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로 꼽히는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63) 게이오(慶應)대 교수가 이명박정부 출범을 앞두고 방한, 한·일협력시대 개막을 위한 다양한 행보를 하고 있다. 오코노기 교수는 10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미래포럼 주최 세미나에 참석‘이명박 정권 출범과 한일관계’에 대해 기조발표하고 한국의 외교안보전문가들과 토론을 한 데 이어 11일 부산 동서대에서 이명박시대 한·일관계 전망 특강을 했다. “한국의 노무현정부와 일본의 고이즈미·아베정권기는 향후 역사에서 한·일 극단의 시대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하는 오코노기 교수를 11일 만나 이명박·후쿠다 시대 한·일관계 전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명박정부 출범에 대한 최근 일본사회의 분위기를 소개하신다면.
“요즘 일본에서 출간되는 주간지와 월간지들은 이명박시대 한·일 협력에 대한 기대감을 많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무현정부에 대한 실망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이명박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거죠. 노무현정부 출범기에도 일본에서는 기대가 컸었는데. 2년여 만에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바람에 참 어려웠죠. 이번에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노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게 된 동기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 노 대통령이 너무 이데올로기적이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집권 초 대일실용주의를 견지했으나 2005년부터 좌편향 민족주의로 흐르면서 과거청산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일본사회에서는 이명박 대통령당선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기대감을 보이고 있는지요.
“이 당선인이 참신한 이미지를 주고있습니다. 당선인 자신이 건국을 책임진 독립운동가나 산업화를 추진한 군출신세력, 독재권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가가 아닌 기업경영자 출신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이제 기업가 정치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후쿠다 총리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게 사실인데.
“후쿠다 총리와 이 당선인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분 다 대미관계 중시론자인 데다 이데올로기보다 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일양국의 지도자가 모두 실용주의자라는 점에서 양국관계도 잘 풀릴 것으로 봅니다. 특히 후쿠다 총리는 고이즈미나 아베처럼 이데올로기적이지 않고 과거사에 대해서도 겸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후쿠다 총리는 과거 고이즈미처럼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한다거나 국가주의적 견해를 공공연히 표출할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지도층 간의 뿌리 깊은 갈등원인은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더구나 후쿠다 총리는 일본정계에서 볼 때 약간 리버럴(자유주의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베와는 대조적이죠. 아베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꿈꾸면서도 야스쿠니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참지 못했거든요.”
―이 당선인과 후쿠다 총리의 유사성을 좀 구체적으로 얘기하신다면.
“이 당선인과 후쿠다 총리는 실용주의자들인 데다 국제협조와 평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특히 아베는 대북관계를 납치문제와 연결시켜 보려했지만 후쿠다 총리는 훨씬 유연하죠. 노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6자회담에 우선시한 반면 아베는 6자회담에 불만을 표하면서 그 뒤에 있으려한 데 큰 문제가 있었죠. 일본은 6자회담에서 합의한 대북에너지 지원에도 부정적이었고, 북한의 핵실험 후 독자적인 경제제재 방침을 피력해 논란이 됐죠. 한국은 6자회담보다 앞에, 일본은 그보다 뒤에 있으려 한 게 한·일갈등의 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선인은 남북관계보다 6자회담 프로세스와 대외관계를 중시하겠다고 했고, 후쿠다 총리도 6자회담 중시론을 펴고 있기 때문에 한·일양국이 오랜만에 대북정책 차이를 극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명박 시대 개막을 계기로 한·일양국이 공히 실용의 시대로 돌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고이즈미와 노 대통령은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해 한·일극단의 시대를 이끈 지도자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일 민간교류는 지도자 간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확산되면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양국은 민간교류의 힘으로 극단의 시대를 넘어서게 된 것이죠.”
―김대중시대 진행됐던 한·미·일3자협의회(TCOG)를 재가동해 한·일,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데.
“한·미·일관계가 좀더 긴밀해져야 하고, 그것이 한·일관계에도 유익하다고 보지만, TCOG를 재가동하는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10년 전의 상황과 달리 한·미·일관계가 훨씬 폭이 넓어진 데다 대북문제 협의체인 TCOG를 재가동해 굳이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미·일 간에 대북문제뿐 아니라 경제, 안보, 군사, 국제협력 등 다양한 현안을 논의하는 정례채널을 격상시켜 차관급 정도로 마련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는 아세안의 밖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을 정례화하자는 의견이 합의됐는데 한·중·일 정상회의 정례화와 한·미·일 차관급 정례화간에 잠재적 충돌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요즘은 전방위외교시대입니다. 한·미동맹, 미·일동맹이 가장 중요하지만, 동북아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을 하면서도 이웃나라들과도 좋은 관계 유지해나가는 게 외교라고 봅니다. 상호 대립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고이즈미와 아베는 중국과 관계를 악화하면서 미국 및 호주, 인도 등과 연대를 강화하는 이른바 가치관외교를 펼친 이상한 시대였다고 봅니다. 이것을 중국은 대중포위외교라고 비판해왔죠. 지금은 냉전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가치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노무현정부에서 추진됐던 한·일 자유무역협정(FTA)협상의 재개전망은.
“한·일 간의 정치적 미성숙 때문에 협상이 중단됐지만, 이명박시대에 마무리됐으면 합니다. 일본의 농수산물과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협상진전을 어렵게 했던 것으로 압니다. FTA는 한·일 양국 모두에 도전이자 기회인 만큼 양국 정부간에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겠죠.”
―한·일관계가 어려웠던 1970년대 초 한국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게이오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마친 뒤 1972년부터 연세대에서 2년반 동안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중국전공자인 지도교수가 한반도 연구를 권했는데 그 덕분에 한반도 전문가가 됐습니다.”
―그때는 한·일 감정이 좋지 않고 경제적 격차도 컸던 시절인데.
“그렇죠. 역사상 한·일관계가 가장 나빴던 시절이라고 볼 수 있죠. 한·일간에 경제적 격차도 컸고, 갈등의 골도 깊어 국교단절까지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던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한국의 경제가 발전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독도문제, 역사갈등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죠. 현재의 한·일 마찰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동일한 체제를 지닌 나라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는 불편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덜 심각하지만 70년대는 한국이 군사정권 때였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한반도 연구를 시작해 30여년간 남북간 연구에 투신해왔는데 지난 세월을 회고하신다면.
“제가 한반도연구를 시작하던 무렵은 냉전시절이었고, 남북간의 체제경쟁도 컸던 시기인데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치며 남북간 체제경쟁은 끝이 났습니다.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전일화하면서 사회주의체제의 비전은 상실된 것이죠. 남북간의 역관계도 그때부터 본질적으로 달라졌다고 봅니다.”
―북핵문제가 북한의 핵신고지연으로 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데 북핵문제 전망은.
“저는 북한이 핵신고를 성실히 할 가능성이 없는 만큼 향후 관건은 부시행정부가 핵신고의 수준을 어느 정도로 설정할 것인가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는 또한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에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핵문제를 털어낼 자신을 갖지 못한 체제이기 때문에 핵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만큼 좀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북핵체제 해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코노기 교수는 누구
1945년생. 일본의 명문 게이오(慶應)대 법학부 정치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과정을 밟았고 1987년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2년 8월부터 1974년 3월까지 연세대에서 우리 말과 글을 배운 것을 계기로 한반도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에 온 뒤 10월유신과 민청학련사건, 김대중 납치사건을 겪었는데 한국의 격동기 현장에서 말을 배우며 연구를 할 수 있어 다른 사람보다 한반도문제를 빨리 이해하게 됐다”는 게 그의 회고다. 1978년부터 게이오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게이오대 지역연구센터 소장(1999) ▲한·일 공동연구포럼 일본측 대표(1996) ▲한일문화교류회의 일본측 부대표 (1999)▲현대한국조선학회장(2000)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2002) 등으로 활동해왔다. 저서로 ‘한국전쟁’ ‘김정일시대 북조선’ ‘포스트 냉전과 한반도’ 등이 있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차장 muse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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