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제약 경영권 분쟁에 국민연금과 미래에셋 같은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을 행사함에 따라 기관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논란이 새삼 일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의 이 같은 주주권 행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미국도 1930년대에는 미국은행협회가 채택한 소위 '월스트리트 룰(Wall Street Rule)'이 가이드라인이 됐다. 투자대상 기업의 경영이 나빠졌을 경우 경영에 간섭하기보다는 주식을 매각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기관투자가들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대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1974년에 제정된 연금개혁법인 '고용자퇴직소득 보호법(ERISA)'은 투자기업을 감시하면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명문화했다. 캘리포니아연금기금(캘퍼스)은 매년 영향력을 행사할 대상기업 명단을 작성해 각종 압력을 가한다. 요즘은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 '펀드자본주의'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활발하다.

국내에서는 외국 투자자가 몇 가지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 주목을 끌었다. 지난 2003년 SK(주) 주식 14.99%를 확보한 소버린은 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 퇴진을 요구한 적이 있다. 작년 초에는 세계적인 기업사냥꾼인 칼 아이칸이 스틸파트너스와 함께 KT&G를 압박해서 결국 사외이사를 파견하고 고배당 정책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목표로 한 소위 '장하성 펀드'도 출범했다.

증권선물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주주총회에서 기관투자가가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은 불과 1건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에는 매년 10~32건 수준을 보였다가 올해는 3월 초순 주총까지 55건으로 늘어났다. 내용면에서는 불성실 사외이사 재선임 반대 등 미미한 게 대부분이다. 미국 기준으로 보면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대체로 월스트리트 룰 단계에서 이제야 조금씩 주주행동주의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초기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미성숙된 탓도 크다.

따라서 아직은 국내 재계 일각에서 제기하는 펀드의 경영간여 규제를 들먹일 상황은 아니다. 더욱이 정부 당국이 어떤 구체적인 기준을 만들어 민간 기관투자가들의 경영권 참여를 규율하는 것은 곤란하다.

어느 나라든 기업의 오너나 CEO 입장에서 호랑이 시어머니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기관투자가들은 자신들에게 돈을 맡긴 신탁자들을 대신해서 투자기업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영향력을 행사해 기업과 신탁자들의 수익을 높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기관투자가 스스로가 내부 통제시스템을 투명하게 하고 주주권 행사와 관련된 절차와 목적, 결과 등을 상세히 공개할 필요는 있다. 또 자산운용협회, 생명보험협회 등과 같은 업계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주주권 행사의 기본원칙 같은 것을 밝히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의결권은 오로지 자금을 맡긴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행사한다는 원칙 같은 것이다. 과도기적으로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기관들이 기업의 안정적인 경영 여건 조성과 과도한 배당 요구를 자제하면서 성장에 도움을 주겠다는 정도의 선언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 문제도 강제할 일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인들의 과도한 경영권 간섭에 대한 방파제 구실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연금은 다른 경우다. 의결권 행사는 전문위원회에서 정하도록 한다지만 현행과 같은 관치적인 지배구조를 유지하면서 경영권 개입을 하면 정부의 경영 개입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아직은 미국의 연금개혁법인 ERISA와 같이 의무적으로 의결권 행사를 하도록 독려하기는 시기상조다.

이 밖에 기관투자가의 자산운용상 의무도 간과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각 주정부법과 판례에 따라 남의 돈을 맡아서 관리하는 수탁자는 '신중한 (전문)투자자 법칙(Prudent Investor Rule)'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신중하면서도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서 수탁받은 자산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게 요점이고, 소송 및 재판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전문가로서 포트폴리오, 파생상품 투자 등의 기법을 구사해야 한다. 이런 전문가가 일반 상식을 가진 사람들보다 자산운용을 못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선언적이지만 이런 규정이 필요할 수 있다. 이런 규정이 있다면 200조원이 넘는 국민자산을 상식적인 포트폴리오 운용조차 제대로 못하고 채권에 80~90% 이상을 집중 투자해 형편없는 수익률을 기록해온 국민연금은 소송감이 될 수 있다. 매년 1%만 수익률을 더 올려도 2조원을 벌게 되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회손실을 봤겠는가.

[장용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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