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시민 의원(아직 17대 국회 임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그는 현시점에서 현역 국회의원이다)과의 인터뷰를 추진한 것은 한달 전이었다.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지만 사실 대구사람이라는 인식은 거의 없던 그 사람이 대구에서 출마한다는 자체가 이슈였다. 그래서 인터뷰를 추진했지만 선거관리위원회 측이 선거법 위반이라고 답해서 결국 총선이 끝난 뒤로 미뤄졌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가급적 '정치인' 유시민이 아니라 '생활인' 유시민을 조명하려고 했다. 만나기 앞서 간략하게 조사한 자료만 A4 용지로 200장이 넘었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말하는 기록들이 인터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행적을 따져 묻고 책임을 추궁하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솔직담백했고, 많이 고분고분해졌다. 그 역시 "권력의 중심에도 있어봤고, 나이도 먹었으니 변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느냐"며 웃어보였다. 그를 만나보자.

◆1조원이 있다면? 복지법인을 만들겠다

-(다소 허황되지만 그의 꿈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돈에 관한 이야기로 질문을 열었다) 당신에게 1조원, 100억원, 1억원이 주어진다면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쓰고 싶은가?

"1조원이 있다면 복지법인을 만들겠다. 몇 개 테마를 잡을 수 있는데, 미혼모 문제와 장애인 재활 등이 좋겠다. 그런 쪽에서 우리나라가 약하다. 1조원의 경우, 연간 이율을 6, 7%로 본다면 연간 600억~700억원인데 할 수 있는 사업이 그리 많지 않다. 청각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회사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반회사와 생산성에 별 차이가 없을 걸로 본다. 100억원이 있다면 정책연구소를 만들고 싶다. 정치나 경제를 연구하는. 지금 국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나 시각에 큰 차이가 없다. 이해관계에서 독립된 연구소를 만들면 좋을 것이다. 1억원이 있다면 선거 빚을 갚아야 한다.(웃음) 재산을 마이너스 2억7천 정도로 신고했다. 작년 대선 경선때 후원회 차입도 개인 빚으로 포함됐다. 이번 총선 후원회 정산하고 나면 1억원 정도가 남을 텐데 빚 갚아야 한다. 5년 정치하고 그 정도 빚이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싸움닭'이라고 한다. 왜 일부러 적을 만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한다.

"싸움 많이 했다. 하지만 날만 하니까 싸웠고 그러다보니까 '동네'에서 찍혔다. 일만 있으면 싸운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안 싸우기 시작한 게 벌써 2년 6개월 정도 됐다. 2005년 9월 이후로는 누구와 싸운 적이 없다. 2006년 1월 입각(보건복지부 장관) 후에 싸운 것을 본 적이 있나? 내가 누군가를 인격적으로 공격한 적은 없다. 내 인격에 대한 공격은 무수히 받았지만, 정동영씨도 기간당원제 후퇴를 비판했지만 인격적으로 비난한 적은 없다."

-싸움을 안 했다는 것은 이미지 관리에 들어갔다는 뜻인가?

"고달프니까 안 했다. 당초 정당제도를 바꿔보려고 했는데 소수의 생각이다 보니 당내에서도 많은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2005년 9월 이후 제도나 상황이 많이 좁혀졌다. 상황이 끝나버렸다. 논쟁하거나 노선 투쟁을 할 근거가 없어졌다."

-말을 두루뭉술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나?

"말을 명료하게 하는 게 좋지 않나? 하지만 이제는 명료하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상처를 입더라. 그렇게 명료하게 말한다고 받아주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잘 되지도 않을 걸 굳이 얼굴 붉힐 필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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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안 친다. 너무 빠져들까봐

-이번 질문엔 부가적 설명 없이 '예, 아니요'로만 답해달라. 대통령이 되고 싶은가?

(웃음) 그런 질문이 어렵더라.(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답했다. 이번 질문은 그의 답을 그대로 옮긴다.) 예, 작년엔 되고 싶었는데 요새는 안될 것 같아요. 그래서 생각을 안하죠. 되고 싶다, 안되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술은 좋아하는가?(유 의원은 인터뷰 전날, 지인들과 막창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소주를 마셨다)

"어제도 제법 많이 마셨다. 이 업계(정치권)에 와서 술이 많이 늘었다. 대학때는 원래 못마셨는데. 술을 왜 그렇게 마시는지 모르겠다. 술하고 원수진 것 같다. 술도 (삶의) 윤활유니까 좋게 마시면 될텐데. 많이 먹을 때엔 양주 폭탄주 7잔까지 먹었다. 기자들 접대하느라. 제주도에서 국민연금법 때문에 기자들과 모인 적이 있었는데, 7잔 먹고 곯아떨어졌다."

-이번 총선에서 캐치프레이즈로 '주호영을 청와대로, 유시민을 국회로'를 내걸었다. 누가 제안했나?

"모르겠다. (함께 자리한 공보특보에게) 누가 제안한 거지?"(공보특보는 한 유권자가 제안한 것이라고 답해줬다.)

-골프를 치자는 제안을 받은 적은 없나?

"왜 없겠는가? 유시민을 필드에 데려가면 포상금이 걸려있다는 말도 들었다. 한 사업가가 그렇게 말했단다. 골프 안 하는 이유는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치면 몰두할 것 같고 다른 일을 못할 것 같다. 같이 치는 사람 중에 국세청, 공정위, 검찰 조사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자칫 로비 의혹 받으면 평생 골로 가는 거다. 공직에 있는 동안은 안 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국회의원도 떨어지고 먹고살기 바쁘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슨 골프를 치겠는가?"

-최근 울어본 적이 있나?

"영화 보면서 울었는데 무슨 영화인지 기억이 안난다.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도 나는데 집에선 창피해서 안 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운동화 잃어버려서 달리기에서 2등 하려고 했던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이다. '우생순'도 좋았다. 배우는 송윤아씨를 좋아했다. 편하게 느껴진다.(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노래 이야기를 꺼냈다)

"가수는 이선희씨를 제일 좋아한다. 마산교도소 첫 수감 때였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밀폐된 독방에 있다가 점심 먹고 나서는데 방송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 옛날이여.' 혁명이었다. 내가 감옥에 있는 게 아니라 시원한 들판 위로 훨훨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감정에 몰입했다.)

◆유시민과 대구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시위 때문에 합수부에 끌려갔다. 이틀 동안 마구 패고 나더니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빼놓지 말고 쓰란다. 쓰는 동안은 안 맞으니까 계속 썼다. 하루에 편지지 100장을 썼다. 그때 경감 ○○○가 그 글을 사람들 앞에서 읽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생생하게 썼어. 그림이 막 그려지잖아.' 그때 내가 처음 글을 잘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용은 다 쓸데없는 것이었다. 지하조직은 다 숨기고 학생회 이야기만 잔뜩 썼으니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내 인생의 스승을 딱 한명만 꼽으라면 리영희 선생이다. 계속 변화해나가고 어느 시점 변화의 한계가 왔을 때 펜을 놓고 일절 사회적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이(그렇게 멋있을 수 없다). 그 분의 삶을 보면 지식인이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하고 바랐다."

-대구에는 왜 왔나?(사실 그는 경기 고양에 출마했더라면 훨씬 당선 가능성이 높았을 텐데 대구를 택했다.)

"정상적으로 행동한다면 왜 여기에 왔겠는가? 난 판단이 너무 빠른 게 문제다. 여름 경선(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르면서 정권이 100% 넘어간다고 판단했다. 그럼 다음엔 뭐하지? 정당개혁,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한 사람이 지역주의에 굴복한 정당(통합민주당)에 몸담을 수는 없다. 스스로 부끄러우니까. 탈당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고양에 출마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 스스로 물었다. 3선 의원이 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선거도 안하고 그냥 정계은퇴를 선언하기에는 사람이 너무 싱거워보이지 않는가? 고민해 보니까 대구에 출마할 사람이 없었다. 그럼 대구를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가, 무소속이라도 나가 경쟁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터뷰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구 유권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초상집 가면 그렇지 않은가? 평소 감정이 안 좋더라도 위로말도 하고 조의금도 주고 평소 생각은 아니지만 인품도 고매했다고 덕담도 주고받는다. 그게 인심이다. 낙선했으니까 대구시민들이 넉넉하게 봐줄 수도 있고. 석달 동안 선거를 치르면서 언젠가 대구시민들에게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역 매체와는 인터뷰를 하고 중앙매체와는 정책적 인터뷰 외에는 하지 말자고 결정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좀더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 그것도 인생이지.(잠시 침묵) 힘들기는 장관직이 진짜 정말 힘들더라. 연봉 1억 받고 할 일은 아니다. 일이 너무 많아. 특히 보건복지부라 그런지 몰라도 물리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그는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의 경험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노 전 대통령 평전 써야 되는데…

-아버지는?

"경주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다. 아버지가 시험 감독을 들어오면 학생들이 환호성을 불렀다. 인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시험 내내 창밖을 보거나 책만 봤다. 마음대로 커닝을 할 수 있으니까 좋아했던 거다. 한번은 커닝을 적발했는데, 불러내서는 아버지가 다리를 걷어보이며 '잘못 가르친 탓이니까 나를 때리라'고 했단다.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이후로 커닝은 없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6남매 중 2명은 국립대, 나머지는 사립대를 보냈다. 어머니는 30년 장사를 했다. 19번 버스를 타고 칠성시장에서 물건을 떼왔는데, 고등학생시절 방학 때 정류장에 짐 받으러 나가면 너무 무거워서 내가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19번 버스 기사들이 어머니를 다 알았다. 저 집 아들이 공부를 잘한다더라 하며. 그렇게 어렵게 사시면서도 정부를 원망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한번도 없다."

-요즘은 남의 탓이 난무하는 세상이 아닌가?(이 질문에 대해 그는 상당히 길게 답했다. 간략하게 추려본다.)

"내가 요새 입을 많이 다물고 산다. 말할 힘을 잃었다. 말이 의미를 잃은 시대다. 지식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칼럼을 쓰게 되면, 이런 내용을 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명박 대통령 탓은 아니다.'"(유의원은 서로의 책임과 역할을 찾고, 문제점이 있다면 서로 노력하고 합의해서 해결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단순히 대통령을 비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심정을 파괴한다고도 했다. 그는 굉장한 위기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낙선 인사 끝나면 인사를 한번 가야할 텐데.(인터뷰 섭외를 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에) 인터뷰 안 할 거야.(그래도 한번 말은 해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난 안 될 일은 아예 이야기 안 한다. 그리고 내가 인터뷰하지 말라고 말할 거다. 일절 하지 마시라고. 어떤 매체인가를 떠나서 적어도 몇년간은 그렇게 하시라고 말할 거야. 원래 내가 노 전 대통령 평전을 쓰기로 돼 있었는데. 지금 써볼까? 대통령 물러난 지 일년도 안 됐는데 몇년 더 지나서 써봐야지. 그분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계속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대구에 전입한 시민으로 살 테다

-이번 선거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주 즐겁고 유쾌한 경험이었다. 큰소리 뻥뻥 치는 말은 안 했다. 책임지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하면서 선거를 치렀다. 자기 내면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자기 마음 속에 희망으로 가득차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길을 가다가 주호영 의원이 내건 커다란 플래카드를 봤다. '희망을 드리겠다'는 글귀를 보고 의문이 들었다. 과연 희망을 주겠다는 주 의원의 내면에는 확신이 있을까? 나는 줄 수 있는 희망이 없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저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이 있어야 좋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고향도 여깁니다라는 소박한 이야기밖에 없는데. 소줏집에서 만났으면 물어봤을 거야. '지난 5년 동안 난 확신을 잃었는데, 귀하의 구호는 확신에 차있다. 정말 내면으로 확신하는가?'라고."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 5월 국회에 등원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대정부 질문도 하고 싶은데, 무소속이라 잘 모르겠다. 경북대 총장님 찾아뵙고 강의할 수 있는지 물어보겠다. 과목은 경제학 전공이니까 교양경제학이나 지역발전 등에 대해 하고 싶다. 6월부터는 혼자 살아가야 한다. 비서도 없고 사무실도 없고 운전해주는 사람도 없다. 모든 일을 혼자서 해야 한다. 선거 빚도 갚아야 하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인세는 월 100만원쯤 나온다. 집사람 시간강사로 버는 돈 외에는 소득이 전혀 없으니까, 당장 6월부터 돈을 벌어야 한다. 글 쓰는 재주밖에는 없으니까 어느 출판사에 공갈을 쳐서 선인세를 잔뜩 받을지 고민해야 하고, 그 돈으로 책 쓸 때까지 생계를 유지해야 할 것 같다. 강의도 다음 학기나 돼야 할 수 있을 테니. 어떤 책을 쓸지는 아직 모르겠다. 좋은 책이 아니라 돈이 많이 벌리는 책을 써야 한다.(웃음) 이제 생활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차도 없으니 대구에 사는 동안은 버스나 지하철, 택시를 타고 나닐 것 같다. 이제 대구에 새로 전입온 시민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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