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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희 동국대 교수
지구촌이라는 말이 요즘들어 더 실감난다.
필리핀과 몽골 출신 등 외국인 며느리를 둔 가정을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국내 한 종교단체에서 파견한 선교단원들의 피랍사건으로 온 나라를 충격 속에 휘몰아 넣었던 아프가니스탄,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젊은 장병들이 그곳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세계 경제 대국을 꿈꾸는 중국은 ‘동북공정’에 이어 ‘중국 펀드’로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일본-한국-중국을 거쳐 터키로 이어지는 아시아 고속도로(아시안하이웨이)가 아시아 32개국간의 협정으로 총 14만km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21세기, 교통 통신의 발달로 물리적 거리가 더욱 좁아지고 대륙과 국가의 장벽이 역사상 유례없이 개방되면서 서로의 관계들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좋든 싫든 그리고 멀든 가깝든 우리는 새로운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 숙명을 안고 있다. 그에 따라 ‘지리상 발견 시대’ 이후 한동안 잊혔던 전통 지리학이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하고 있다. 빠르고도 복잡하게 얽히고 연결된 지구촌 사회의 역학 관계를 통찰하는 데는 무엇보다 지리적 사고(思考)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지리적 사고란,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사람들 입장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미국은 최근 직면한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리학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최근 국내에도 출간된 원로 지리학자 블레이의 교양도서 ‘분노의 지리학’을 해외 근무 직원과 외교관들의 필독서로 지정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 책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구촌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지리학이 주요한 도구가 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베트남전쟁, 이라크 전쟁의 뼈 아픈 역사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이 같은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새로운 영토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그곳을 진정으로 통치하는 힘은 ‘지리적 통찰력’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터넷 위성영상정보 사이트에서 우리 영토를 검색해 보면, 부산 수영만은 ‘Suiei-Wan’, 남해 천황산은 ‘Tenno San’ 그리고 한강 하구의 강화만은 ‘Koka-wan’ 등 일본식 표기 일색이다. 우리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 목 쉬도록 외치는 사이에 일본은 사이버 공간에서 소리 없이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부도를 펼쳐놓고 대전을 찾아보라고 하면 엉뚱하게도 부산이나 목포 쪽에서 헤매고 있는 게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이다. 그들은 제주도 한라산이 외국에서 ‘Mount Auckland’나 ‘Kanra-san’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개화기 이후 지리는 역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세계관 교육의 하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의 지리교육 축소 정책, 이어 미국식 교육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슬그머니 ‘사회과 교육’이라는 틀 속에 갇히면서, 우리 청소년들을 지리 문맹(文盲)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행히 최근 우리 주변에서도 작지만 의미있는 지리학 부흥운동의 싹이 트고 있다. 지리교양도서들이 대형서점에서 어엿하게 독립된 코너를 차지하고 있고, 그중 몇은 스테디셀러 목록에 오르고 있다. 관공서나 기업들로부터 지리학 특강 요청이 늘고 있다.
21세기, 지구촌 사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리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19세기식 사고에 머무른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우리 땅에 대한 지리학적 자긍심과 아시안 하이웨이를 달리는 지리학적 상상력을 키워 주자.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가 있는 우리 장병들의 배낭 속에도 지리학 교양서 한 권쯤은 넣어 주자. 우리의 미래가 바로 이들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권동희 동국대 교수·지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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