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회화를 전공한 L교수를 만났더니 앉자마자 혀를 찼다. "큰 일이야. 무슨 생각들 하는지…". 제자들이 강의를 맡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방학중이면 강의 하나 얻기 위해 학교 주변을 얼쩡거리던 그들이었다. 젊은 제자들의 변은 이랬다. "작품을 해야 합니다. 좀 많이 밀려 있어서요." L교수는 "돈을 급히 벌면 마약이 다가오는데…"라며 우려했다.

소문을 들어보니 강의를 사양한 작가의 인기는 대단했다. 서양화를 좀 그리는 30∼40대 작가, 그 '시장의 총아' 그룹에 포함된 것이다. 소품 한 점이 수백만원을 호가했고, 작품은 재고가 없었다. 이들 인기 작가는 100명쯤 되는 모양인데, 색을 많이 쓰는 40대 작가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작품이 팔려나가고, 전시 개막 전에 솔드 아웃 되는 작가도 있다고 한다.

50대가 되도록 마포 언덕배기에 전세를 살던 작가 S씨도 최근 이사를 했다. 좁은 집에다 거실을 작업실로 사용하다 보니 중고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는데, 이제 한강이 보이는 곳에 전세 아파트를 얻었다. 비결은 한 화랑과의 전속계약이다. 전속금은 말하지 않았지만 한 달에 100호 정도 작품 한 점을 건네면 된다고 하니 연간 5000만원 정도로 유추할 뿐.

미술 시장이 이처럼 뜨거워진 근거는 많다. 먼저 그림을 그려본 컬렉터가 늘어났다. 어릴 적에 미술학원이라도 다녀본 사람은 직업미술가의 재능을 인정한다. 뮤지컬이나 발레가 인기를 얻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들이 구매력 왕성한 30, 40대로 성장한 것이다.

소장자 간의 손바뀜 현상도 주목할만 하다. 큰 장이 섰던 1970년대 중반과 1980년대 후반에 그림을 산 컬렉터의 나이가 지금 70, 80대라고 볼 때 처분 혹은 상속을 결정해야 한다. 이 중 처분키로 한 자는 구입한 화랑으로 그림을 내놓고, 화랑은 신용 유지를 위해 경매 시장을 선택했다.

환경 또한 우호적이다. 끈질기게 발목을 잡던 미술품 양도소득세를 떨쳐냈고, 미술품을 담보로 한 대출상품이 등장했으며, 정부 돈으로 미술은행이 설립됐다. 미술품을 구입하면 세제 혜택도 주어진다. 금융기관의 아트펀드는 시장의 공신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모든 게 장밋빛일까. 내가 보기에 우리 미술시장의 펀더멘털은 여전히 허약하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반영이라고 하지만, 구매자의 미학적 소양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부박하다. 경매 시장은 육성해야 하지만 지금은 과열이고 과속이다.

여기에다 그림시장에서 투기자본이 확인될 경우, 양도소득세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트펀드 역시 성공을 확신하기에도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다.

그림은 부동산이나 증권과 다르다. 부동산은 실체가 분명하고, 증권이라는 게임은 국가가 개입돼 있지만, 그림은 스스로 빛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부동산은 스스로 생산을 하고, 증권 또한 기업을 통해 과실이 나오지만, 그림은 신뢰와 애호가 없으면 스스로 무너진다. 그래도 그림이 남지 않느냐고? 기름기가 많은 서양화는 불쏘시개로도 쓰기 어렵다.

손수호/편집국 부국장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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