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하순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 한 매점 가격표에 커피 한 잔 값이 2유로로 매겨져 있다. 달러로 지불하겠다고 하니 3달러를 내라고 한다. 1유로당 1.5달러를 적용하는 셈이다.

요즘 달러를 가지고 유럽에 가면 물건을 살 때 바가지를 쓰기 일쑤다. 공정 환율보다 달러를 더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9ㆍ18 금리인하 조치로 달러화 가치는 급전직하했다. 유로는 9월 말 사상 최고치인 1.4267달러까지 치솟았다.

미국 달러 '그린백'은 세계 곳곳에서 찬밥 신세다. 달러 가치는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해 1973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무역가중지수로 따지면 1980년대의 절반 수준이다. 영국 1파운드는 2달러를 웃돌고 있다. 물새 '루니'로 불리는 캐나다달러 가치는 1달러에 도달했다. '오지' 호주달러도 미화 90센트를 넘어 2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뉴질랜드달러 '키위'는 2000년에 미화 40센트에도 못 미쳤지만 지금은 그 두 배 이상으로 올랐다.

약달러는 원유 등 상품시장에도 불똥이 튄다. 에너지 가격은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내년 사업계획 을 수립할 때 가장 주목하는 변수다. 산유국은 안정된 원유 매각수입을 원한다. 그래서 달러 가치 하락을 상쇄하는 고유가 정책을 고집한다.

"달러 패권시대는 끝났다."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전 의장은 유로화 강세를 지적하며 이같이 말했다. 기축통화로서 달러 위상이 추락했다는 얘기다. 기축통화는 국가간 결제나 금융거래에 기본이 되는 대외 지급수단이다. 한 나라의 통화 가치는 국력을 반영한다. 이에는 경상수지, 자본이동, 금리, 성장, 물가, 저축 등 여러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달러 약세를 방치하고 있다. GDP 대비 5.5%에 달하는 경상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다.

달러 지폐는 매년 평균 7.6%씩 발행이 늘어난다. 2005년 말 7600억달러어치가 발행됐다. 3분의 2는 미국 밖에서 유통된다. 하지만 세계 최대 통용화폐 자리는 유로로 넘어갔다. 유로는 2006년 말 6100억유로(약 8020억달러) 이상 공급된 상태다.

각국 중앙은행의 보유외환 선택은 '네트워크 외부효과(network externalities)'로 설명된다. 특정 외환을 선호하는 중앙은행 수가 많아질수록 그 외환의 보유 가치가 커진다. 각국은 많은 나라에서 보유하는 우량 통화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는 글로벌 통화 전쟁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된다.

지금은 외환 다변화 시대다. 중동과 아시아는 최근 힘이 강해진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s)의 돈줄이다. 이들 중앙은행은 미국 국채 등 달러자산을 매각하고 있다. 지난 2분기 전 세계 중앙은행의 달러 보유율은 64.8%로 전년 동기보다 1.3%포인트 떨어졌다. 반면 유로는 24.8%에서 25.6%로, 파운드는 2.8%에서 4.7%로 각각 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달러 페그제 이탈 가능성도 달러 입지를 흔드는 요인이다. 사우디는 최근 미국 금리인하 조치를 뒤따르지 않았다.

유로가 기축통화로 부상할지는 국제금융계의 핫이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EU 회원국의 유로존 가입 확대로 미국 경제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유로존의 거시경제정책이 유로화의 가치 안정과 함께 국제적인 신뢰를 얻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방되고 잘 발달된 금융ㆍ외환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제프리 프랜켈 하버드대 교수는 이 같은 조건 아래 달러가 매년 3.6%씩 절하되면 유로는 2024년 달러를 제치고 기축통화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로존은 약점도 많다. 13개 가입국에 영국 덴마크 스웨덴이 빠져 있고,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국은 일러야 2012년 유로화 채택이 가능하다. 뉴욕, 런던, 취리히, 도쿄에 필적하는 국제금융센터도 없다. 세계 경제를 이끌 성장엔진이 되기엔 여러모로 역부족이다. "급격한 유로화 상승은 성장에 위협이 된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이탈리아 프로디 총리는 이같이 주장한다. 와인, 패션제품 등 자국 수출품 가격경쟁력 약화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달러 쇠퇴, 유로 부상은 과점적 통화체제로 이행을 의미한다. 급변하는 국제금융 환경에 자칫 잘못하면 한국은 또 다른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부의 이동'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경제주체마다 환위험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국제거래에서 원화를 주고받는 원화의 국제화는 매우 중요한 과제다. 국제금융 전쟁에서 한국 '쩐(錢)의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

[국제부 = 홍기영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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