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에게 배운다! 유추하기
토머스 에디슨은 두 가지 면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우선 1,093개라는 엄청난 양의 특허권에서 그러하고, 특허 상품의 범위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전기, 전력, 축음기, 영화제작 기술, 전신과 전화기의 기술 향상, 고무와 플라스틱의 발명, 질 좋은 인공 시멘트 생산 등에 대한 선구자적인 업적을 살펴보고 있자면,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수많은 분야에 걸친 리스트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는 습관을 들 수 있다. 에디슨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라도 전부 다 기록하고 넘어갔다. 부단한 메모 습관 덕분에 그는 개발 과정 중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유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추는 에디슨의 창의력에 자극을 더해 준 요소다. 기본적으로 유추는 그에게 이해력을 가져다 주었다. 자신의 일기에서 에디슨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유추함으로써 사물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쓴 책들만을”권한다고 밝혔다. 에디슨은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유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발명도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만드는 작업이라 할 때, 유추는 발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에디슨은 주요 관심사 한 가지에서 여러 방면으로 상상력을 뻗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가 추진한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프로젝트들도 사실은 더 큰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발명을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통신이었고, 그가 가진 특허 중에 상당수가 전신의 기술 향상 및 전화기 계량에 관한 것이었다. 아울러 축음기와 영화제작 기술이 통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1876년 3월 13일, 에디슨은 ‘자동 인쇄에 관한 기술 개발’건으로 특허를 신청한다. 에디슨이 ‘일렉트릭 펜’이라 명명한 이 기기는 스텐실 원리를 적용해 바늘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종이형판을 뚫음으로써 문서 및 그림을 복사할 수 있도록 고안된 휴대용 펜이다. 이 기기는 일반 펜처럼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게 설계되었고, 종이가 찢어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구멍 간격을 떨어뜨려 놓으면서도 명확하게 복사될 만큼 가깝게 형판을 만들어놓았다. 에디슨은 또한 형판을 지탱하고 (자체적으로 만든 파마자유가 들어있는) 잉크 주입과 인쇄가 좀더 쉽게 이루어지도록 특수 틀을 제작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 이 기기는 30달러의 고가임에도 큰 인기를 누렸다. 에디슨은 웨스턴일렉트릭사에 펜의 특허를 팔기 전까지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후에 웨스턴일렉트릭사로부터 다시 특허권을 돌려받은 에디슨은 1970년대 초 경제적인 복사기가 상용화되기 전까지 복사 시장을 주도하던 스텐실 기판 기술인 등사판을 개발한 A,B,딕사에 특허권을 판매했다.
에디슨은 틈새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일렉트릭 펜을 만들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거대한 비즈니스 기기 산업의 기반을 다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최신 통신 기술과 매우 오래된 기술에서 유추한 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렉트릭 펜에 관한 특허는 전통 자수를 비롯해 르네상스 시대 프레스코 화가들이 사용했던 ‘카툰’이라고 불리는 스텐실의 기법을 모두 이용한 것이었다. 프레스코 화가들은 특수지에 밑그림의 형태를 그린 후, 선을 따라 종이를 뚫고 프레스코 벽면에 종이를 댄 다음 고운 숯가루를 채운 ‘파운스’라는 천주머니로 종이를 두들겼다. 그러면 숯이 종이에 난 구멍을 뚫고 그림을 그릴 벽면이나 천장에 스며들어 그림의 스케치가 완성되었다.
유추는 에디슨의 창의성이 발현되는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다. 유추활동을 통해 에디슨은 언제 떠오를지 모르는 영감과 기회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필요 없이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과거를 파헤치고 과거에서 유추의 실마리를 찾아 내려 애썼다. 그것이 자신의 과거 발명품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그건 문제되지 않았다.
분명 일렉트릭 펜은 에디슨의 주요 발명품 축에 끼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즉각적인 수익을 가져다주었고 등사기를 훨씬 더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쓰이는 전기 문신기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유추를 통해 일렉트릭 펜을 발명한 에디슨이 또다시 유추를 이용해 소리를 재생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일렉트릭 펜을 발명한 에디슨은 ‘말하는 전신’이라고 명명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벨이 1876년에 발명해 특허를 취득한 새로운 전화기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에디슨은 탄소 송화기에 의해 전화기의 품질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일렉트릭 펜과 전화 송신을 녹음하는 기기를 기반으로 삼아 말하는 전신을 발명한 에디슨은 이번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시 변형해 축음기의 발명에 적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펜처럼 생긴 바늘이 소리를 녹음하고 보존하고 재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축음기 이후 그의 사고는 어디로 뻗어갔을까? 바로 활동사진 영역이었다. 에디슨은 활동사진 카메라의 개념이 자신이 전에 발명한 축음기에서 나왔다고 여러 번 설명하곤 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몇 년 동안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실험을 해왔다. 그러자 축음기가 귀를 위해 한 것과 마찬가지로 눈을 위한 장치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소리를 전달하는 것에서 소리를 재생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제는 시각적 이미지를 재생하는 것으로 그의 개념은 확장되어 갔다. 그렇지만 에디슨도 유추를 현실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습식 감광판을 사용하여 오랫동안 노출시켜야만 사진을 현상할 수 있던 1887년에 활동사진 기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셀룰로이드로 된 유연한 필름은 고사하고 건판 처리법도 일반화되지 않은 때였다. 이 말은 곧 에디슨이 축음기와 활동사진 간의 유추에 대한 작업이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발명을 뒷받침해 준 만한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간의 뇌는 빠르게 바뀌는 이미지들을 볼 때 각각의 이미지들이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연속된 이미지로 매끄럽게 합쳐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잔상’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이런 현상에 익숙해 있었다. 에디슨도 여러 단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짧은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나열함으로써 활동사진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장난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에디슨은 어린 시절 보았던 인기 있는 장난감인 조이트로프에서 할동사진의 기본 원리를 찾았다. 조이트로프는 회전통 안에 대상이 변화하는 순서대로 그림을 붙이고 수평으로 회전시키면서 원통의 바깥쪽 틈새로 안의 그림을 보는 장난감의 일종으로, 회전통이 돌아가면서 이미지들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환영을 만들어냈다.
영국계 미국인 사진작가 머이브리지는 1877년과 1878년에 장난감 수준이었던 활동사진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머이브리지는 여러 가지 실험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1877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릴랜드 스탠퍼드가 한 내기를 확인하기 위해 달리는 말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것이다. 릴랜드 스탠퍼드는 말발굽 4개가 동시에 땅에서 떨어진다고 주장했고, 상대는 최소한 말발굽의 한 개는 항상 땅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이브리지는 경주로 주변에 24대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각각의 카메라 셔터에는 실이 걸려 트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말이 지나가면서 실을 끊으면 셔터가 터져서 말의 진행과 발굽의 정확한 위치를 찍게 되어 있었다. 애초에 머이브리지는 빠른 말의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의도로 연속적인 촬영을 고안했지만, 막상 24개의 이미지를 조이트로프와 같은 기기에 넣고 회전시켜 보다 실제 움직임을 재생하는 것처럼 생생한 잔상이 생겨났다. 비록 한 위치의 카메라에서 빠르게 찍히는 24개 프레임과 같은 효과에는 못 미치지만 머이브리지의 기법은 뛰는 말을 따라 움직이는 현대의 영화 카메라와 매우 유사하다.
머이브리지는 잔상에 대한 증명을 해보였지만, 실용적인 기술로 보기엔 어려웠다. 에디슨은 초당 12 노출률(잔상효과를 이용해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노출률)로 된 1분짜리 활동사진을 만들려면 720대의 카메라가 필요하다는 계산을 했다.
관건은 충분한 노출이 가능하고 최대한으로 모든 프레임을 촬영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는 곧 감광류제를 재빨리 도포할 수 있는, 기존의 평평한 유리감광판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개발해야 함을 의미했다. 비록 이런 중요한 기술을 개발하지는 못했지만, 에디슨은 지속적인 사진기법 향상 작업에 뛰어들어 1888년 10월 8일, 시각적으로 움직임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에 대한 발명특허권 보호신청(특허 신청에 대한 사전 단계)를 하게 된다. 발명특허권 보호신청서에는 원리와 기능뿐 아니라 기계적인 설계까지 축음기와 유사한 기기가 설명되어 있다. 그는 8초 간격으로 이미지를 기록한 다음 유재가 도포된 실린더에 이 이미지들을 담아 계속되는 나선형 연속 이미지를 보여주도록 고안했다. 움직임의 잔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린더가 매우 짧은 간격으로 중단되면서 돌아가야 했다. 에디슨은 다양한 기계적 움직임을 만드는 데 자신이 발명했던 전신 기기들의 경험을 총동원했다.
발명특허권 보호신청을 하기 수개월 전, 에디슨은 사진에 따라(사진 자체가 아니라) 그림을 투영하여 움직이는 유리판에 칠하는 주프락시스코프를 머이브리지가 직접 선보이는 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강연 이틀 후인 1888년 2월 27일, 머이브리지는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에 있는 에디슨을 찾아가 축음기와 연속된 사진을 합쳐놓은 형태의 ‘말하는 사진’에 대한 가능성을 논의했다. 그 자기에서 에디슨은 카네토스코프와 사진 실린더를 연결해 동기화할 것을 제안했다.
머이브리지의 강연과 만남 그리고 사진 작업에 자극을 받은 에디슨은 연구소 직원들에게 기술적인 작업을 지시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기존의 사진 유제가 움직임을 기록할 만큼 빠른 속도로 빛에 반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유제의 알갱이가 미세한 이미지를 만들기에는 너무 굵었다. 그러나 마침 유연한 셀룰로이드가 등장해 키네토스코프의 실린더를 감을 수 있게 되자 사진 유제를 개선하는 것도 머지않은 일로 여겨졌다.
에디슨의 직원들이 유제와 셀룰로이드를 연구하는 동안 에디슨은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장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동물의 움직임에 대한 사진을 찍는 프랑스 생리학자 마레이의 작품을 보게 된다. 에디슨은 마레이의 <움직임의 생리학 : 새의 비행>의 사본을 얻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사진기술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축음기의 유추에 영향을 받지 않은 마레이는 감광 실린더를 사용한 카메라가 아니라 종이말이 형태로 된 필름을 사용하여 초당 60프레임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었다.
마레이와의 만남으로 에디슨은 새로운 유추를 이끌어냈다. 축음기가 소리를 재생하는 것처럼 이미지를 재생하는 기기를 만들겠다는 축음기의 유추는 개념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마레이의 롤필름을 본 에디슨은 예전에 발명한 기기에서 다시 유추를 시작했다. 새로운 유추 대상은 전기화학 물질로 도포된 종잇조각에 전신 내용을 기록하고 재생하던 자동 전신기였다. 에디슨은 자동 전신기와 똑같이 톱니 모양의 휠에 의해 옮겨지는 스프로켓 필름(양쪽에 스프로켓 구멍이 뚫린 필름조각)제작을 요청했다. 그는 움직임을 정확히 표현하는 최소 요구량인 초당 10프레임의 사진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간헐적인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전신 기기였던 전기 기계적 문자이동 장치를 차용했다. 여기세 1890년대 초반에 이르러 조지 이스트먼의 이스트먼드라이플레이트&필름 사가 긴 스프로켓 롤필름에 사용할 수 있는 셀룰로이드 필름 양산에 들어갔다. 활동사진 제작기술이 마침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에디슨은 영사기 발명에 한 가지 유추 대상을 더 추가했다. 그 당시 동전을 넣으면 작동하는 사진관람 기기 등의 자판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키네토스코프를 개발하던 에디슨은 영화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대신 기존 기술과 시존 소매 시장을 발판으로 자판기 형태를 빌린 핍홀 뷰어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한 사람이 기기의 구멍을 통해 활동사진을 볼 수 있도록 고안된 키네토스코프가 처음 시장에 출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들해진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 에디슨의 영업 에이전트들은 역사적인 장면과 줄거리가 있는, 보다 흥미진진한 필름의 제작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런 필름도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영업 에이전트들은 에디슨에게 영사기를 개발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런 기기에 담긴 기술이 그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 진부하다고 느낀 탓이었는지 그는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새롭게 등장하는 자판기 기술을 차용하는 것은 신선하고 흥미 진진한 반면, (적어도 에디슨에게는) 영사 기술은 강사들이 랜턴슬라이드로 강의내용을 설명하는 데 이미 오랫동안 사용해 온 것이었다. 아마 그런 면이 에디슨에게 낡은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키네토스코프가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않던 1895년, 뤼미에르 형제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파리에서 스크린 투사 방식의 활동사진 영사기를 선보였다, 이에 마지못해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 카메라와 호환될 수 있는 영사기를 개발하기 위해 또 다른 발명가인 토머스 아멋과 협상하게 된다. 1896년 1월 에디슨제조회사는 아멋 영사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을 위한 활동사진들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기술로 거듭난 여러 개의 유추를 통해 에디슨은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대중매체를 선도해 나갈 수 있었다.
유추는 창의성을 위한 강력한 도구이며 상상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활동이다. 진정한 천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유추를 적용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유추 활동을 활발히 하게 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하나를 다른 무언가로 재해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유추의 습관을 들이는 것은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며, 과거(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연장하며 미래(만들고 싶은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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