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photo-media.hanmail.net/200710/01/chosun/20071001230302.215.0.jpg)
▲ 최원석 사회부 차장대우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신임 교수 임용 위원회에는 ‘악마의 옹호자’(devil’s advocate)라 불리는 멤버가 있다. 토의를 활성화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악역을 떠맡은 인물이다. 위원 5명 가운데 한 명인 그는 교수 후보들의 논문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그 후보의 학문 실적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등 후보들의 단점만 수집해 인터뷰 때 집중 공략하는 일을 한다.
이런 혹독한 검증절차를 거쳐 조교수로 임용된 교수들에게는 2차 관문이 있다. 임용 후 5년 이내에 연구실적을 내야 하는 것이다. 5년 동안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테뉴어(정년 보장 교수직) 심사에 탈락하고 곧바로 다른 학교로 옮겨가야 한다.
한국의 KAIST(한국과학기술원)가 목표로 삼는 대학 중 하나가 이 스탠퍼드 대학이다. 최근 테뉴어 심사에서 35명 중 15명의 교수들을 탈락시켜 충격을 준 것도 미국처럼 심사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동료 교수를 퇴출시키는 것은 고통이 따르는 일이지만, 이를 계기로 교수사회의 고질인 철밥통 의식을 깨고 학교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대학으로도 확산돼야 한다는 여론이 많다.
그런데 이런 KAIST의 실험이 우리나라 대학에서 성공하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지만, 충분한 연구비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스탠퍼드대 공대에서 조교수로 일하는 한 한국계 교수의 예를 들자. 그는 4년 전 조교수가 되자마자 학교로부터 20만달러의 ‘스타트업 펀드’(start-up fund·신임연구기금)를 받았다. 당시 우리 돈으로 2억3000만원. 그 돈으로 자신의 연구주제와 관련된 연구시설을 갖추고 조교를 고용해 5년 이내에 실적을 내라는 주문이었다.
KAIST도 그 정도의 기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 테뉴어 심사에 뒷말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 것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연구성과를 냉정히 평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대학들이다. 나름대로 이 제도가 정착돼 있다는 고려대, 연세대의 경우도 약 1000만원 수준의 초기 자금을 대주는 데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테뉴어 심사만 강화하면 ‘맨땅에 헤딩’하라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또 다른 전제조건은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한 교수라고 해서 그대로 퇴출·매장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교로 얼마든지 옮겨 갈 수 있는 사회적·학문적 통로가 마련돼야 한다는 점이다. 스탠퍼드대 테뉴어 심사에서 떨어진 조교수들은 미국 내 20위권에 드는 대학으로 한 계단 낮춰 옮겨가는 것이 통례다. 옮겨가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고, 테뉴어 심사에서 떨어진 교수라는 낙인을 찍지도 않는다. 1997년부터 7년 동안 스탠퍼드대 경제학과에서 가르친 조교수 40명 중 단 한 명도 스탠퍼드대에서 테뉴어를 받지 못했지만 그들 모두 다른 유명 대학으로 가 테뉴어를 받았다. 그만큼 교수 시장이 유연한 셈이다.
우리의 경우 이제 시작이다.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했다고 ‘놀고 먹는’ 교수라는 인상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교수들 역시 1군(群)대학에서 탈락했어도 2군에는 못 간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1군에서 2군대학으로 옮기는 길이 열리고, 2군 대학에서 열심히 연구해 1군으로 진출하는 길을 뚫어놓으면 교수사회의 경쟁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런 조건들이 갖춰질 때 KAIST의 새로운 실험이 우리나라 대학 사회에 건전한 충격파 역할을 할 수 있다.
[최원석 사회부 차장대우 yuwhan29@chosun.com]
[☞ 모바일 조선일보 바로가기] [☞ 조선일보 구독하기]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이디어 > 톡톡튀는 핫이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림] `기업지배구조 펀드` 심포지엄 (0) | 2008.02.08 |
---|---|
[기자 24시] 시장에 귀막은 재경부 (0) | 2008.02.08 |
[View Point] 미국외교는 비즈니스 쇼다 (0) | 2008.02.08 |
[기자 24시] 美 자동차 노조가 변한 까닭 (0) | 2008.02.08 |
[지평선] 위그선 (0) | 2008.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