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열은 동물원이 탄생한 신촌의 술집 ‘무진기행’ 얘길 했더니 “노래방이 생기면서 신촌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이제 기타 안 들고 다니고, 노래방 가서 부르면 된다면서. 왼쪽부터 박기영, 배영길, 유준열.
ㆍ데뷔 20주년 ‘동물원’…남은 세사람 박기영·배영길·유준열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투자자를 못 구해 엎어질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화 인생 반세기의 임권택이다. 평생 영화만 만들어온 거장의 기념비적인 작품도, 돈이 없으면 엎어질 수 있는 게 지금의 한국 문화다. 4월치곤 쌀쌀했던 지난 24일, ‘동물원’을 만나고, 임권택 감독이 떠올랐다.
벌써 데뷔 20주년이다. 이들의 디스코그라피엔 명반의 반열에 오른 앨범도 여럿이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은 1980년대 후반 여린 젊은이들의 소박한 가슴을 흔들었다. 올해 나온다고 했던 10집 앨범 소식은 잠잠했다. 내막을 듣자 하니, 음반을 내주는 음반사가 없단다. “그들도 자선사업 하는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장수하는 음악인 하나가 아쉬운 상황. 데뷔 20년이 지난 지금도 창작 의지를 불태우는 동물원이다. 속편하게 옛날 것 우려먹지 않는단 얘기다. 이들은 “다른 가수들은 만나보면 어땠냐”고 진지하게 되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우리네 음반 비즈니스라는 게, 워낙 거칠고 척박하기에.
■ 삶과 음악,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서갓 나온 샛연둣빛 잎새를 매단 나무들. 4월의 정동길은 푸르렀고, 동물원은 소년처럼 웃었다. 5월30일 고양 어울림누리극장에서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다. 1988년 ‘거리에서’가 담긴 첫 앨범을 냈으니, 올해로 딱 20년째다. 초기 7명에 달했던 이들은 지금 유준열(45), 박기영(43), 배영길(44) 등 3명으로 압축됐다. ‘거리에서’를 불후의 명곡으로 만든 김광석은 돌아올 수 없는 가객이 됐고, 그 노래를 작곡한 김창기는 의사, 본업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된 것 같아요. 공연하고 노래하면, 그때서야 ‘아, 나 가수였지’하고 생각하죠, 일상에서는 잊고 살아요(웃음). 20년이 지나고 보니 이제야 좀 익숙해지는 것 같네요.”(유준열)
“좀 느닷없어요. 우리가 음악을 시작했던 게 계획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하다보니 어느날 ‘어? 벌써 20년?’ 하는 느낌.”(박기영)
데뷔 20년에 ‘부적응’ ‘느닷없음’을 말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불렀다. ‘생활인’과 ‘음악인’의 경계다. 동물원의 출발은 ‘아마추어 밴드’였다. 친구들끼리 각자 만든 노래를 부르고 들어주며 기념 삼아 만든 음반이었다. 이후에도 멤버들은 사회 생활과 동물원 활동을 병행했다. 97년 7집까지 함께 활동한 김창기는 소아정신과 의사다. 유준열은 광학기기 무역업체의 이사로 일하고 있다. 박기영은 대학에서 실용음악, 예술경영을 가르치고, 배영길은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들은 지금도 구속력 강한 밴드라기보다 느슨한 ‘음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앨범도 20년 동안 9장을 냈을 뿐이다.
“곡 작업은 늘 일상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나 셋이 모두 모이려면 시간 여유가 없어요. 2003년 9집 음반 작업도 세션까지 따로 두고 각자 작업하고, 믹싱할 때 만나고 그랬죠. 그렇지만 그렇게 느슨했던 게 오히려 계속 음악할 수 있는 힘이 됐던 것 같아요. 내 얘기를 좀더 치열하게 많이 털어놨다면 과연 더 오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하고(웃음).”(모두)
하지만 이들의 음악만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일상적이지만 비범한 가사와 멜로디의 소박한 노래들은 명곡으로 남았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새장 속의 친구’ ‘혜화동’의 감성은 아무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이후 음반에서도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널 사랑하겠어’ 등의 히트곡을 내놨다.
“아마추어라는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 안 해요.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의 차이는 기능적인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음악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죠. 많은 사람들이 동물원 음악을 좋아할 수 있었던 데는 건강한 아마추어리즘이 갖는 실험성, 자유로움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중간 중간 간혹 매너리즘에 빠지는 시기가 있어요. 그건 어설픈 프로페셔널리즘이 가져온 폐해가 아닐까 생각해요. 지금도 동물원이 상징하는 아마추어리즘은 살려야 하지 않을까 항상 생각합니다.”(박기영)
문득 가족들이 돈도 안 되는 음악 활동을 싫어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지금 (20년이나 지난) 상황에서 싫어하면 문제가 크죠. 처음에 시작할 때는 가족들이 싫어하고 그랬지요. 창기 아버님이 (김)창완이 형 찾아가서 ‘계속 공부하게 해 줬음 좋겠다’ 부탁하기도 하고(웃음). 그렇지만 영악하게 할 일 다 하면서 적당히, 뭐라고 말 할 수 없을 만큼만 하니까. 할 말이 없지 뭐.(웃음).”(유준열)
■ “이데올로기? 그거 무지하게 미화된 것 같은데”동물원이 등장한 88년의 한국은 엄혹했다. 6월 항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시기였다. 직선제라는 가시적 결과물을 획득하긴 했지만, 사회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동물원’이라는 팀 이름은 당시 어두웠던 시대 상황과 맞물려 여러 가지로 해석되곤 했다. 개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건 “사회에서는 체제 속에 갇혀 있고, 대학에서는 이데올로기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아 동물원으로 지었다”는 얘기였다. 셋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이데올로기? 그런 얘기 누가 했어? 네가 했냐? 네가 했어? 무지하게 미화된 것 같은데. 아마 주로 (김)광석이가 그런 얘길 많이 했을 거예요(웃음). 그 다음으로 그런 소리 잘했던 게 기영이고.”(유준열)
“처음 이름을 붙일 때는 그런 고민들을 깊게 안 했어요. 그냥 서로 생긴 게 다른 동물들을 한 울타리에 모아 놓았듯, 우리도 그러니까 그렇게 지은 거지요. 나중에 새로운 의미들, 이야기들을 담은 거예요. 그래서 이데올로기까지 갔던 거겠죠.”(박기영)
1988년 동물원 결성 초기. 왼쪽부터 유준열, 이성우, 박경찬, 최형규, 박기영, 김창기, 김광석.
사실 동물원의 노래 자체는 정치나 이데올로기, 저항의 내용과 거리가 멀었다. 일상적인 감상, 소박한 서정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당시 그 시대를 살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동물원의 노래에 열광했다. 동물원의 음악은 무력감과 상실감으로 흑백논리에 반발하던 다수의 ‘회색 분자’들, 소시민의 노래였다.
“행동은 같이 못 하지만, 공감은 하는. 그런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가 아니었던가 싶은 거예요. 시대의 불안감, 자괴감, 희망 등이 버무려진 감정들을 가진. 우리도 그랬으니까요.”(박기영)
그때 그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지금 사회 한복판에 선 40대가 됐다. 오랜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닌데, 어느덧 기성세대다. 2006년 말 무대에 올랐던 뮤지컬 ‘동물원’은 이들의 폭발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넥타이 부대’가 객석을 가득 채웠고, 지난해 3월까지 연장 공연을 마쳤다. 동물원의 말에 따르면 뮤지컬은 ‘별로 촘촘하지 않은 구성’이었다. 그곳엔 다만 동물원의 노래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일회성으로 소모되는 요즘 대중가요와 달리, 오랜 생명력을 가진 대중가요의 힘을 보여줬다. 가수 한동준은 뮤지컬을 보고 난 후 한 칼럼에서 “첫 장면부터 아무 이유없이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아마 많이 힘들었던 20대에 운 것을 빼놓고는 근래 이렇게 눈물을 많이 흘린 적은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맞아, 나도 저때 저랬었는데. 저런 생각, 저런 고민 했었는데. 그런데 지금 난?’ 그거였던 것 같아요. 비슷한 세대들의 공감의 힘이죠. 스토리 등 보완을 해서 올 연말에 다시 올릴 예정이에요.”(박기영)
동물원의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순수하다. 많은 이들은 ‘동물원처럼 순수하고 착한 음악을 진지하게 하는 그룹은 없다’며 치켜세우지만, 때때로 ‘악다구니 치는 세상에서 너무 동요 같은 감성만 노래하는 것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다.
“할 줄 아는 게 그거예요. 우리는 기교를 근본적으로 못 해요. 그래서 하는 거지 뭐, 딴 게 있나.”(유준열)
“우린 스무살 때부터 그랬는데요 뭐. 더 악다구니 쳤던 그때도 그랬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웃음).”(박기영)
■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 가는지10집 음반 얘기에 이르러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올 5월쯤에 새 음반이 나온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언제쯤 만날 수 있나요.” 질문을 했는데, “김창기씨까지 참여해서 앨범 작업 하고 공연까지 연결해서 함께 하자 얘기는 했었는데…” 하고 말끝을 흐린다.
잠시 후 유준열이 “앨범을 내자는 음반사가 없다”고 입을 뗐다. 통탄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분명 밝은 표정도 아니다. 음반사들이 동물원의 기존 히트곡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했다. 새로운 음반을 내는 것은 꺼린다는 것이다.
“요즘은 디지털 싱글이 대세라면서, 싱글 개념으로 음반을 내자는 쪽으로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4년 만에 음반을 내는 것이고, 오랜만에 김창기도 같이 작업하는 건데, 기본적으로 앨범의 형태를 띠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 고민하고 있어요.”(박기영)
지난 9집 앨범도 9999개 한정판으로 내놓아 아쉬움을 더했던 차다. 이들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당시의 음악적 상황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눈에 띄게 말이 많아졌다.
“그때가 시대적 상황은 어두웠을지 몰라도 음악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히려 ‘가장 좋은 시기’였죠. 방송 출연 안 해도 음악만 충실히 만들면 누군가 사서 들어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시기였어요. 어떻게든 음반을 낼 기회가 주어지고, 그런대로 좀 팔 수 있는 시장이 있었죠. 한탄은 아니고, 그런 시절도 있었다는 거예요.”(유준열)
“그때는 모두가 천천히 기다려 음악을 들을 준비가 돼 있었어요. 음악을 구하기 힘드니 설렘, 기대 끝에 듣게 되면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죠. 지금은 선택도 빠르고 놓는 것도 빨라요. 음악이 가치 있고 수고스럽단 생각을 하기 힘들죠.”(배영길)
동물원의 노래 ‘혜화동’에는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라는 가사가 있다. 잊혀지는 것, 말하지 못한 것, 없어져가는 것을 노래하는 동물원의 음악을 들으면 어김없이 이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지금 잊고 사는 것은 뭘까.
“네가 그걸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 하는 걸 자꾸 잊는 듯해요. 왜 사는지, 뭐 하려고 지금 그걸 하는지. 목적이나 가치는 결국 추상적인 데 있어요. 편안한 삶, 행복한 삶 같은 것들이죠. 그걸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건데, 우리는 그 과정의 가치에 너무 많은 걸 소모해요.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그런 부분이죠.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면 뭘 할 건지, 스스로에게 묻고 사는 것. 그걸 잊고 사는 게 아닐까요?”(박기영)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 정동길에 섰다. 이제 동물원은 각자의 자리로 일하러 간다. 빌딩 사이 전광판에선 ‘세계 일류국가로 가는 길’이라는 구호가 명멸하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사는 걸까.
<글 이로사기자 ro@kyunghyang.com>
< 사진 박재찬기자 jcphoto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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