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불문하고 예술작품에 있어서 제목은 중요한 것 같다. 제목을 통해서 독자,혹은 관객들의 마음을 단번에 유혹할 수 도 있고, 또 전혀 작품을 접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 작품이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의 전체적인 아우라와 분위기를 결정짓는 요소라고도 생각한다. "모렐의 발명"은 그런 면에서 처음 부터 내 흥미를 끌어당겼던 책이었다. 이게 도통 무슨 이야기일까? (사실 책을 읽은 후인 지금 생각해 보니,) 난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묘한 이끌림..무엇이 건너편에 있을지 모르지만 왠지 열어보고 싶은, 비밀의 문이라고 해야할까? 그때 까지도 굳게 닫혀있는 문은 말이없었다.

 

단순히 모렐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겠구나 생각했지만 사실 모렐은 이 책의 화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의 연인이었다. 화자는 사형수였고, 끔찍한 현실을 도피하고자 주변의 경고도 무시한 채 한 때 전염병까지 돌던 섬으로 무작정 오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섬안에서도 언제 발각되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섬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극도로 불안해진 자신을 숨겨가며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한 여인, 포스틴을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남자, 모렐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자꾸 그녀를 향해 뻗어나가려고만 하는 열망과 관심을 억누르려 노력도 해보지만 결국 그들을 계혹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점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들을 포함한 그 섬의 다른 사람들도 주인공, 화자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인식하지도 못한다는 것. 그것은 흡사 영화 '디아더스'를 연상케하는 전개과정이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서로 뭉쳐 조금씩 그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나도, 소설속의 주인공도.

 

이런 전개는 모렐이 결국 사람들을 모아놓고 고백을 하는 장면에서 절정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지루하고 불쾌한'이라고 수식된 그 사건은 바로 모렐이 발명한 기계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 섬으로 초대된 주변 사람들을 촬영을 해왔으며, (물론 모렐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그리고 그들은 이제  이 세상에 시각,청각 뿐 아니라 후각과 촉각, 미각 인간의 오감을 충족시키는 완벽한 영상의 형태로 남아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모렐은 자신이 사랑하는 포스틴과의 영원 불멸을 꿈꾸었던 거다.

촬영이 되는 순간 그들의 육체는 점점 소멸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주인공은 충격에 빠지고, 실재와 허구 그리고 그 허구를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비탄하지만 결국에는 순응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 그 영상위에 한 겹의 레이어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그렇게 자신을 수신기 앞에 내 보인다.

 

생각해보면 사진이 나오고 영상이 나오면서 모든 사람들은 이미 우리의 생명과 상관 없이 시각과 청각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카사레스가 이 소설 안에서 얘기한 것이 미래에는 정말 가능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정지한 한 순간으로 앨범속에서, 움직이는 영상으로 화면속에서, 희미하지만 아련하게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반복.반복.반복 재생되고 존재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건 단순히 수명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p.125 모렐은 누군가의 시간적, 공간적 부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따. 그 설명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따. 아마도 '감각적 인지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그런 것을 성취하고 존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무선통신, 텔레비전, 전화는 오로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부재할 수 있는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한편 영화와 사진 그리고 축음기, 즉 진정한 기록물들은 그것을 성취하고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시간적, 공간적 부재를 극복하고 감각적 인지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기계가 성취 방법이 된다. 또한 지금 없는 것들은 모두 원래 공간적으로 부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제는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의 영상이나 촉감 그리고 목소리가 존재할 수 있다.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내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이 소설에서 포스틴이 실재가 아닌걸 알고 좌절에 빠져있던 주인공은 점차 포스틴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관객'의 입장이 아닌 그 속의 반복되는 '배우'가 되고자 한다. 행복은 반복성에서 기인한다는 밀란쿤데라의 소설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p.137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 관객에게는 끔찍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마음에 드는 일이다. 나쁜 소식과 전염병에서 벗어나 그들은 마치 모든 일이 처음 일어나는 것처럼 영원히 살아간다. 그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조수의 주기적 순환으로 상영이 정기적으로 중단되기 떄문에 반복이란 그리 무자비한 것도 아니다.

이제 반복되는 삶을 보는데 익숙해진 나는 내 삶도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상황을 바꾸겠다는 계획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으며, 매 순간 그 자체가 유일한 것이고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게으름 때문에 나는 수많은 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 물론 영상들에게도 다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은 영원한 그 주가 기록되었을 때의 양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 영상들의 한 주와 같으며 다음 세상에서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이 소설이 출판된 것이 1940년이라고 하니, 벌써 일흔살이나 먹은 옛날 이야기인데도 뭐라고 해야할까 영화 시계태엽오렌지를 봤을 때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이 시대에 접해도 그 발상이 미래적인거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앞을 내다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놀라울 뿐이다.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상호침투하는 것과 영원한 현재의 대한 생각'에 항상 빠져있었다던 작가 카사레스. (((( 이쯤에서 또 우리나라 영화 '동감'이 생각났다.. 감독이 이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았던 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보는.))))

 

꿈과 환상을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닌, 현실을 직시하고, 아주 밀접한 태도로 이야기 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정신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읽음으로서 결국 얻고자 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그리고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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