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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후보의 ‘정글 자본주의론(論)’은 별 재미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이명박 후보 요격용으로 내놓았지만 제대로 쟁점화되지 못했다. 다른 이슈들이 워낙 컸던 탓도 있겠으나 사실은 정글 자본주의란 개념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논쟁으로 이어질 사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정부가 나서 정글 자본주의를 하는 나라는 없다. 어느 비정한 정부가 ‘20%의 가진 자가 80%의 못 가진 자를 착취’하는 약육강식 게임을 방치한단 말인가. 끊임없는 진화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경쟁에 탈락한 약자(弱者) 보호를 핵심 가치로 끌어안았다.
이명박 후보도, 정동영 후보도 복지 공약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좌파가 ‘신(新)자유주의의 수괴’로 지목하는 부시 미 행정부조차 ‘온정적 보수주의’를 내세운다. 요컨대 정글 자본주의론은 정치적 구호일 뿐 실체 있는 문제 제기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정 후보가 생각 못한 정글이 있었다. 김경준 전 BBK 대표 얘기다. 그의 과거 행적을 보니 회사 돈 빼내기, 주가 조작, 가공 인물 등재 등 온갖 약탈적 수법이 망라돼 있다. 그는 수단·방법 따지지 않고 오직 이익만 추구하는 정글 자본가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 체제는 정글이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한쪽 언저리엔 김씨가 활동했던 정글 같은 공간이 존재한다. 윤리와 배려 대신 탐욕과 이익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 공간에 김씨 같은 ‘하이에나 자본가’며 투기꾼, 기업 사냥꾼들이 몰려 냉혹한 머니 게임을 벌인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자본주의 정글에선 외국계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BBK 사례만 해도 김씨는 미국식 금융수법과 마인드로 무장한 월가(街) 출신이었다. 어느 틈엔가 ‘외국 자본=먹는 자, 한국 기업=먹히는 자’의 패턴이 공식처럼 굳어져 버렸다.
뉴질랜드의 소버린 펀드는 SK그룹을 사냥감으로 삼아 2년 만에 9300억원을 벌어 떠났다. 조지 소로스가 만든 타이거 펀드 역시 SK 텔레콤의 적대적 인수·합병설을 퍼뜨리며 6300억원을 챙겼다. 브릿지증권 사례는 기가 찰 정도다. 영국계 펀드 BIH는 브릿지증권을 인수한 뒤 유상 감자(減資) 방식으로 2200억원의 회사 돈을 빼갔다. 알짜배기 자산을 다 빨려버린 브릿지증권은 껍데기만 남았고, 새 한국 주인을 찾아 겨우 회생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수법들은 다 합법적이다. 대책 없이 당하기만 하는 한국 기업들만 순진한 것이다. 글로벌 정글 자본가들의 공격에 한국 기업들은 피를 참 많이도 흘렸다.
칼 아이칸은 또 어땠는가. 냉혹한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그는 KT&G에 지분을 박아 넣고 경영권을 흔들어 1500억원을 벌었다. 그 재미가 쏠쏠했던지 이번엔 삼성전자를 노린다는 얘기가 흘러 나온다. 포스코·한진해운 등도 사냥감으로 거론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 기업들은 정글 자본가들의 기막힌 사냥감이다. 대주주 지분은 적고 지배구조는 취약하며, 대비책은 없다. 법으로 인정되는 적대적 M&A(인수·합병) 방어 수단도 다른 나라에 비해 변변치 않다. 게다가 몇 년간 투자를 미룬 채 현금을 금고에 쌓아 놓고 있으니 이런 황금어장이 없다.
온 세계를 무대로 정글 게임을 벌이는 헤지 펀드는 1만여 개, 운용 자산은 1조5000억달러에 달한다. 한국 돈 1400조원이다. 삼성전자라 해보았자 시가총액 78조원에 불과하니 그야말로 가냘픈 존재다.
대한상의 조사에 따르면 코스피 200대 기업의 절반이 경영권 공격에 아무 대책이 없다고 한다. 하이에나들이 설치는 정글에 우리의 알짜배기 기업들이 무방비로 풀을 뜯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걱정하고 대비해야 할 정글 자본주의는 바로 이런 것이지 ‘20%가 80%를 착취한다’는 허구의 정글이 아니다.
[박정훈 경제부장 j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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