의 full name(성+명=성명)은 Pablo Diego Jose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i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isima Trinidad Clito Ruizy Picasso다. 21개 단어, 111자에 달한다. 부모 성에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대부, 대모 등 직계의 부계 모계에다가 방계의 성명까지 합쳐놓았다. ‘피카소’는 어머니 성이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중국 등에선 부모가 두 사람 성 가운데 하나(주로 아버지 성)를 자녀의 성으로 골라준다.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도 마찬가지지만 따로 선택하지 않으면 어머니 성을 따른다.

▼ 닉네임 이야기

The term ‘nickname’ originated as an Anglo-Saxon word: ekename. In the Anglo-Saxon tongue, ‘eke’ meant ‘also’ or ‘added.’ The term seemed just a bit akward to pronounce; so, it became slurred, converting ekename to nekename and finally to become nickname.

(‘닉네임(nickname 애칭·별명)’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앵글로-색슨 말인 ekename이다. 앵글로-색슨 말에서는 eke가 also(또한)나 added(덧붙인)를 의미했다. 이 단어는 발음하기가 약간 어색했다. 그래서 분명치 않게 굴려 발음하다보니 ekename이 nekename으로, 마침내는 nickname이 되었다.)

A nickname is a name of a person or thing other than its proper name. It may either substitute or be added to the proper name. It may be a familiar or truncated form of the proper name, such as Bob, Bobby, Rob, Robbie, Robin, and Bert for Robert. A nickname is sometimes considered desirable, symbolizing a form of acceptance, but can often be a form of ridicule.

(닉네임은 사람이나 사물이 갖는 고유명(proper name)이외의 이름이다. 그것은 고유명을 대신하거나 고유명에 덧붙일 수 있다. 그것은 고유명과 유사하거나 끝을 자른 형태다. 예를 들면 Robert를 대신한 Bob, Bobby, Rob, Robbie, Robin, Bert 같은 것이다. 닉네임은 때로는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어 일종의 호의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종의 조소로 간주될 수도 있다.)

성명 속에 들어 있는 애칭

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는 부분이 애칭이다. 미국의 39대 대통령 카터(James Earl ‘Jimmy’ Carter)의 애칭은 지미(Jimmy)이고, 미국의 55대 하원의장 오닐(Thomas ‘Tip’O´Neill·1912~1994)의 애칭은 팁(Tip)이다.

Jonathan Mayhew ‘Skinny’ Wain-wright IV(1883~1953) was a United States Army general and the commanding officer of Allied forces in the Philippines at the time of their surrender to the Empire of Japan during World War II. General Wainwright is a recipient of the Medal of Honor and on September 14, 1945 a Ticker Tape parade was held in his honor.

(조너선 메이휴 ‘스키니(말라깽이)’ 웨인라이트(1883~1953)는 미국육군 장성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항복할 당시 필리핀 연합군 사령관이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명예훈장을 받았으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1945년 9월14일 티커테이프 퍼레이드가 거행되었다.) ※ ticker tape parade: (미국 New York시 전통의) 색종이 테이프가 뿌려지는 행진.

▼ 다른 뜻으로 쓰이는 이름들

군대 간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Dear John)의 하나.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의 대표적인 이름은 철수와 영희다. 영어의 경우는 주로 Jack Jim Joe John Jones Paul Peter 등등의 남자이름이 사용되고 Jack의 상대어로 Gill(여자이름)이 사용된다.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용례를 보자.

Slim Jim 깡마른 사람
the Jones 이웃사람
Dear John 이혼 요구서
Joe[joe] six-pack 미국의 서민
Peter·Paul & Jack·Gill 장(張)씨·이(李)씨 & 갑남을녀
Brother Jonathan 브라더 조너선(전형적인 미국사람)
Uncle Sam 엉클 샘(전형적인 미국사람)
Yankee 양키
John Bull 전형적인 영국사람

Slim Jim

뜻: ① 깡마른 사람 ② key를 차 안에 두고 밖에서 문이 잠겨버려 열지 못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가는 금속 조각

I left my keys in my ´06 G6 Pontiac, and I am locked out. I had access to some tools, but couldn´t get back in. I don´t have a Slim Jim. I was not successful in using a coat hanger.

(2006년형 G6 Pontiac 안에 키를 놔두고 문이 잠겼다. 몇 가지 도구를 써보지만 들어갈 수가 없었다. Slim Jim이 없다. 옷걸이도 써봤지만 허사였다.)

Jones

비서가 보스에게 A Mr. Jones has arrived to see you(‘존스’라는 분이 사장님을 뵈려고 오셨습니다)에서는 Jones가 특정인물을 지칭하지만 일반적으로 평범한 보통사람을 이를 때 쓴다. 흔한 이름이 Jones[d,ounz]이기 때문이다. 복수형은 Joneses[d,?nziz]다. the Jones는 ‘평범한 가정’을 말하고, the Joneses는 ‘이웃 사람들’을 말한다. ‘keep up with the Joneses’는 미국 구어에서 ‘이웃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다’ ‘이웃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분수 이상의 생활을 하다’는 의미의 성구(成句)로 사용된다.

[작문] 다른 사람이 날 앞서가는 건 싫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한다.

I don´t want other people to get ahead of me. I try to keep up with the Joneses.

I don´t want other people to get ahead of me. I try not to fall behind the Joneses.

[대화] A: It´s really difficult to keep up with the Joneses.

B: You don´t have to do the same thing that everyone else does.

A: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하는 건 정말 힘들어.

B: 남이 한다고 해서 너도 꼭 할 필요는 없어.

Dear John

뜻: ①(병사에게 보낸 아내의) 이혼 요구서 ②(애인이나 약혼자가 보낸) 절연장[절교장]

[대화] A: Robert got a dear John (letter) from Vivian.

B: How come? Has their relationship no future?

A: 로버트가 비비언한테서 절교를 당했대.

B: 왜? 장래에 대한 확신이 없나?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전 미국 대통령의 ‘미들 네임’은 외할아버지의 성에서 따왔다.

The term ‘Dear John letter’ refers to a letter written by a woman to her husband or boyfriend to inform him their relationship is over, usually because she has found another man. While the exact origins of the phrase are unknown, it is commonly believed to have been coined by Americans during World War Two.

(Dear John letter라는 말은 흔히 여자가 다른 남자가 생겨서 그들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쓴 편지를 말한다. 이 말의 정확한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믿어진다.)

As letters to servicemen from wives or girlfriends back home would typically contain affectionate language, a serviceman receiving a note beginning with a curt ‘Dear John’(as opposed to the expected ‘Dear Johnny’, ‘My dearest John’, or simply ‘Darling’, for example) would instantly be aware of the letter´s purpose.

(고국에 있는 아내나 여자 친구가 군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애정 어린 언어가 포함되는 것이 전형적인 편지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Dear John - 예를 들면 예상했던 Dear Johnny(사랑하는 조니), My dearest John(나의 가장 사랑하는 존), 혹은 간단하게 Darling(여보)과는 반대되는 - 이라고 간략하게 시작하는 짧은 편지를 받은 군인은 곧바로 그 편지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 Johnny: John의 애칭

There are a number of theories on why the name John is used rather than any other. John was a common name in America at the time the term was coined. John is also the name used in many other terms that refer to an anonymous man or men, such as ‘John Doe’ or ‘John Q. Public’.

(왜 다른 이름이 아닌 존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이 있다. 이 용어가 생겨난 당시에는 John이라는 이름이 많았다. 또한 John은 ‘아무개(John Doe)’나 ‘일반 대중(John Q Public)’과 같이 익명의 사람이나 사람들을 이르는 많은 다른 용어에 사용된 이름이다.) ※ John Doe: 이름 없는 사람, 모씨(某氏), 아무개, John Q Public: (구어) 평균적 일반 시민, 일반 대중

Further, there existed prior to World War Two a radio program starring Irene Rich which was presented as a letter written by a gossipy female character to her never-identified romantic interest. It was both titled and opened with the words ‘Dear John’, and may have contributed to the genesis of the term.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여성 수다쟁이 캐릭터가 연애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지(未知)의 사람에게 쓴 편지로 소개된 이렌 리치(Irene Rich) 주역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Dear John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타이틀이 붙여져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이 용어의 생성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렌 리치(Irene Rich·1891~1988, 미국여배우): an elegant, melodramatic heroine of the silent screen who made occasional forays into sound pictures(때때로 유성영화에도 출연한 우아하고 몹시 감상적인 무성영화 여주인공)

Joe[joe] six-pack

He´s a good Joe[joe]. (그는 좋은 놈이다.)

I´m just a Joe[joe] Six-pack. (저는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I want my six-pack stomach back. (예전의 왕(王)자가 새겨진 배를 다시 찾고 싶다.)

Joe(남자이름)는 Joseph의 애칭이지만,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 우리식으로 치면 ‘여보게’ ‘자네’ ‘형씨’의 뜻으로 사용한다. 이뿐만 아니라 사내(fellow), 녀석(guy)이란 의미를 갖기도 하며, 이 경우 joe(소문자)로 쓰기도 한다. six-pack은 캔[병] 맥주 등 6개들이 종이상자나 그 내용물을 말한다. 서민이 주로 six-pack을 사 가지고 귀가하는 것을 빗대, ‘보통의 미국인’을 Joe[joe] Six-pack이라 한다. 근로계층과 서민층은 맥주를, 부유층은 와인을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six-pack에는 또 하나의 익살스러운 의미가 있다. ‘(배의 근육이 잘 단련되어 여섯 개의 조각으로 나눠져) 王(왕)자 모양으로 보이는’이라는 의미다. six-pack stomach는 ‘王자가 새겨진 복부’다. washboard stomach(빨래판 복부)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I do sit-ups every night to keep my stomach muscles toned(날씬한 배를 갖기 위하여 매일 밤 복근운동(윗몸 일으키기)을 한다)가 있다.

Peter·Paul & Jack·Gill

[영작]나는 이쪽 빚으로 저쪽 빚을 갚고 있다.

I´m robbing Peter to pay Paul.

[영작]팔방미인이 정통한 일은 하나도 없다.

Jack of all trades is master of none.

Jack of all trades, and master of none.

[영작]공부만 시키고 놀게 하지 않으면 아이는 바보가 된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영작]총각마다 제 짝이 있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

Every Jack has his Gill.

Brother Jonathan (브라더 조너선: 전형적인 미국사람)

Brother Jonathan was a fictional character created to personify the entire United States, in the early days of the country´s existence. In editorial cartoons and patriotic posters, Brother Jonathan was usually depicted as a typical American revolutionary. Originally, from 1776 to 1783, ‘Brother Jonathan’ was a mildly derisive term used by the Loyalists to describe the Patriots.

(Brother Jonathan은 미국 건국 초기에 만들어진 허구상의 인물로 미국인 전체를 상징하였다. 흔히 시시만화와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포스터에서 Brother Jonathan은 미국의 전형적인 혁명가로 묘사되었다. 원래 Brother Jonathan은 1776년과 1783년 사이 Loyalist(독립전쟁 때의 독립 반대자)가 Patriot(독립파인 애국지사)를 점잖게 조롱하는 용어였다.)

However, Brother Jonathan, and variants of the name Jonathan continued to be used as slang references to Americans through the American Civil War. For example Johnny Reb meant a Confederate soldier, and a popular song was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

(그러나 Brother Jonathan과 그 변형은 미국 남북전쟁 내내 미국인을 가리키는 통용어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Johnny Reb은 남군(Confederate soldier)을 의미했으며,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조니가 행진하며 집으로 올 때)’는 인기 있는 노래였다.)

Uncle Sam (엉클 샘: 전형적인 미국사람)

Uncle Sam is a national personification of the United States, with the first usage of the term dating from the War of 1812 and the first illustration dating from 1852. He is often depicted as a serious elderly man with white hair and a goatee, with an obvious resemblance to President Andrew Jackson, and dressed in clothing that recalls the design elements of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 for example, typically a top hat with red and white stripes and white stars on a blue band, and red and white striped trousers.

(엉클 샘(샘 아저씨)은 미국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 용어는 1812년 미영전쟁 때 처음 사용되었고 1852년에 처음으로 일러스트레이션(삽화)이 그려졌다. 보통 흰 머리에 염소수염을 기르고 진지한 표정에 나이가 지긋한, 앤드루 잭슨 대통령 (Andrew Jackson·미국 제7대 대통령 1767~1845)을 꼭 닮은, 미국 국기의 기본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복장- 붉은색·흰색 줄무늬가 있고 푸른색 띠 바탕에 흰색 별들이 그려진 실크 모자, 그리고 붉은색·흰색 줄무늬 바지 -을 한 남자로 그려진다.)

Common folklore holds origins trace back to soldiers stationed in upstate New York, who would receive barrels of meat stamped with the initials US. The soldiers jokingly referred to it as the initials of the troops´ meat supplier, Samuel Wilson. The connection between the popular cartoon figure and Samuel Wilson was reported in the New York Gazette on May 12, 1830.

(널리 알려진 민간전승에 따르면 어원은 뉴욕 주의 벽촌에 주둔한 군인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US라는 이니셜(머리글자) 도장이 찍힌 몸통고기를 받아가곤 했다. 군인들은 농담으로 그것(US)을 부대의 고기공급업자인 Samuel Wilson의 이니셜이라고 불렀다. 이 널리 알려진 시사만화 인물과 Samuel Wilson과의 관계가 1830년 5월12일 뉴욕 가제트지에 보도되었다.) ※ Sam은 Samuel의 애칭으로 US는 Uncle Sam의 이니셜이며 동시에 United States의 이니셜이기도 하다.

Yankee (양키)

▲ Etymology (어원)

Historically, the term usually refers to residents of New England, as used by Mark Twain in 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 During and after the American Civil War, its popular meaning expanded to include any Northerner and any resident of the Northeast.

(마크 트웨인이 그의 저서명 ‘아서 왕궁의 코네티컷 양키 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에서 사용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이 말은 뉴잉글랜드 지방(메인·뉴햄프셔·버몬트·매사추세츠·로드아일랜드·코네티컷 주 등)의 거주자를 말한다. 남북전쟁(1861~65) 당시 그리고 그 후 이 말의 통속적 의미가 확대되어 북부사람과 동북부지역의 거주자를 포함했다.) ※ ‘아서 왕궁의 코네티컷 양키’: 19세기말 미국의 한 기술자가 정신을 잃은 뒤 다시 깨어나 보니 영국의 아서 왕 시대로 날아갔다는 특이한 소재로 봉건제와 지배계급에 대한 풍자를 담은 소설.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suggests the most plausible origin to be that it is derived from the Dutch first names ‘Jan’ and ‘Kees’. ‘Jan’ and ‘Kees’ were and still are common Dutch first (given)names or nicknames. In many instances both names(Jan-Kees) are also used as a single first name in the Netherlands. Jan may have been used as a reference to the settlers of New York(New Amsterdam at the time) who were Dutch. The word Yankee in this sense would be used as a form of contempt, applied derisively to Dutch or English settlers in the New England states.

(‘옥스퍼드 영어사전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따르면 이 용어의 가장 그럴듯한 어원은 네덜란드인의 이름인 Jan과 Kees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Jan과 Kees는 예나 지금이나 네덜란드인의 가장 흔한 이름이거나 별명(애칭)이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이 두 개의 이름을 합친 Jan-Kees가 하나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을 많은 예에서 볼 수 있다. Jan은 네덜란드인으로 이루어진 뉴욕(당시의 뉴 암스테르담)의 정착민을 이를 때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Yankee라는 말은 뉴잉글랜드 지방에 사는 네덜란드나 영국에서 온 거주자들을 조롱하는 경멸어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one influence on the use of the term has been the song Yankee Doodle, which was popular at the time of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1775~ 1783). Though the British intended to insult the colonials with the song, following the Battle of Concord, it was adopted by Americans as a proud retort and today is the state song of Connecticut. The ‘damned Yankee’ usage dates from 1812. During and after the American Civil War (1861~1865) Confederates popularized it as a derogatory term for their Northern enemies.

(이 용어의 사용에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독립전쟁(1775~1783) 때 미국인이 애창한 노래 ‘양키 두들 Yankee Doodle’이었다. 영국군이 콩코드 전투(Battle of Concord) 이후 그들의 식민지인 미국을 조롱하기 위해서 만든 노래이지만, 미국인들은 이 곡을 자랑스럽게 불러 역공을 펼쳤으며 오늘날에는 코네티컷의 주가(州歌)가 되었다. ‘빌어먹을 양키(damned Yankee)’가 사용된 것은 1812년부터다. 남북전쟁 (1861~1865) 당시 그리고 그 후 남군(Confederates)은 북군의 자존심을 깔아뭉개기 위해 이 용어를 유행시켰다. ※ 콩코드 전투: 미국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된 영국 정규군과 미국 주민들 간의 첫 소규모 충돌

▲ Contemporary uses within the United States (미국 내에서의 쓰임)

Traditionally Yankee was most often used to refer to a New Englander in which case it may suggest Puritanism and thrifty values, but today refers to anyone coming from a state north of the Mason-Dixon line, with a specific focus still on New England.

(전통적으로 주로 양키는 청교도적인, 엄격하고 검소한 사람을 암시하는 뉴잉글랜드 사람을 가리키는 데 쓰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메이슨-딕슨 라인 북쪽 주(州) 출신 사람을 가리키면서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뉴잉글랜드 지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 Mason-Dixon Line: Maryland 주와 Pennsylvania 주를 가로지르는 라인으로, 과거 미국의 북부와 남부를 나누는 분계선이었다.

▲ Contemporary uses in other English-speaking countries (영어를 말하는 다른 나라에서의 쓰임)

In English-speaking countries outside the United States, especially in Australia, Canada, Ireland, New Zealand and the United Kingdom, Yankee, almost universally shortened to Yank, is used as a derogatory or playful colloquial term for all Americans. In the Commonwealth, ‘Yank’ has been in common use since at least World War II, when thousands of Americans were stationed in the UK, Australia and New Zealand. Depending on the country, ‘Yankee’ may be considered mildly derogatory.

(미국 밖의 영어를 말하는 나라,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아일랜드, 뉴질랜드, 영국에서는 양키(Yankee) - 흔히 줄여서 양크(Yank) - 는 모든 미국인을 농담 섞인 경멸적 어조로 부르는 구어체로 쓰인다. 영연방에서는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이 수천명의 미국사람을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주재시켰을 때 Yank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나라에 따라서는 Yankee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경멸조로 간주된다.)

▲ Contemporary uses in other parts of the world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의 쓰임)

In some parts of the world, particularly in Latin American countries, and in East Asia, yankee or yanqui is used sometimes as an insult politically associated with anti-Americanism and used in expressions such as “Yankee go home” or “we struggle against the yanqui, enemy of humanity”.

(세계의 어떤 지역,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서는 yankee나 yanqui가 정치적으로 반미감정을 담은 모욕적인 언사로 쓰이며, “양키야 너희 나라에 가라 (Yankee go home)”이나 “우리는 인류의 적인 양키와 투쟁한다(we struggle against the yanqui, enemy of humanity)”와 같은 표현으로 사용된다.)

In Argentina, Paraguay and other Latin American countries, however, the term is referred to as someone who is from the US and hardly ever derogatory.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Japanese were called ‘the Yankees of the East’ in praise of their industriousness and drive to modernization. In 21st century Japan, the term Yank1- is used to refer to a type of delinquent youth who often sports brightly bleached hair. The variation, ‘Yankee Air Pirate’ was used during the Vietnam War in North Vietnamese propaganda to refer to the United States Air Force.

(그러나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그리고 다른 라틴 국가에서는 이 말이 미국출신에게 사용되며 경멸적 의미는 거의 없다. 19세기말 일본은 그들의 산업화와 현대화 드라이브를 찬양하여 스스로 ‘동양의 양키’라고 불렀다. 21세기 일본에서는 얀키(Yank1-·ヤンキ―)라는 용어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빗나간 청소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양키 공중해적(Yankee Air Pirate)’이라는 변종이 월남전 당시 월맹의 선전활동에서 미국공군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John Bull(전형적인 영국사람)

John Bull is a national personification of the Kingdom of Great Britain created by John Arbuthnot in 1712, and popularized first by British print makers and then overseas by illustrators and writers such as American cartoonist Thomas Nast and Irish writer George Bernard Shaw, author of John Bull´s Other Island.

(존 불(John Bull)은 1712년 존 아버스넛(John Arbuthnot)이 창작한 영국을 의인화한 인물로 처음에는 영국의 판화 제작자에 의하여 알려졌으며, 나중에는 미국의 만화가 토머스 내스트(Thomas Nast)와 ‘존 불의 다른 섬 John Bull´s Other Island’의 저자인 아일랜드 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 같은 사람에 의해 해외에 알려졌다.) ※ 존 아버스넛(John Arbuthnot ·1667~1735): 영국의 의사이며 풍자 작가. 앤 여왕의 주치의였으며, 1712년에 평론집 ‘존 불의 역사 The History of John Bull’를 간행하였다. 전형적인 영국인을 가리켜 보통 ‘존 불(John Bull)’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저서에서 유래하였다.

He is sometimes used to refer to the whole of the United Kingdom, but has not been widely accepted in Scotland or Wales as he is viewed there as English rather than British. Britannia, or a lion, is therefore used as an alternative in some editorial cartoons. Although embraced by Unionists, Bull is rejected by most nationalists in Northern Ireland as well.

(존 불은 종종 영국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존 불이 거기에서는 영국(Britain)적 존재라기보다는 잉글랜드(England)적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시시만화에서는 브리태니아(Britannia) - Great Britain 또는 British Empire를 상징하는 여인상(像) - 나 사자가 대안으로 사용되었다. 존 불은 유니오니스트(Unionist·아일랜드 자치안에 반대한 연합주의자)에의해 옹호됐지만 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거부됐다.)



이윤재 번역가, 칼럼니스트 yeeeyooon@hanmail.net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신동아]

타이거 우즈(오른쪽)가 지난 1월 PGA 투어를 하루 앞두고 미국 샌디에이고 인근 라호야의 토리파인스GC에서 열린 프로암대회에서 2번 홀(남코스) 티박스에서 티샷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왼쪽은 우즈의 캐디인 스티브 윌리엄스.

‘태국 넘버원 골프장’이라는 나바타니 클럽. 캐디와 만난 우리 조는 1번 홀 티잉그라운드로 출발했다. 티잉그라운드 근처에 이르니 스타터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넨다. 2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본 그 스타터였다. 원래 캐디로 일하다가 스타터가 됐다고 했다.

우리 조 앞에는 3팀이 대기 중이었다. 모두 일본인 골퍼들로 보였다. 나바타니 골프장 회원 중 80%가 일본인이라더니,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골퍼들은 거의 다 일본사람이었다. 한국 골퍼들이 동남아 일대를 주름잡고 다닌다지만, 나바타니에서는 아직 한국 골퍼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주말에는 더욱 그렇다. 나바타니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라 한국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앞 팀이 티샷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타터가 “밀리고 있으니 인코스부터 플레이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나바타니 골프장의 티잉그라운드는 블루티, 화이트티, 골드티, 레드티 4가지로 나뉜다. 전장은 블루티를 기준으로 하면 6902야드이고, 화이트티로는 6315야드다. 18홀에 규정 타수는 72인데, 스코어카드에 의하면 블루티에서의 코스 레이팅은 72.5, 화이트티에서는 69.4이다. 445야드 파4 6번 홀이 핸디캡 1번 홀이고, 580야드 파5 13번 홀이 핸디캡 2번 홀이다. 427야드 파4 10번 홀은 핸디캡 4번 홀이다.

골프장 출입은 아직도 사치?

특히 핸디캡 1번 홀인 6번 홀은 코스가 길 뿐 아니라 페어웨이 좌측에 호수 같은 연못이 퍼팅그린 앞을 가로지르며 9번 홀까지 큰 호수와 연결돼 장관을 이룬다. 페어웨이 우측엔 열대우림이 우거져 있고, 티잉그라운드 주변에는 나바타니를 특징짓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10번 홀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어느 티를 사용할 것인지 망설이다 긴 여정의 첫날임을 감안해 나는 화이트티에서, 아내는 레드티에서 플레이하기로 했다.

한국엔 골프장과 관련된 특별법으로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하 체시법)이 있다. 당초 골프장에 관한 법률은 관광사업법(후에 개정되어 관광진흥법)이었다. 골프장시설을 관광시설로 보고 법을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카지노 시설과 마찬가지로 골프장을 드나드는 것이 사치로 인식됐고 특별소비세법도 생겼다. 그러다 1989년 국민체육진흥법을 모법으로 체시법이 제정됐고, 국가 또는 공공기관이 직접 조성하는 대신 골프장 또는 스키장 사업을 권장했다. 체시법이 제정됨으로써 골프장은 비로소 관광시설이 아닌 체육시설이 됐다. 그럼에도 골프장 출입을 사치성 소비행위로 보는 시각은 그대로 남아 특별소비세법은 존치되고 있다. 다만 특별소비세법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가 제기되자 조세당국은 지난해 말 특별소비세라는 말 대신 ‘개별소비세’라는 표현으로 바꾸었다.

체시법은 법 제정 당시와 달리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골프 금지령에 동조하기 위해 1994년경 전면 개정됐다. 법이 개정되면서 골프장 조성을 장려하기는커녕 체시법이 온통 골프장 규제법으로 변질됐다. 더욱이 체시법은 공청회 한번 거치지 않아 관계공무원들이 통치자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졸속으로 제정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령 체시법 11조 제1항은 ‘체육시설업자는 체육시설업의 종류별로 문화관광부령이 정하는 시설기준에 적합한 시설을 설치하고 이를 유지관리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체시법 시행규칙 제8조는 골프장시설기준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① 운동시설 : 회원제 골프장업은 3홀 이상, 정규대중 골프장업은 18홀 이상, 일반대중 골프장업은 9홀 이상 18홀 미만, 간이 골프장업은 3홀 이상 9홀 미만의 골프코스를 갖추어야 한다.

국내 첫 유럽 프로골프 투어를 유치한 제주 핀크스GC.

각 골프코스의 사이 중 이용자의 안전사고 위험이 있는 곳은 20미터 이상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 다만 지형상 일부분이 20미터 이상의 간격을 두기가 극히 곤란한 경우에는 안전망을 설치할 수 있다. 각 골프코스에는 티그라운드, 페어웨이, 그린, 러프, 장애물, 홀컵 등 경기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② 관리시설 : 골프코스 주변, 러프지역, 절토지 및 성토지의 법면 등에 조경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대한골프협회에서 발행한 골프규칙 제2장 ‘용어의 정의’ 편에는 각종 골프 용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5. 코스(Course) : 코스란 위원회가 설정한 모든 경계선 이내에 있는 전 지역을 말한다.

22. 해저드(Hazards) : 해저드란 모든 벙커 또는 워터해저드를 말한다.

24. 홀(Hole) : 홀의 직경은 108밀리미터(4.25인치)이고, 그 깊이는 101.6밀리미터(4.0인치) 이상이어야 한다. 원통은 토질이 허용하는 한 퍼팅그린면에서 적어도 25.4밀리미터(1인치)는 아래로 묻어야 한다. 원통의 외경은 108밀리미터(4.25인치) 이내여야 한다.

43. 퍼팅그린(Putting Green) : 퍼팅그린이란 현재 플레이를 하고 있는 홀의 퍼팅을 위하여 특별히 정비한 전 구역 또는 위원회가 퍼팅그린이라고 지정한 모든 구역을 말한다. 볼의 일부가 퍼팅그린에 접촉하고 있으면 퍼팅그린 위의 볼이다.

51. 정규 라운드(Stipulated Round) : 정규 라운드란 위원회가 따로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홀의 순서에 따라 코스의 여러 홀을 플레이하는 것을 말한다. 정규 라운드의 홀수는 위원회가 18홀보다 적은 홀수를 허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8홀이다. 매치플레이에서 정규라운드를 연장할 때는 규칙2-3 참조.

55. 티잉그라운드(Teeing Ground) : 티잉그라운드란 플레이할 홀의 출발장소를 말한다. 이것은 2개의 티마커의 외측을 경계로 하여 전면과 측면이 한정되며 측면의 길이가 2클럽 길이인 직사각형의 구역이다. 볼 전체가 이 티잉그라운드 구역 밖에 있을 때에는 티잉그라운드 밖에 있는 볼이다.

58. 스루더그린(Through the Green) : 스루더그린이란 다음 구역을 제외한 코스의 전 구역을 말한다.

(1) 플레이 중인 그 홀의 티잉그라운드와 퍼팅그린

(2) 코스 내의 모든 해저드

정원화 부추기는 골프장 시설규정

골프용어사전에는 이렇게 설명돼 있다. “파(Par)란 숙련된 플레이어라면 그 홀에서 기대할 수 있는 타수로, 퍼팅그린 상에서는 언제나 2퍼팅을 기준으로 산정한다. 파는 홀의 거리를 기준으로 산출할 뿐 지형이나 그 밖의 요소에 의한 난이도는 고려해 넣지 않는다” “페어웨이(Fairway)란 티잉그라운드와 퍼팅그린 사이의 예초를 한 잔디구역이다. 러프(Rough)란 페어웨이 바깥쪽에 잔디를 길게 하여 둔 지역을 말한다. 골프규칙에서는 스루더그린이라 부르고 페어웨이와 러프를 구별하지 않는다.”

앞에서 본 골프 규칙과 골프용어사전을 종합해보면, 골프장 시설기준에 관한 체시법 시행규칙 제8조에 쓰여 있는 ‘티그라운드’는 ‘티잉그라운드’를 잘못 쓴 것이며, ‘그린’은 ‘퍼팅그린’, ‘홀컵’은 ‘홀’의 그릇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체시법 시행규칙의 ‘페어웨이, 러프, 장애물’은 골프규칙의 ‘스루더그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체시법 시행규칙은 앞서 본 바와 같이 관리시설에 관해 “골프코스 주변, 러프지역, 절토지 및 성토지의 법면 등에 조경을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규정은 골프장의 발상지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자연상태 골프장에 들어맞지 않고, 한국 골프장들이 값비싼 조경수와 온갖 희귀한 꽃들을 이식해 억지로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이른바 골프장의 정원화(庭園化)를 부추기는 근거규정이다. 절토지에 조경을 권장할 것이 아니라 산사태에 대비하거나 로스트볼을 찾기 위해 다가갔다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등의 안전시설을 설치하라고 규정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해학과 빈정거림

회원제 골프장과 대중 골프장의 차이는 코스의 규모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 골프장 조성비용이 사업자의 순수한 사업자금으로 조달되는 지 아니면 회원들로부터 거둬들인 입회금으로 충당되는지의 차이다. 둘째, 골프장 조성 후 조성비를 부담하거나 조성에 기여한 회원들을 중심으로 개방되는지 혹은 불특정다수의 일반 골퍼에게 개방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골프장 시설에 관한 체시법 규정은 언뜻 보기에 회원제 골프장과 대중 골프장의 차이를 골프코스의 규모로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골프장 시설기준에 관한 체시법령 규정이 골프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골프 문외한에 의해 입안되고 개정돼 오늘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엉터리 같은 골프장 관계법령을 볼 때마다 나는 우드하우스(P.G. Woodhouse)라는 사람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린다.

“골프 경기는 빈정거림과 해학으로 넘친다. 한 홀에 인생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래서 골프를 이해하려면 또 하나의 비밀 클럽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지성(知性)’이라는 이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클럽이다. 그것이 퍼터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2류 골퍼로서 오로지 볼을 치는 데 그치고 만다. 골프는 지성이 없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다. 빈정거림과 해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이 없다면 뒤에 남는 것은 4타, 5타 6타 같은 숫자놀음뿐이다. 세상에는 백과사전을 장식하는 사람과 그것을 읽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다. 앞서 우리 일행은 아웃코스로 나가다가 인코스로 출발 홀을 바꿨다고 했다. 나바타니 골프장 같은 18홀 골프장의 경우 왜 전반 9홀을 아웃코스라 하고 후반 9홀을 인코스라 부르는 것일까. 앞서 본 바와 같이 골프규칙에 의하면 정규 라운드의 홀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18홀이다. 그렇다면 왜 정규 라운드의 기본을 18홀이라고 규정했을까.

우리 체시법처럼 골프코스에 홀이 18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법은 과거에도 지금도 없다. 이와 관련, 영국의 유명 골프코스들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어 유서 깊은 프레스트위크코스는 1886년까지는 12홀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1860년부터 11년 동안 같은 코스에서 치러진 영국 오픈은 제1회부터 12홀을 단위로 한 것이었다. 그밖에 프란츠필드는 6홀이었고, 노스퍼위크는 7홀, 굴란은 13홀이던 것이 뒤에 15홀이 됐다. 아처필드는 13홀, 머셀버러 등은 단지 5홀밖에 되지 않았다. 블랙히스도 7홀이었고 가장 적은 것은 에일오브메이의 링크스로 겨우 3홀이었다. 그런가 하면 세인트앤드루스 등은 22홀이나 됐고, 몬트로스는 더욱 많아서 25홀이었다. 19세기까지 골프코스는 각자 제멋대로의 홀수를 갖고 있었다.

골프의 발상지 스코틀랜드에 있는 오랜 링크스 코스는 약 6000년 전에 해안선이 융기하여 바다가 물러나고 나타난 자갈밭에 바람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퇴적된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모래언덕지대, 소위 링크스랜드가 그 토대였다. 링크스랜드에 잔디나 관목이 자생하기 시작하고 야생토끼나 들쥐 등 자그마한 동물들이 서식함에 따라 이들을 포획하려는 포수들이 이 녹지대를 드나드는 사이에 길이 생겨났다. 이것이 골프코스의 페어웨이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자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해안 링크스랜드에 조성된 골프코스는 링크스 상황에 따라 조성됐기에 일률적으로 18홀이 될 수 없었다.

왜 18홀인가

그러면 골프코스는 언제부터, 왜 18홀이 정규 라운드가 됐을까. 이에 관해 3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위스키설이다. 골프가 처음 시작될 무렵 스코틀랜드 바닷가에 인접한 동토(凍土)의 링크스코스에는 차가운 북풍이 몰아쳤다. 그래서 골퍼들은 1홀 홀아웃 할 때마다 위스키를 한 잔씩 들이켜 몸을 데웠다. 그런 식으로 플레이하다 보니 18홀이 끝날 무렵에는 갖고 있던 술병(sporran)이 비게 되어 플레이를 마치고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골프에 관한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위스키 병량에 맞춰 골프코스도 18홀이 됐다는 것이다. 스카치위스키의 원산지답게 골프와 위스키가 교묘하게 조합된 이야기지만, 이는 후세에 지어낸 것으로 역사적 사실에 터 잡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둘째는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코스가 그 기원이라는 주장이다. 세인트앤드루스의 링크스에서는 처음엔 해안을 따라 직선에 가까운 형태로 12홀 플레이를 했다. 그러다 공식 경기를 개최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자 12홀 가운데 10홀을 커다란 더블그린으로 만들어 같은 홀을 왕복으로 사용하면서 출발점에 돌아오도록 22개 홀로 개조했다. 그 후 1764년에 큰 폭으로 개조했는데, 홀 간의 거리가 너무 짧은 처음 4홀을 두 홀로 만든 결과 왕복 4홀이 줄어들어 18홀이 됐다는 것이다.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코스가 18홀이 되자 1834년에는 윌리엄 4세로부터 ‘로열 앤드 에인션트(Royal & Ancient)’라는 칭호를 하사받았고 동시에 영국골프의 통괄권이 주어졌다. 그렇게 되자 R&A는 명실공히 골프계의 주도권을 거머쥐었고, 그 후 영국 각지에서 결성돼 전용코스를 가지게 된 골프클럽들이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코스를 본받아 18홀 코스를 조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18홀의 기원이 로열윔블던코스라는 유력한 주장도 있다. 700명의 회원을 가진 런던 근교의 호화클럽 로열윔블던코스도 1865년 창립 당시에는 7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회원이 늘자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불평이 끊이지 않았고 1870년에 이르러 코스를 확장했다. 확장 당시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설계가가 골프코스 설계의 제1인자로 불리던 톰 던이었다.

아웃코스·인코스 설계의 기원

윔블던은 당시 데이비스컵대회 장소로 유명했는데, 템스 강 상류에 있어 아름다운 숲과 완만한 지형으로 풍광이 뛰어났다. 톰 던은 이미 조성된 7홀을 기초로 이 천혜의 아름다운 환경에 어떻게 코스를 확장할 것인지 절치부심했다. 그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낸 끝에 2주 만에 설계를 완성했다. 자연과 인공이 정교하게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각 코스의 연관성을 원활히 하고, 전체 코스의 반쯤 돌면 클럽하우스 앞으로 나오게 되는 매우 합리적인 새 축을 채택했다. 즉, 10홀을 마치면 자연스럽게 클럽하우스 앞으로 나왔다가 그 후 9홀을 다 돌고 나면 다시 클럽하우스로 돌아오게 되는 합계 19홀의 설계였다.

회원들은 즐거이 새로운 코스에서 플레이를 시작했다. 그들은 길고 긴 코스의 반을 끝마치면 자연스럽게 클럽하우스 앞에 도착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차가운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힘을 얻어 남은 9홀을 돌기 위해 나갔다. 이는 부지불식간에 회원들의 습관으로 정착됐다. 사람들은 초반 10홀을 마치면 클럽하우스에서 그때까지의 스코어를 계산하고 서로 비교했다. 스코어가 나쁜 사람은 나머지 9홀에 만회하려 마음을 다잡았다. 때때로 후반 9홀에서 대세를 뒤집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전반 10홀 스코어에 후반 9홀 스코어를 대비해 계산하는 것이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어떤 회원이 “나는 45타를 쳤다”라고 하면 동반자는 “10홀이야, 9홀이야?”라고 되묻곤 했다.

불편이 거듭되자 회원들 사이에 “톰 던은 왜 20홀을 만들지 않았을까? 1홀만 더 만들었으면 계산이 얼마나 편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쏟아졌다. 회원들의 불만이 마침내 위원들을 움직였다. 위원들은 윔블던코스를 20홀로 확장하는 안을 심의했다. 단 1홀이기에 그 과업을 그린 위원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증설 임무를 맡은 그린위원으로부터 “지금의 부지 여건으로는 1홀을 증설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내용의 보고가 위원회에 제출됐다. 그래서 후속조치를 위한 위원회가 개최됐고, 여기에서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려 그린위원에게 통지했다.

“한 홀을 증설할 여지가 전혀 없다면 현재의 전반 10홀 중에서 적당하게 한 홀을 줄여달라.”

이리하여 윔블던코스는 18홀로 변모했다. 회원들은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하게 둘로 나뉜 두 개의 코스 가운데 하나를 ‘Going Out’, 다른 한 코스를 ‘Coming In’이라 부르며 구분했다. 즉, 클럽하우스를 나가서 처음 맞는 코스를 아웃코스라 했고, 플레이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되돌아오는 나중의 9홀을 인코스라 불렀다.

티잉그라운드 전략

우리 일행이 클럽하우스 쪽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와 나바타니 10번 홀 티잉그라운드에 다다르니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스타터의 말 그대로였다. 오전 8시 무렵이면 이른 시간이 아닌데도 티잉그라운드는 물론, 그 앞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페어웨이도 아침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 부부는 골프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14~18타의 핸디캡을 주고 1타에 1달러씩 내기를 한다. 그날은 내가 블루티와 화이트티 중 어느 곳에서 플레이할 것인지에 대해 설왕설래했다. 서울에서 방콕으로 날아오자마자 이른 새벽에 골프장에 나온 것을 감안, 핸디캡 15를 주는 대신 그날만은 화이트티에서 플레이하기로 합의했다. 나는 드라이버를 꺼내들고 약간의 스트레칭을 한 다음 나바타니 10번 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섰다.

나는 어디에서든 골프장의 첫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설 때면 나바타니 골프장을 설계한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의 저서 ‘GOLF by DESIGN’의 2장 ‘THE TEEING GROUND’ 부분을 떠올린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티잉그라운드는 19세기말까지만 해도 비전략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티잉그라운드의 전략성에 최초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프로골퍼이자 코스 설계가이던 윌리 파크였다. 그는 티잉그라운드가 가능하다면 플레이 방향으로 약간 오르막경사를 가진 채 코스의 편평한 곳에 위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종전에 한 곳이던 티잉그라운드 지역이 보다 잘게 나뉘어 여러 곳으로 배치됐다. 이러한 경우 어떤 티잉그라운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홀의 전체적인 전략성이 달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골프 설계가들 중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의 아버지는 티잉그라운드를 거리면에서뿐 아니라 정확성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는 특히 비행기의 활주로에 비유되는 길고 똑바른 티잉그라운드를 선호했다. 이런 형태의 티잉그라운드는 플레이어에게 놀랄 만한 시각적 효과를 부여한다. 잘 배치된 티잉그라운드는 올라서면 이상적인 볼의 낙하지점이 어디인지를 말없이 가르쳐준다. 그런데 대개 이상적인 티샷의 낙하지점은 페어웨이 벙커와 같은 큰 해저드나 장애물 근처에 있다. 골프 설계에 있어 이러한 경향은 전후 196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그후 골프 설계가들은 전략적 다양성을 제공하는 목표지점에 이르기 위한 여러 각도의 공격루트와 거리를 확보하려 애썼다. 그래서 현대의 티잉그라운드는 자연경관과 어울리면서도 모양이나 크기, 높이 등이 다채롭다.

티잉그라운드에 서면 홀의 전체적인 모양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각 홀의 특징적인 모양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홀을 공략하기 위한 기본 전략이 떠오른다. 그러고는 티잉그라운드 주변을 걸어다녀본다. 가령 뒤쪽으로 가서 퍼팅그린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쪽으로 옮겨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티잉그라운드의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걸어가면서 시야의 변화를 관찰하는 일이다. 그런 다음 티마크 사이에 서서 볼의 낙하지점을 결정한다. 이러한 자세를 습관화하면 볼의 이상적인 낙하지점과 목표지점에 이르기 위한 루트를 선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공격루트를 설정함에 있어 스코어카드와 야디지북(난이도에 상관없이 각 홀 또는 코스의 거리만을 야드 단위로 표시해놓은 책)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이후부터는 티잉그라운드에 올라가서 티샷한 볼이 슬라이스나 훅이 나서 OB가 되거나 러프에 빠지거나 해저드로 들어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왜냐하면 오늘은 홀이 퍼팅그린의 어느 곳에 위치해 있고, 온그린 시킨 볼이 어느 곳에 멈춰야 쉽게 홀아웃할 수 있을지, 그렇게 온그린 시키려면 어디가 IP(Intersection Point·목표)지점이 돼야 할 것이며, 설정한 IP지점에 볼을 보내려면 티잉그라운드의 어느 지점에서 볼을 티업하는 것이 좋을지 등 각 홀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그러한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공격루트를 찾느라 티샷이 잘못될지도 모른다고 염려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골프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스코어가 괄목하게 향상됐다. 그래서 나는 골프 스코어가 샷 메이킹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게 됐다.



소동기 변호사, 법무법인 보나 대표 sodongki@bonalaw.com < 아이디어의 보물섬! 최신 아이디어 모여라! www.idea-club.com >

[파리(프랑스)=허연회 기자] 파리는 늘 새롭다. 방문객이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도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에펠 탑-개선문-샹젤리제 거리-콩코르드 광장-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이제 벗어나 보자. 파리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방법 중 하나는 ‘디자인(Design)’이다.

파리 시내 어디를 가도 조각과 디자인으로 넘쳐 난다. 잠자고 있던 오감(五感)이 널뛸 정도다.

파리는 석회암의 도시다. 조각을 하기 쉽다 보니 건물마다 조각상이 즐비한 것도 그런 이유다. 도시 전체가 조각 박물관인 셈이다. 굳이 파리 소재 박물관을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개선문을 원형으로 연결하는 2㎞에 달하는 샹젤리제 거리를 포함해 11개의 거리 곳곳에는 5~6층 정도밖에 안 되는 같은 높이(약 31~37m)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이들 건물에는 입구에 특징적인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고대 인물들을 조각해 놓은 석고상과 비슷하다. 표현 방식도 제각각이다.

건축에 대한 규제와 건축가, 디자인, 설계 등에 대한 배려, 존중이 있기에 가능한 파리의 모습이다.

파리에서 19년째 살아온 남기하 씨는 “단순히 건축을 하는 게 아니라 건축가 자신의 이름을 건물 입구에 새겨 넣어 나름 독특하고 전통을 살리는 디자인을 한다”고 말한다.

석회암 조각은 수백년을 이어오면서 비, 바람 등을 맞으며 더욱 단단해졌고, 현재의 파리를 이루고 있다.

거리에서 발견하는 독특한 간판이나 디자인은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물론 자극까지 준다. 파리 대표적인 거리인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세계적인 햄버거 브랜드인 맥도널드의 간판까지도 도시 전체적 디자인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특유의 빨간색 간판을 쓰지 않을 정도다. 대형 간판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파리 거리의 특징이다. 돌출형 간판이나 입간판, 건물을 가리는 간판 등은 허가가 나지 않는다.

개선문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동쪽에는 파리 시민들이 ‘옥에 티’라고 일컫는 ‘몽파르나스 타워’가 있다. 60층, 210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이 타워가 파리를 상징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리의 외관을 해친다고 이구동성이다.

서울, 한복판 고층 건물을 올리지 못해 안달이 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2~3층을 털어서라도 건물 전체적인 조화가 이뤄진다면, 건물에 대한 수익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디자인, 그리고 전체적인 도시와의 조화를 고민한다.

개선문에서 서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시선을 올려다보면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 신도시 ‘라데팡스’. 솟구쳐 올라 있는 마천루에 대해서도 파리 시민들은 부정적이다. 에펠 탑을 흉물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각과 디자인을 염두에 두고 파리를 보면 파리는 움직이는 디자인의 도시다. 98개 성당과 수많은 박물관, 셀 수 없는 조각상, 건물에 새겨져 있는 조각 들이 조화롭다.

여기서 수수께끼를 내보자. 서울에선 흔히 볼 수 있는데 파리에선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크레인’이다.

서울은 오래된 건물들을 헐고 새로 짓기 위해 크레인이 설치돼 있지만 파리에서는 크레인을 구경할 수 없다.

내 집을 내가 헐고 내가 새로 짓겠다는 데 무슨 규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파리에는 건물 외벽을 고치는 것도 파리시의 엄격한 규제에 따라야 한다. 파리 전체적인 디자인을 생각해서다.

디자인의 도시 파리. 파리의 디자인에 빠져 보면 파리는 새롭게 다가온다.

okidoki@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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