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홍승일] 철학도인 조지 소로스한테는 ‘역사 중독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펀드 매니저가 아니었으면 철학자가 됐을지 모른다”는 말을 자주 했다. HP 회장을 지낸 칼리 피오리나의 대학 전공은 경영학이 아니라 중세역사와 철학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재빨리 간파한 데는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깊이 공부한 게 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놓곤 했다. 미국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중에는 인문계 출신이 많다. 수년 전 USA투데이가 미 1000대 기업 CEO의 전공을 알아봤더니 3분의 1 정도만 경영학이었다.

지난달 서울대에 개설된 고위 경영자 상대의 첫 인문학 과정은 변화의 조짐이다. 맨날 재무제표와 씨름하다 ‘괴테와 파우스트’ ‘알파벳의 기원과 현대문명’ 같은 ‘문사철(文史哲·문학·역사·철학)의 바다에 반년간 푹 빠져 볼 기회다. 영어 비중을 낮추고 역사·한자를 입사 시험과목에 넣는 직장도 늘고 있다. 재계가 인문학 쪽에 턱을 바짝 괴는 연유는 자명하다. 글로벌 경영, 감성 경영 시대에 CEO의 자유 교양은 필수다. 수종(樹種)사업 발굴을 위한 창조적 발상과 긴 안목은 인문 소양을 요한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를 읽으면 인생의 온갖 경우의 수와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제스 윈필드, 『셰익스피어라면 어떻게 했을까』)든가 ‘조조·유비·손권의 일대기에는 기업의 재무·인사와 흥망성쇠, 다양한 CEO 유형이 녹아 있다’(최우석, 『삼국지 경영학』)는 지적이 와 닿는다.

독서의 계절 가을에다 ‘인문 주간’(8~14일)이다. 점찍어 둔 교양서적 한 권쯤 독파할 짬을 내 보자. 때맞춰 서울대에서 8, 9일 열린 세미나 가운데 ‘창조적 기업경영과 인문학’이란 주제가 눈길을 끈다. 서먹한 인문학과 경영학이 상견례하는 계기였으면 좋겠다. 위기의 인문학계에는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이, 경영학계에는 학생과 일반사회에 대한 인문학계의 ‘고객 마인드’ 부족을 꼬집는 여론이 있다.

1969년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딛자 환호 대신 ‘아, 이제 달에 관한 시를 쓰긴 글렀구나’ 탄식한 부류도 있었다. 원로 수학자 김용운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갈채를 보낸 『무지개』의 시인 워즈워스를 인용해 응수했다. ‘뉴턴이 무지개의 광학(光學)을 규명해 준 덕분에 무지개를 노래하는 시는 미(美)뿐만 아니라 진(眞)까지 얻게 되었다.’ 이번 인문 주간의 구호가 바로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 이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 ▶홍승일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ex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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